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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국통사① 치우천황

  蚩尤天皇을 엮으며...

1978년, 나는 처음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하여, 중국 역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천안문의 자금성을 보았다. 자금성에 걸려 있던 현판들은 왼쪽엔 한문(漢文)으로, 오른쪽엔 만주글로 쓰여 있어 이곳이 지난 267년간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식민통치를 했던 대청제국(滿洲勢力)의 도성(都城)이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불과 수년이 지나 다시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이미 정복자 만주의 흔적을 지우는 중국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아예 만주의 역사마저 중국 역사의 일부였다고 궤변을 늘어놓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피정복자가 정복자의 영토와 문화, 역사까지 철저히 흡수해 버리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는 지난 수천 년 동안 거듭되었다. 역대로 중국을 정복했던 국가들이 오히려 중국에 흡수되어 버리는 과정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은(殷)나라는 화산(華山)지역의 보잘 것 없는 집단이었던 화하족(華夏族)을 성큼 집어 먹었으나 결국 화족들에게 흡수된 것을 비롯하여, 훈[匈奴,風夷]족 역시 기세 좋게 중국을 정복하였지만 결국은 중국의 서변 신강성위구르자치구[新彊維吾自治區]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옛날의 영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 등이다.

또 남부의 티베트[西藏族自治區] 역시 중원을 장악한 후 소멸되었고, 세계 역사상 최대 정복국가였던 칭기즈칸의 대몽골제국도 중국을 정복하여 원(元)나라를 세우더니, 지금은 중국의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를 차지한 소수민족의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중국이라는 땅은 두꺼비를 삼킨 뱀의 운명처럼 정복국가가 오히려 중국의 일부로 녹아버리는 독초지(毒草地)였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가우리[高句麗]와 밝해[渤海]의 후예인 만주(滿洲)의 김(金)제국이 수천 년간의 숙적 중국을 정복하고 마침내 대청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지난날의 역사적인 교훈을 잘 살펴두었던 만주인들은 중국인들에게 우리의 풍습을 이식시킬 목적으로 댕기머리를 땋게 하고 변발을 강요하는 등 중국인의 근성을 없애려 노력하였다. 또 백두산(白頭山) 성지(聖地) 100리 이내엔 중국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으며, 이를 어긴 자는 ‘성지를 오염시켰다’는 죄목으로 목을 벨만큼 엄격한 차별정책도 시행하였다. 이외에도 한민족의 고토(故土)인 만주대륙을 내지(內地)로, 만리장성 넘어 중국인들 지역은 외지(外地)로 구분하고, 외지인들의 내지 출입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67년 동안 계속된 식민통치에 정복자들의 마음이 해이해졌고, 대청제국 말기에 불어 닥친 서양의 무력진출에 허둥대다가 ‘손문’의 반란[辛亥革命]을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 중국의 독립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무려 267년간 통치하던 광활한 식민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귀향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신흥 군사강국 일본과 북방의 강자 소비에트의 틈바구니에서 제국의 잔명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2차 대전의 종결과정에서 엉뚱하게 중국 공산당에게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로써 한민족은 지난 6천년간 지켜온 동아의 맹주자리와 함께 조상의 성지(聖地)를 중국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만주대륙이 중국인들의 수중에 들어간 두번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중국인들이 만주지역을 점령한 첫번째 사건은 당이 신라의 도움을 받아 가우리를 멸망시키고 점령군을 주둔시킨 사건이다. 이때 중국은 대조영의 밝해[渤海]가 흥기하면서 쫓겨날 때까지 약 40여 년간 만주를 지배하였다.

그동안 한반도는 남북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극심한 이데올로기 싸움에 휘말려 빼앗긴 만주지역의 탈환은 감히 생각도 못해 볼 상황이었다. 한편, 새로운 점령자로 위치를 굳힌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은 이 기회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1. 만주의 길림성에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설치하여 그 지역의 조선인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차츰 조선인이기를 포기하고 중국의 소수민족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1) 유도하는 정책을 펴 크게 성공하였고,

2. 한편 그들의 주인으로 강압적 식민통치정책을 폈던 만주 본토인들에게는 300년 원한의 복수를 감행하는 듯, 그들의 말과 글도 쓸 수 없도록 강경한 압제정책을 폄으로써 만주인들 스스로 한족(漢族)으로 귀화하도록 유도해 갔다. 그 결과 이통만족자치구 등 몇몇 개의 만족자치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를 대부분의 만주인들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이익을 피하여 모조리 2) 한족 행세를 하게 되었다.

3. 유사 이래로 우리 동이의 위협 속에 한시도 불안한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중국인들은 이번 기회에 불안의 근원지를 없애 만세안보망을 구축하겠다는 정책으로, 만주지역을 중국의 일부로 영원히 합방하려는 술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음모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만주를 연고지로 하는 모든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를 일거에 중국과 연계시켜 역사적인 연고권을 얻어야 했으며, 이를 위한 치밀한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3) (이러한 그들의 기도를 위험하게 보는 이유는, 이 작업이 학자들의 자생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역사 재창조 계획의 일환으로 수많은 사학자들이 동원되고 엄청난 자금이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각종 역사서에 나타난 단어들을 세밀히 재분석하고 이를 기형적으로 꿰맞추어 가우리[高句麗]와 밝해[渤海] 등이 모두 중국 지방정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주는 본래부터 중국의 일부임은 물론이려니와 이곳에서 일어난 대청제국 역시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결론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만주는 중국의 이민족이 아니므로 만주에 의한 중국 정복문제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내부 통일전쟁의 한 형태일 뿐이니 그 어떤 타민족이 중국을 침범한 역사도 숨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1979년, 나는 중국을 방문하여 여러 학자들과 의견을 나눈 바 있다. 그 당시 중국의 학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동이족(東夷族)은 중국의 별족(別族)일 뿐이고,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한족(漢族)과 화하족(華夏族)의 후예로서, 헌원 황제(軒轅黃帝)를 민족의 유일한 시조(始祖)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88올림픽이 있을 즈음 다시 만난 그들의 입장은 크게 변해 있었다. 중국의 별족이라던 동이족이 오랜 세월 중국에 동화되어 살아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동이족 출신인 신농 염제(神農炎帝)까지도 중국의 시조로 모시기로 했다’고 하였다. 그들의 돌연한 역사적 태도 변화에 의아해하는 나에게, 다민족국가인 미국과 소비에트의 예를 들면서 ‘화족중심의 단일민족주의로서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소견을 피력하였다.

나는 극심한 불안과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나를 이미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미국인으로 여겨 주저 없이 내보인 그들의 속내에 담긴 엄청난 음모와, 결국 한국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자금성에서 그들에게 불리한 역사의 흔적을 주저 없이 지워 없애는 현장을 보았고, 이제는 지난 3천년간의 중국사서에 이민족·오랑캐로 규정한 동이족을 새롭게 중국역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그들의 야욕을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혹시 만주(滿洲)를 노리는 것은 아닐까?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특히 대중을 계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몇몇 언론인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그리고 대학교수들과 우리의 고대사에 관하여 담론하였다. 그리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조국은 온통 88올림픽의 흥분에 휩싸여 있을 뿐 우리 고대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만주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북한문제에도 관심이 없었으니 이런 주제들은 마치 외계의 일인 듯했다. 불과 10년 앞에 닥칠 상황을 미리 보고 대처하지 않으면, 앞으로 단군 조선의 터전을 모두 중국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들은 척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나 혼자만 이런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오랜 외국생활에서 몸에 밴 본능적인 과잉반응일까? 하지만 나는 분명히 불씨를 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 무심히 지나치는 동안에 그 불씨는 큰불로 살아나 우리의 자랑스러운 단군의 역사를 한순간에 태워 없앨 것이다. 나는 한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값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그때까지 해오던 사업을 접고 만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민족의 고대사를 회화극본으로 출판하여 잠자는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깨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5년 후, 1993년 12월 최초의 회화극본 『대쥬신제국사[大朝鮮帝國史]』가 동아출판사를 통하여 출판되었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중국의 역사조작 전쟁에, 전쟁발발을 감지하지도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있는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책이 겨우 이것뿐인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대쥬신제국사』는 몇몇 뜻있는 군장성들의 추천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군부대에도 보급되어 젊은이들에게 민족뿌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일조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힘으로 저 13억 대국의 집요한 음모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1995년, 중국의 탁록현에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건립되었고 중국인들은 그곳에 신농 염제와 헌원 황제 그리고 치우천황을 모셨다. 지금까지 ‘중국 침략의 원흉’으로 취급하며 갖은 악담을 다 해대던 우리 배달한국의 제14대 치우천황을 아예 그들의 시조(조상)일수도 있다며 신상을 조각하여 모신 후 제사까지 올린 것이다. 이것은 동이족의 수장인 치우천황을 배척하고서는 그 후손들의 나라인 고조선과 가우리, 밝해, 대청제국의 강토인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가 없음을 깨닫고, 고육지책으로 치우천황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술수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설마하며 우려했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 버린 것이다.
‘월드컵 4강’이란 신화의 달성을 외치며, 웅험한 기와 용기를 내려 주시기를 치우천황에게 기원하던 우리의 붉은 악마의 외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런 우리의 군신(軍神) 치우천황을 중국인들이 훔쳐가 사당까지 새로 지어 ‘시조’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왜 이 책이 서둘러 출판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민족(多民族) 대국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은 그동안의 화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버리고, 최근에 정복한 만주와 티베트, 신강, 내몽골을 포함하여 그 모두를 아우르는 다민족연합국가를 지향하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이를 위하여 역사의 왜곡뿐만 아니라 아예 역사를 조작하는 공작에 국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단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한국인들은 타민족 배타정책의 오랜 전통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의 동포들까지도 한번 중앙의 행정지역을 벗어나면 그들을 ‘재일교포’, ‘조선인’, ‘고려인’ 등으로 구분, 차별하며 민족의 구심점으로부터 멀리 밀어내어 결과적으로 민족의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강단을 선점한 식민·사대사관론자들은 민족의 장래를 바라보는 대승적인 예지력을 상실한 채 철옹성 같은 방어막을 쳐놓고 제 밥그릇 지키기에만 혈안이 되어 제 틀에 맞지 않는 새로운 학설에는 무조건적으로 저항하며 헐뜯기에만 진력하고 있으니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1) 때마침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남북 대결 구도를 이용, 조교(조선교포)를 분리, 감시하는 정책을 폄.

2) 한때 중국을 정복하여 다스렸던 만주대륙에 만주인들은 거의 실종되어 없고 오직 한족들뿐이다. 마치 일제시절의 창씨개명과 내선일체정책을 연상케 한다.

3) 밝해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주장은 “당(唐 618-907)에서 오대(五代 907-1127)까지 말갈족의 한 분파가 동북지역에 수립한 지방정부”라고 정의하여 한국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철저히 차단한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 대쥬신제국사-추무태왕
  •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