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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6장 용이 물을 얻다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

바보 왕 이연과 함께 조선을 파멸로 이끈 또 하나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다. 그의 이름은 원균인데 영광된 한국 해군사에 뛰어 들어 홀로 흙탕물로 휘저어 놓은 자로서 어떠한 이유로도 변호가 불가능한 저주받을 인간의 표상이다. 이자는 부패 무능한 이씨조선의 못된 제도 속에서 성장한 줄타기의 명수로서 온갖 뇌물을 다 동원하여 전라 좌수사에 임명된 바 있으나, 그의 인물됨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간원의 반대로 다시 함경도 부녕 부사로 쫓겨 가야 했었다.

따뜻한 한려수도(閑麗水道)를 놓아두고 메마른 함경도 변방을 지키는 신세가 된 원균은 막대한 양의 뇌물을 동원하며 다시 아름다운 남쪽 바다로 전출되도록 서울의 대감들을 대상으로 맹렬한 로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조일전쟁 발발을 불과 2개월 앞두고 민심은 여러가지 불길한 조짐과 뜬소문들 때문에 자꾸만 흉흉해졌고, 조정은 백성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있었다.
이처럼 불안한 기운으로 민심이 동요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다시 해상방위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원균의 후견인들은 그동안 얻어먹은 원균의 뇌물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기 위하여 왕 이연을 상대로 맹렬한 공작을 펴서, 한 번 불합격 판정을 받은 원균을 기어코 경상 우수사로 발령시키고 말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왜병들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문들이나 백성들의 소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만의 하나 왜병들이 정말로 침략해올 경우 그들을 저지해야 할 최일선 사령관으로서 원균의 능력이나 인물 됨됨이는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경상우수사의 벼슬을 따낸 원균은 의기양양하게 그의 보금자리가 될 경상우수영 본영이 있는 오아포(五兒浦)로 향하였다.
그가 임지에 도착하자, 그 동안 왜침의 소문으로 불안에 떨던 주민들은 새 수사 원균을 환영하였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경상우수영은 거제도 남쪽 끝에 위치한 오아포에 있었다. 이 곳은 경상도의 8관 16포를 방위하는 최일선으로서, 광활한 수역을 지키기 위하여 배치된 해군 병력이 무려 1만 2천명에 달했고, 전함(판옥선)만 해도 75척에 달하는, 남해안 최대의 해군기지로서, 원균이 애당초 노렸던 전라좌수군보다 모든 면에서 무려 3배나 크고 넓었다.

그런데 의기양양하여 도착한 원균의 눈앞에 펼쳐진 우수영에서는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형편없이 스산한 모습만이 펼쳐져 있었다.

원균이 받은 우수영의 첫인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사열식에 도열한 해군 병사들은 완전히 오합지졸이었고 그나마 소집된 병사들의 숫자도 불과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전임 수사는 그 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크게 실망한 원균은 우수영에 있는 전함들의 보존 상태를 시찰하여 보았다. 전함의 보존 상태도 한심했다. 돛대는 부러져 있었고 노의 숫자도 부족했다. 당장 왜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출동시킬 만한 전선은 불과 몇 척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원균은 육장(陸將)이어서 해군의 실정에는 눈이 어두웠다. 그러나 그도 오랜 세월 군에 몸담아 온 장수였다.

장군으로서의 원균은 본능적으로 서둘러 우수영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했고, 전선들이 전투임무에 투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방치해 놓은 책임소재도 밝혀 처벌하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그러자 눈치 빠른 부관들은 원균의 관심을 다른 데로 옮기기 위하여 신임 사또의 부임을 축하한다며 특별한 잔치상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본래부터 성품이 음탕하여 주색잡기를 즐기던 원균이었다. 기생들과 함께 아름다운 경치 속에 푹 빠져드니, 어느덧 전선을 수선하고 군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결심은 봄날 눈 녹듯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이리하여 이 무능한 육장은 처음 경험하게 되는 해군의 성질도 채 파악하기 전에 먼저 술과 계집에 빠져 버렸고, 심심하면 군기를 잡는답시고 병사들을 포악하게 다루어 도망병이 속출하였으며, 그나마 붙어 있는 병사들도 대립(代立)을 세우기 위한 뇌물 마련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대립(代立)이란, 병적에 있는 자가 약 3~4개월간 휴가를 얻는 대신 자신의 사노(私奴)를 복무시키고 역가(役價)로 면포 150필이나 미곡 등을 바치는 행위였다.

원균은 휘하에 꼭 있어야 할 1만 2천명의 병사들 대신에 극소수의 오합지졸들만을 남겨둔 채 대립을 치부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고, 그동안 경상우수사의 벼슬을 얻기 위해 축낸 재산을 다시 긁어 모으는데만 혈안이 되어 전쟁 발발 때까지 약 2개월여의 귀중한 시간을 허송세월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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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환 218.154.62.156 2007-10-14

    뭐에요...욕하는 거에요? 그럼 백성들 나몰라라 하고 당파를 이기지 못하며, 스스로 태평성대라고 못을 박아버린 왕을 임진왜란 만으로 조자를 붙여서 잘난 왕으로 불러야 한다는 거요? 네? 선조의 고조부(세조)씨!

  • 세조 124.60.84.104 2007-09-26

    ㄱ-...ㅗ

  • 임명환 218.154.62.156 2007-08-18

    그나마..이연보다는 낳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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