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96
안녕하십니까?
구양수가 편찬한 자치통감의 당고종 의봉(儀鳳)원년(676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676년이면 백제가 멸망한 지 1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二月,甲戌,徙安東都護府于遼東故城;先是有華人任安東官者,悉罷之。徙熊津都
督府于建安故城;其百濟戶口先徙於徐、兗等州者,皆置于建安。
2월 갑술일에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옛성으로 옮겼다. 그에 먼저 안동도호부에 임명된
화인(華人, 중국인)들이 있었는데 모두 파면했다.
웅진도독부를 건안(建安)의 옛성으로 옮겼다.
우선 그 서주(徐州), 연주(兗州)등지에 있는 백제의 호구(戶口)를 옮겼다.
모두 건안(현 복건성 복구(福甌), 복건성 절강성 등지) 에 두고 다스렸다.
또 당고종 의봉2년(677년)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春,正月,乙亥,上耕籍田。
初,劉仁軌引兵自熊津還,扶餘隆畏新羅之逼,不敢留,尋亦還朝。二月,丁巳,
以工部尚書高藏為遼東州都督,封朝鮮王,遣歸遼東,安輯高麗餘眾;
高麗先在諸州者,皆遣与藏俱歸。又以司農卿扶餘隆為熊津都督,封帶方王,
亦遣歸安輯百濟餘眾,仍移安東都護府于新城以統之。時百濟荒殘,命隆寓居高麗之境。
藏至遼東, 謀叛,潛与靺鞨通;召還,徙邛州而死,散徙其人于河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高麗舊城沒于新羅,餘眾散入靺鞨及突厥,隆亦竟不敢還故地,
高氏、扶餘氏遂亡。
봄 정월 을해에 경적전(耕籍田)을 올렸다.
초에 유인궤가 병력을 인솔하고 웅진으로부터 돌아왔다.
부여융이 신라의 핍박을 두려워 하여 감히 머물지 못하고 또한 조정으로 돌아올 길을
찾았다. 2월 정사에 공부상서 고장(高藏, 고구려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아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아가게 해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도록 하였다.
그에 앞서 고구려는 여러 주에 있었는데 모두 보장왕과 함께 보내 모두 돌아갔다.
또한,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대방왕에 봉하고 이 또한 돌려 보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도록 하였고 이전의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겨서 통치했다.
그 당시의 백제의 무리들은 부여융에 명하여 고구려의 땅에 살게 했다.
보장왕이 요동에 이르러 몰래 말갈과 내통하여 모반을 하였다.
소환하여 공주(邛州, 현재의 사천성 공래현(邛崍縣))으로 귀양을 보냈으나 죽었다.
그 남은 사람들을 해산시켜 하남, 롱우(隴右, 현 청해성 악도)등지에 이주시켰으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근방에 머물도록 했다.
고구려의 옛성은 신라에 넘어 갔으며 남은 무리들은 말갈, 돌궐 등에
흩어져 들어갔으며 부여융 또한 마침내 감히 옛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로서 고구려와 백제는 망하게 되었다.
나라가 망한 서글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와 같은 꼴을 다시는 당하지 말아야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고종 의봉원년의 기록을 볼 때 백제의 호구를 서주, 연주 등지에서 건안으로 옮겨
건안에서 다스렸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서주(徐州)와 연주(兗州)는 어디인지 알아보면
서주는 제가 전에 소개해 드린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가 있었던 강소성의 숙천(宿遷)지방을
중심으로 산동성의 서남부와 강소성의 서북부지역입니다.
또한 연주는 산동성의 제녕등 산동성의 남부지역입니다.
당(唐)이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 살던 백제의 거주지와 사람들을 저 멀리 복건성 건안으로
보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바로 백제의 멸망당시의 지역이 이 곳이라는 반증입니다.
산동성, 강소성 일대가 백제의 마지막 결전지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멀리 복건성 등지로 보낸 것은 바로 반란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가지 당고종 의봉원년(676년)과 의봉2년(677년)의 기록을 대조해서
살펴보면 앞뒤가 안 맞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봉원년(676년)에 백제의 호구를 복건성으로 이주시켰는데 (이주전 지역은 백제인이 없을텐데...)
의봉2년(677년)에 다시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대방왕으로 봉하고
고구려의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도록 하고
그 백제의 유민들을 고구려 지역에 살게 했다는 기록을 볼 때 먼가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이야기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에는
백제의 강역이 위에서 말한 산동성, 강소성 외의 다른 지역에도 백제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기록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나옵니다.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時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 渤海• 靺鞨所分
國系遂絶
의봉(儀鳳) 연간에 융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백제의 부여융은 대방군왕으로 봉해져서 그 지역을 다스렸지만 신라가 강성하여 감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멸망당시의 백제는 산동성, 강소성 이외의 지역에도 존재하고 있었고
결국 부여융은 산동성, 강소성의 백제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되어 있는 바
이 산동성, 강소성은 신라로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Page : 108 / 183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
---|---|---|---|---|
1308 |
고시(古詩) 사진 자료 판매개시
[0]
![]() |
태양도 | 2004-02-25 | 2179 |
1307 |
朝鮮을..."쥬신"이라고 기록하는 뜻은 ...
[0]
![]() |
이준설 | 2004-02-25 | 2180 |
![]() ![]() |
관중 | 2004-02-26 | 2255 | |
1306 |
큰일 하는구만.
[0]
![]() |
노을 | 2004-02-25 | 2131 |
1304 |
산동성 봉래의 고구려 고성(古城)과 당태...
[0]
![]() |
思無不通 | 2004-02-24 | 2319 |
1301 |
조선족에 만주족을 포함시킬 수 있는가??
[0]
![]() |
민족사 | 2004-02-24 | 2182 |
![]() ![]() |
관중 | 2004-02-24 | 2754 | |
1300 |
한국인의 뿌리
[0]
![]() |
박지호 | 2004-02-23 | 2205 |
![]() ![]() |
민족사 | 2004-02-24 | 2231 | |
1298 |
3.1 절 자주민족사 광복 선언대회
[0]
![]() |
김종욱 | 2004-02-23 | 2099 |
1297 |
"조선반도의 분열 국면을 고착화시켜라"
[0]
![]() |
월계자 | 2004-02-22 | 2001 |
☞ |
건안(建安)으로 옮겨진 백제의 호구(戶口...
[0]
![]() |
思無不通 | 2004-02-21 | 2250 |
1294 |
시원탑 관련글
[0]
![]() |
태양도 | 2004-02-21 | 1906 |
![]() ![]() |
관중 | 2004-02-21 | 2092 | |
1293 |
한국인에게 고합니다...
[0]
![]() |
홍익뉴스 | 2004-02-20 | 19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