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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식부터 바로잡자

파리 센강에는 유람선이 뜬다. 한 30분 정도 거슬러 오르다가 돌아오는 뱃길에 노트르담 사원을 비롯해 강변 풍경은 역사 그 자체다. 퐁네프였던가, 어느 다리에 배가 이르면 갑자기 안내자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난간마다 새겨진 31명의 얼굴 중에 여자가 끼여 있는데, 근대 초기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이다. 있거나 말거나, 프랑스의 페미니즘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무튼, 관광객들은 그 여자의 얼굴을 찾아내고 즐거워했지만, 그 여성이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무대를 옮겨 한강유람선을 탔다고 가정하자. 안내자가 할 말은 별로 없다. 저게 63빌딩이고, 국회의사당이고, 밤섬입니다. 혹시 그때가 밤이라면, 파란색 다리는 인도교, 초록색은 마포대교, 빨간색은 성수대교입니다로 끝이다. 그것이 약간 허전하다면, 서울의 야경이 볼 만하지요? 정도를 덧붙일 것이다. 삼한(三韓)시대부터 2000년을 흘러 온 한강, 500년 조선의 도읍을 가로질러 흐른 한강, 20세기 한국에 휘몰아친 온갖 풍상을 지켜본 한강에 '역사'는 없다. 역사가 없는 것은 한강뿐만이 아니다. 5000년 역사에 인물이 없을 리 없건만, 남한 어디를 뒤져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외에 기릴 만한 인물의 동상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을 건설한 태조 이성계의 동상을 아직 본 적이 없고, 정조가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화성(수원)에도 정조의 동상이 없다. 한국이 선비의 나라임을 누구나 자랑스레 얘기하건만 정도전.조광조.송시열.이이.이황.박지원.정약용.최익현 등 기라성 같은 학자.정치가의 동상이 도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대의 대중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무덤으로 남거나 사당에 안치되어 있다. 혹시 이들 중 묻혀 있던 과오가 새롭게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그 무덤은 파헤쳐질지도 모른다.

요즘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친일 청산'에 앞서 우선 성찰할 게 있다면 바로 우리의 이런 역사인식이다. 필자는 3.1절 기념식에서 일본에 '역사적 죄과를 인정하고 배상할 것'을 역설하는 당당한 대통령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일본이 강제 징용자와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의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통치자의 그 열정에 화답하는 몇몇 시민단체의 방식에는 거칠고 조야한 민족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엿보인다. 한강에 역사가 없는 것은 역사를 지웠기 때문이고, 5000년 역사에 위인이 없는 것도 100% 순정품만을 인정하려는, 말하자면 우리 역사인식에 스며 있는 순수성에의 맹목적인 향수 때문이다.

들리는 말로는, 경남 통영의 어느 시민단체가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들어 그의 시비(詩碑)를 철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응답하듯, 3.1절 이른 아침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친필 현판이 도끼로 쪼개졌다. '의거'를 한 사람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을 지낸 46세의 남자였다. 친일파 박정희가 윤봉길 의사의 거룩한 정신에 한 점 얼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비를 파괴하고 현판을 박살내는 행위로 지펴질 민족의식에서 또 다른 어떤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웬일인지. 윤봉길 의사의 주검과 박정희의 친필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 풍경에서 민족주의와 친일 행적의 얽힘을 아프게 읽어 내는 것이 우리의 역사정신이라면, 구태여 부수고 짓밟아 무엇을 구하려는 것인가.

박정희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자. 박정희가 독재자임은 천하가 다 안다. 친일 행적도 밝혀졌다. 그런 방식으로 박정희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우고 압제로 짓눌렸던 자유의 역사를 복원했다고 하자. 그러면 50대 이상의 '서러운 기성세대'가 증산.수출.건설에 청춘을 바쳤다는, 잘못된 방식인 줄 알면서도 '조국 근대화'에 동원되어 자식세대의 풍요에 거름이 되었다는 절망적이고 유일한 자존심마저 땅에 묻힌다. 세태가 이런 마당에 박정희에게 후한 평가를 내릴 용기도 뜻도 없지만, 적어도 5.16 군사쿠데타 이후 3~4년간 박정희는 당시의 많은 시민과 다수 지식인에게 어쨌든 '진보'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쯤은 밝혀 둬야 한다. 그것도 진보였더냐고 묻는다면 역사를 자신의 빛깔로 덧칠하고 싶은 욕심을 드러낼 뿐이다. 현재의 입장과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것만큼 비역사적인 행위는 없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