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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도시, 평양천도에서 배워라

1500년전 선조들의 고민 정도는 해야하지 않는가

김병섭

우리 역사에 있어 수도를 옮긴 사례가 몇 번 있다. 단군조선의 수도의 위치 및 수도이전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므로 이를 제외하고도, 고구려와 백제는 2차례 수도를 옮겼다. 발해, 태봉국(후고구려), 조선의 경우도 수도를 옮긴 적이 있지만 개국 당시의 어수선한 시기에 단행되었던 것이어서 깊게 논의 될 성질은 아니다. 고려의 경우는 평양 천도에 관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좌절되었다.

백제는 위례성을 상실한 후, 임시수도인 공주를 거쳐 부여로 옮긴 것이니 주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직 고구려만이 수도를 주체적으로 옮긴 것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졸본)은 현재 오녀산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발 800m 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개국 초기 국력이 약했던 고구려인들은 적의 침입을 용이하게 방어하기 위해 이 곳에 터를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바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실질적인 수도는 국내성부터라고 할 수 있다. 왜 400년 제국의 수도이자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국내성을 뒤로 한 채, 고구려인들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고구려의 평양천도를 말 할 때 흔히 우린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관련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고구려인이 남긴 역사서도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그 어느 책에도 남진정책이라는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후대의 학자들이 장수왕이 한반도 남부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두고 남진정책이라고 부를 뿐이다. 남진정책과 평양천도를 연결짓는 것은 한참 잘 못된 생각이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터 근처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면 로마제국은 왜 전쟁터 근처로 수도를 옮기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시절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수도를 전쟁터 근처로 옮기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만 전쟁터와 수도를 가까운데 놀 만큼 호전적인 것인가? 고려의 평양천도 세력들도 북방영토 회복을 내세워 국경 근처인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배층의 세력다툼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인들의 향수도 한 몫을 한 것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인이 영토 확대를 위해서 전쟁터 근처인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설명은 일제가 조작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면 고구려인이 평양으로 천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 이전에 고구려인들은 국내성을 왜 나와야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수도를 옮기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인 런던과 파리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차이점부터 볼 필요가 있다.

런던과 파리와 국내성이 확실히 다른 점은 자연환경이다. 런던과 파리는 평지에 만들어진 도시다. 반면에 국내성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런던과 파리는 인구가 늘어나고 산업시설이 들어서도 이를 담고, 확장할 공간이 있지만, 국내성은 그럴 수가 없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시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았고, 수도는 국제도시로써 재편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 싸여있는 국내성은 이를 담을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국내성에는 수 만개의 무덤이 있었다. 1900년대 초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했을 때에도 1만 2천여 개의 무덤이 있었다니... 장수왕 시대의 무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많았던 것인가? 1만 2천여 개의 무덤만 해도 국내성의 반에 해당한다. 장수왕 시대에는 수도 국내성의 반이 이상이 무덤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이 무덤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기 때문에 훼손은 불가능했다. 국제도시로써 국내성은 몰려들어오는 사람과 물자를 담을 수가 없었다.

또한 국내성은 교통도 상당히 불편했다. 험준한 산악지형에 좁은 길... 적을 방어하기엔 적합했지만,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는 데에는 상당히 불편한 지형이다. 교통은 도시의 입지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조선시대에도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이유 중에 하나는 수원이 교통의 요지였다는 것이었다.

즉 고구려의 천도는 폐쇄적인 방어적 수도체계에서 국제적인 개방형 수도체계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고구려인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개방형 수도체계라면 만주벌판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만주벌판은 방어가 용이하지 않다. 평지에서 적을 막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평양은 어떠한가? 평양은 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평한 지형지만, 북쪽으로 험준한 산에 산성들이 위치해 방어체계를 형성하고 있어 방어가 용이한 지역이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은 바닷길을 이용하면 된다. 남포는 그 시절에도 현재와 같이 평양의 외항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수/당과의 전쟁을 통해 확인 되었지만 고구려의 수군은 막강했기 때문에 바닷길을 통한 적의 침입은 봉쇄될 수 있었다. 또한 이견이 있지만 평양이 단군조선의 중요 도시였음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단군조선 시대 평양은 후기 수도였다는 설, 처음부터 수도였다는 설, 단군조선 삼조선의 하나인 마조선의 수도였다는 설 등이 있다.) 당시 고구려의 조정에서는 이런 고민 끝에 평양천도를 단행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오녀산성. 가장 폐쇄적인 방어적 수도였다. 당시엔 적으로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수도의 기준이었다. 국력이 커진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시대 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넘쳐나는 국력을 담을 수 있는 공간 확보였다.

지금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둘러쌓고 많은 논란이 오고가고 있지만, 과연 1500년 전 선조들의 수도이전만큼 치밀한 계산과 고민이 있었는지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당시 평양천도를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논거를 만들었을 계획가는 누구였을까? 자연환경과 시대상황에 관한 정확한 인식. 광개토태왕 때부터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은 정책의 일관성과 치밀한 구상. 평양성 축성을 통해 평산성이라는 새로운 도시의 패러다임 제시까지... 우린 국토를 계획함에 있어 당시 선조 계획가들에게 많은 점을 배워야 한다.


2005/06/01 [12:25] ⓒ브레이크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