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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2995

신빙성 있는 대륙조선설
작성자 :
김정환  (IP :116.32.137.31 )
적성일 :
2008-01-29
조회수 :
8571

신빙성 있는 대륙조선설


대륙삼국에 이어, 대륙고려, 대륙조선설이 대두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한반도에는

현재 대한민국 이외에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된다.

대륙삼국의 경우 어느정도 수용 가능하나 대륙조선에 대해서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서울 종로에 엄연히 경복궁이 있고, 그 근처에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다던 운현궁이 있고, 왕십리쪽에 경운궁(덕수궁)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대륙조선설을 뒷받침 해주는 것들이 있다면, 조선왕조실록에 메뚜기떼에 대한 피해와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에 군대편성중에 기마병을 두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80%가

산지였는데, 기마병을 둘이유가 있었을까? 또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도로 표류해 왔다는 것이다. '신하멜표류기'의 역자 해군예비역 중령 최두환 선생님께서는 10년이 넘게 대륙조선에

관해 연구를 해오셨는데, 해군경력 30년, 해상경력 12년에 비춰보아도 도저히 하멜은 제주도로

표류해 올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만에서 제주도까지 해상거리가 991Km이고, 기록을 본다면

태풍을 만났는데, 배가 반쯤 파손 되었으며, 선원들 대부분이 배를 포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표류해 왔을때 열대기후에도 불구하고, 무장한 군인들을 보았으며, 야자술을 얻어먹었고,

악어들을 봤다는 것,그리고 높은산지에 논농사지대가 많았다는 것이다. 지금 현 제주도를 생각해

본다면, 지리학적으로 현무암지대로 물이 금방 빠져나가 논농사를 거의 지을수가 없다.

한반도보단 비교적 기후가 온후한 것이긴 하나 열대기후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선조가 피난을 간 방향이 남에서 북이아니고, 동에서 서쪽으로 갔다는 것과 임금님 수랏상에 올랐을정도로 질좋은 쌀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은 조선시대

당시 척박한 곳이라 해서 쌀농사를 전혀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몇백년만에 토질이 쌀농사를

지을수 있을만큼 달라질수 있을까?

과연 어떠한 경로로 대륙에 있던 조선이 한반도로 옮겨온 것인가? 필자가 대륙조선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된것은 20세기 손문정부가 신해혁명을 일으키면서 그 전후로 하여 한반도로 이식되었을 것이란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대륙에서는 25사라고 하는 역사서가 만들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라고 하는 말도 안되는 역사서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또다시 다른 의견들이

있는데, 과연 그전에 한반도는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주공산이었을 것이다란 것과 임진왜란으로

세력을 약해진것을 틈타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한반도로 모두 내 쫓아 17세기까지만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설이다. 그것에 대한 근거를 지금 현재 오르도스 지역 (섬서성과 산서성 중심지역)을 돌어봤던 외국인 선교사가 이주해온 중국인들이 반도로 쫓겨간 조선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게 그의 일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반도 전체가 강화도였을 것이다란 설이다. 필자가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으나, 몽고가 고려에 쳐들어왔을때 수도가 강화도로 천도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다. 또 이당시 궁궐을 많이 지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는데, 현재 강화도에는 전각만 몇개 있을뿐이다. 그래서 현 서울 종로에 있는 경복궁과 운현궁, 경운궁 등이 이 당시 지어진 왕궁인데, 조선이 한반도로 이식이 되면서 개조되었을 것이란 것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경복궁과 현재의 경복궁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 궁의 위치와 전각의 갯수 그리고, 경복궁 앞에

넓은 연못이 있었는데, 어떠한 경로로 그것이 없어졌는지에 관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팔만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것과 백두산 부근에는 높고 험한 산지가 많아, 기마민족인 몽고가 산을 넘어오지 못했을거란 것이다.

조선후기 어떻게 양반의 숫자가 급속하게 늘었는지가 설명된다. 첫번째 주장의 경우 무주공산

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쉬웠을 것이다. 이름없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쉬우나 이름이

원래부터 있던 아이에게 다른 이름을 강제로 지어준다면 그 아이는 그것을 부정하고 말것이다.

이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원주민들을 꽤어 양반감투를 씌우고, 대륙에서 뺏어온 족보등으로

그들에게 교육 시켰을 것이란 거다. (한반도가 무주공산이었다면, 대륙에 있던 왜족내지는 회이족이 옮겨왔을 가능성이크다.)

두번째 주장의 경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 당시 몰락한 양반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고,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청나라가 조선의 집권층 대부분을 한반도로 말그대로 쫓아버렸을 것이란 것이다.

세번째도 한반도로 쫓겨온게 두번째와 맥락이 비슷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도 분명 집권층들을

쫓아내버려야 했을것이라 생가된다. 선대에 백제부흥운동과 고구려부흥운동이 있었던것 처럼 집권층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여 그러한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은가? 양 병란을 거치면서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무엇을

내다팔아 돈을 긁어모았는가? 상업에는 신용이 중요한 것을 중개무역을 했을 것이란 것도 아무것도없는 폐허에서 했을리가 만무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봤을때 대륙조선설은 연구되어질만하고,

이렇게 된다면 고려 또힌 대륙에 있었던 것이 더 자명해진다.

단지, 수박겉핣기 식으로 배운 역사에 비춰본다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들이다. 허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한반도사가 더 황당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다시 되찾아야만 한다. 언제까지 속고만 있을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언제까지 놀아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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