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전(決戰)
일본 해군의 조선 함대 격멸전은 일본의 최신예 전함 200여 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일본군 10만이 어란진으로 모여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본 해군의 움직임은 이순신 제독에게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9월 9일, 기다리던 일본군 척후선 2척이 나타나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함대의 동태를 면밀히 정탐하고 돌아갔다. 조선군의 함대가 작은 협선을 제외하면 실제로 전함이라곤 12척 뿐임을 최종 확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벽파진을 목표로 하여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일본의 정탐선들이 벽파진의 지형과 수로 그리고 이순신 함대의 동태 등을 관측하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이순신 제독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무방비 상태로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벽파진으로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9월 14일, 드디어 삼호원 나루터에서 봉화가 올랐다.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정탐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이순신은 제장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엄중하고도 비장한 지시를 내리게 된다.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이다. 또 그 병사의 수효는 10만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는 단 12척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함대에게는 자연의 조화와 천험(天險)의 지형이라는 동맹군이 있음을 갈파하고 일본 해군 섬멸 작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작전은 우수영에 있는 명량 해협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명량 해협은 평균 1500(약 500m)자의 폭으로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이다. 이 해협의 좁은 곳은 900(약 300m)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어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400자(약 130m) 정도뿐이다. 또 수로의 물살이 빨라 물살의 방향만 잘 이용하면 적을 능히 격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작전을 상세히 설명하며 불안에 떠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균 함대의 전멸을 경험했던 장교들은 불안한 마음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다음날인 9월 15일,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순신 제독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으로 이동했다.
9월 16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란진으로 총출격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유령함대는 또 사라지고 없었다. 벽란진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수로는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과 조선의 수군 사령부가 있는 북쪽의 우수영 방면뿐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대함대의 출격에 겁을 먹고 우수영으로 달아났다고 판단, 즉각 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선봉으로 하여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합세하고 있었다. 특히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92년 6월 5일 벌어진 당항포 해전에서 전사한 형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선봉을 자원하고 나선 자였다. 그는 무려 133척의 정예 함대를 이끌고 명량 해협으로 접근하였고, 70여 척의 제 2 함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일본 함대가 명량 해협의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12시경이었다. 마침 바다의 물결이 잔잔하여 하늘이 일본 함대를 돕는 듯 하였고 항해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미치후사 함대가 명량 해협 중 가장 폭이 좁은 울돌목에 접근하니, 도망갔다고 판단했던 유령 함대가 기함을 선봉으로 하여 미리 포진해 있었다.
미치후사가 눈여겨 살펴보니 유령 함대의 기함에 오른 장기(將旗)는 분명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 되어 있었다. 비로소 그 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이순신이 실제로 유령 함대를 지휘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기함이 선봉에 서서 일본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로 11척의 전함들이 포진하여 결사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뒤에도 멀리 한 무리의 선박이 있었으나 큰 전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치후사는 당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이순신과 한판 붙어보는 것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면서 단 12척의 적선을 133척의 최신예 전함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배를 갈라 죽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해협의 폭이 좁아 함대는 종대로 전진해야 했다. 이 당시의 해전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적선에 접근하여 병사들이 배를 기어올라 선상에서의 난전(亂戰)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수척의 일본 돌격선들은 조선의 기함을 사방에서 포위하고자 양쪽으로 날개를 벌리며 우회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깥쪽으로 돌던 왜선들이 돌연 물 속에 숨어 있던 암초에 걸리면서 기동 불능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서야 왜 함대는 기함을 포위하려던 작전을 바꾸어 중앙으로 재집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왜선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기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으로 집결된 왜선들이 앞으로 전진하여 해협을 빠져나오는 순간, 좁은 물길을 가로막고 우뚝 서 있던 조선 함대의 기함이 서서히 옆으로 돌더니, 종대로 덤벼드는 일본 함대를 향해 지자포와 현자포 등, 함재포들을 일제히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도 일제히 활과 총을 쏘아 대기 시작하니, 선봉에서 달려들던 일본 전함이 단번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조선 함대는 우선 현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의 기동력을 마비시킨 후, 곧이어 조란환이라 불리는 새알 크기만한 쇳덩어리를 한 번에 100-200개씩 산탄으로 발사하였다. 이순신의 기함 한쪽에서 한 번에 발사되는 조란환은 모두 약 2척 개나 되어 갑판 위에 노출된 왜병들은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전법을 이순신 제독은 합력사살(合力射殺)이라 하였다.
앞장선 전함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처참한 지경이 되자, 후열의 전함들은 조선 군함의 가공할 함포 사격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따르는 동료 함선들 때문에 뒤로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물살이 그들을 조선 함대 쪽으로 밀어주고 있어서 후퇴하기가 물리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진해도 죽고 물러서도 죽게 되었으니 선발 돌격선들은 결사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들은 기함의 위기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제독의 기함이 홀로 적을 맞아 약 1시간 동안 결사전을 전개하며 왜 선단을 차례로 격침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박전을 겨냥하여 조총을 주로 사용한 데 비하여 조선 해군은 대포를 주무기로 한 현대적인 함포전으로 일관하여 처음부터 상이한 전투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불과 1시간여의 싸움으로 일본 군함 20여 척이 깨어졌으며 승선 인원 대부분이 몰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