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입니다

글쓴이 권재현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유형으로는 요동반도 남단, 발해의 섬 중 하나인 광록도에서 발견된 소주산(小珠山) 하층문화와 요하 하류의 심양 신락(新樂)문화, 그리고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의 흥륭와(興隆窪) 문화와 홍산(紅山)문화가 있다. 이들 신석기 시대 문화유적에서는 동북아시아 신석기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보편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함께 가히 ‘빗살무늬토기 문화’라고 이름 할만하다.”

-이형구 교수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중



8월 3일~9일 중국 랴오닝(遼寧)성과 지린(吉林)성 일대 고구려유적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각종 사진들과 글로 머릿속에 재구성했던 고구려유적과 현장에서 보고 느낀 그것은 격차가 컸습니다. 고구려유적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풍부했습니다. 함께 답사여행을 다닌 서영수 단국대 교수님의 말씀대로 높고, 크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현장에서 갖게 된 느낌은 고구려역사를 둘러싼 한중간 갈등의 뿌리는 단순히 고구려라는 거대영토를 지닌 고대국가의 역사귀속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서(史書)의 해석 문제가 아니라 고고학적 해석을 포함한 문명사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역사상 만주, 간도, 요동, 발해만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지금 중국의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의 동북3성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로 구성돼있습니다. 그중에서 랴오닝의 성도인 선양(審陽)의 시청 앞에 세워진 시 상징물은 6000년~7000년 전 신석기문화 유적인 신락 하층문화에서 발굴된 여사제의 지휘봉입니다.

신락문화는 흥륭와문화, 홍산문화 등과 함께 황하문명과 다른 별도의 문명사적 기원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빗살무늬 토기와 돌무덤, 용형태의 옥돌을 특징으로 하는 이 문명은 훗날 비파형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져 중국이 동이(東夷)라고 말하는 수많은 종족들의 뿌리가 됩니다.

동이족은 누구입니까. 물론 고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편의대로 분류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한민족의 한 뿌리로 불리는 예맥족, 여진족, 거란족, 몽고족, 돌궐족들입니다. 예맥족은 예족과 맥족을 합쳐서 부른 것인데 만주지방에서도 평야지대에 살던 이들을 ‘더러운 짐승 같다’해서 예(獩)족으로 부르고 산속에 살던 이들을 ‘사나운 짐승 같다’해서 맥(貊)족으로 불렀습니다. 그 예맥족은 고조선-부여-고구려를 거쳐 한반도 남부의 한(韓)족과 합쳐져 오늘날 한민족을 구성하는 양대 지류라고 믿어집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는 오늘날 한민족은 그냥 남부의 한족으로 만들어졌으며 북부의 예맥족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는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논리가 도출됩니다. 한민족에게 이는 단순한 역사왜곡이 아니라 문명사적 도전입니다. 과연 우리의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고려 때만해도 한민족은 동이족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주장했고, 발해와의 연계성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또 거란족이 세운 요가 침공했을 때 서희장군이 나서 담판을 벌일 때도 ‘형제의 나라'가 등장했고, 여진족이 세운 금과 몽고족이 세운 원의 침공 때도 ‘형제의 나라’라는 인식은 계속됐습니다.

문제는 조선의 건국이후 동이족이라는 인식에 단절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고조선의 계승국이라는 인식은 있었으나 동이족의 일원이라는 인식 보다는 그들과 단절돼 중화의 세계관에 편입된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이 강렬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진족이 자신들의 땅과 종족의 귀부를 청원했을 때 이를 매몰차게 거부했고, 명청 교체기에 청이 아니라 명의 편에 섰던 것입니다.

이를 지금의 시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같은 동이족이라 하더라고 그들 사이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에 비교적 따뜻하고 비옥한 한반도에서 농업국가로 정착해 살았던 한민족으로서는 유목민족으로 남아있는 그들이 성가신 약탈자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하나로 묶여가고 있지만 라틴, 갈리아, 게르만으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계속했던 유럽의 여러 종족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현대입니다.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고에서 21세기는 인종, 문화, 종교적 차이게 기초한 문명 간의 충돌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8세기~20세기가 민족과 이념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탈민족과 탈이념의 시대가 되면서 민족의 확장개면으로 문명, 이념의 대체개념으로서 문화가 제시될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헌팅턴은 그 문명권을 기독교권, 라틴 아메리카권, 이슬람권, 아프리카권, 힌두권, 중화권, 일본권의 7개로 분류했습니다. 자, 한국은 이들 문명권 중 어디에 들어갈까요. 중화권입니까 일본권입니까.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런 문명사적 맥락에서 중화권의 확대를 노린 것입니다. 중국은 중화문명의 뿌리를 과거 황하문명 중심론에서 황화문화와 흥륭와(興隆窪)와 홍산(紅山)문화의 결합으로서 설명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중원지역을 지배한 한족뿐 아니라 중국역사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주변 이민족을 하나의 문명권으로 엮어갈 수 있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선양시의 상징물이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지만 한(漢)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시기는 한(漢), 송(宋), 명(明) 왕조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고구려사 지키기는 한국의 문명사적 존재기반을 찾는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고구려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한반도와 만주, 몽고, 중앙아시아와 터키로 이어지는 동이족의 문명사적 근원을 회복하는 작업과 맞물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몽골리안 벨트’라 불러도 좋고 ‘투르크-알타이-퉁구스 문명’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이런 문명사적 복구를 통해서 우리는 유럽연합과 같은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적극적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중화문명 또는 일본문명의 일부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말로 다른 동이족들과 달리 반만년 간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자존을 지켜온 한민족의 유구한 전통을 지키는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