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78
국호로 본 조선과 한국의 정체성 上
오늘날 남쪽과 북쪽에서는 각기 국호를 달리해 부르고 있다. 한 민족이 두 국가로 갈라져 체제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탓으로 남쪽에서는 북쪽을 ‘북한’, 북쪽에서는 남쪽을 ‘남조선’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요즈음 남북의 교류 협력을 논의하는 공식석상에서는 각기 ‘북측’ ‘남측’이라 부르기로 했다 한다. 경색된 이질적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희석시켜보려는 의도일 것이다. 미봉책이나마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 나타난 여러 국명의 유래를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의 모든 역사책에는 ‘고조선’ 시대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시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용어다. 그러면 왜 고(古)를 붙였는가? 곧 이씨 왕조인 조선보다 앞서 있었던 ‘옛 조선’이라는 뜻이다. 이씨 왕조 또는 국명을 표시하는 ‘조선’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듯이 쓰여져 원조 조선은 고유 이름을 사용치 못하고 푸대접을 받은 꼴이 된 것이다.
‘옛 조선’의 유래는 상당히 복잡하다. ‘삼국유사’에는, 처음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국명을 ‘조선’(朝鮮)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조에도 이 국명을 연달아 사용했다. 그리하여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명명한 것이다. 중국의 여러 역사책에는 흔히 조선을 비롯해 동이, 예맥, 한(韓)이라 기록하면서 왕조 또는 국가의 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 이민족의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다가 진·한시대 중국의 영역을 통일한 뒤 이민족과 엄격하게 구분 짓는 중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의 역사가들도 중화주의적 기술방식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한(漢) 시대 이루어진 ‘사기’와 ‘한서’에 이런 기술방식이 나타난다. 중국 고전 ‘서경’의 홍범편에는, 주(周)의 무왕이 은왕조를 정벌하고 나서 기자를 찾아가 정치의 요체를 물었다고 했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일러주었다고 했다. ‘사기’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한편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단군은 선위를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했다.
이런 기록들은 모두 기자조선이 시작했다는 시대보다 1,000여년이 지난 뒤의 것들이다. 역사 사실과 맞지 않는 조작이요 허구일 뿐이다. 공자·맹자가 지은 글도 읽지 않은 고대 미개한 조선사람들이 아무리 현인 기자를 알아보고 임금자리를 선선히 내주었을까? 기원전 3~4세기에 동쪽에는 초기국가로 예맥족이 세운 예맥조선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에 들어선 왕조는 위만조선이었다. 연나라 장수였던 위만은 연나라에서 망명해 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얻은 끝에 망명객들을 모아 무역독점권을 갖는 등 힘을 길렀다. 그런 뒤 준왕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었다. 위만조선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 시기는 철기시대였다. 한 무제는 정복전쟁을 벌여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위만조선 관련의 기술은 역사적 사실과 상당히 부합될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국명은 적어도 세 왕조에 걸쳐 사용했다.
다음 남쪽의 한(韓)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후한서’의 동이열전에, 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를 요약해보면 한에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진한·변한이라 했다. 마한은 가장 큰 나라로 54국, 진한은 12국, 변한은 12국 등 모두 78국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한반도 남쪽에 있었던 한은 작은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연맹체 국가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아주 미개했으며 한편으로는 중국 사람들이 유입되어 문화수준을 높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이 일어나면서 소멸되었다.
조선과 한이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다시 살아날 기회를 갖게 됐다.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사대를 표방하고 명 태조에게 국명 선택권을 주었다.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和寧) 두 가지를 골라서 하나를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은 옛 조선의 국명에서 빌려온 것이며 화령은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의 옛 지명이었다. 1393년 명 태조 주원장은 “동방 족속의 나라 이름으로는 조선이 좋을 뿐만 아니라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 이름을 본래대로 이으라”고 통고해왔다. 그동안 우리 역대 왕조에서 국명을 중국의 황제에게 지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씨 왕조는 자주적 태도를 버리고 국명을 복수로 지정하여 승인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타도했으나 인심이 쉽게 돌아오지 않고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게다가 주원장은 툭하면 정복하겠노라고 을러댔던 것이다. 또 성리학자 출신 관료들은 끊임없이 명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국명을 주원장에게 지정받은 것은 자주와 주체성에 생채기를 냈다.
18세기 후반기 조선사회는 실학자들에 의해 사대를 반성하고 자주의식을 고양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는 연구작업이 일어난 것도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럴 때 이익 안정복 등에 의해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 제기됐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그 체계를 세웠다. 정통론이란 중국 사가들이 중국의 황제를 세계의 통치자로 보고 뒤를 잇는 새 왕조의 계보를 대어 정통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 이외의 나라에는 정통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이씨 조선의 사가들은 맹목적으로 이런 이론을 빌려와서 우리 나라 역대왕조를 중국의 제후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안정복은 단군-기자-삼한을 정통의 줄기로 잡았다. 그리고 이를 이은 왕조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꼽았다. 그리하여 그동안 단군-기자-위만으로 이어지는 정통설을 수정한 것이다. 여기에 부연하기를 단군은 처음 나라를 열었고, 기자는 처음으로 문물을 흥기시켰기에 정통으로 삼는다고 했고, 위만은 찬탈했기 때문에 정통에서 제외한다고 했다.
하지만 단군을 국조로 받들면서도 기자의 아랫자리에 두었고 기자의 동래설(東來說)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삼한 정통의 기준을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왕(韓王)이 되었다는 근거를 댔다. 안정복도 중화사상에 충실한 중국 사서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무래기들이 모여 연맹체 국가를 이룬 삼한의 실체를 너무 과대 포장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밀려나는 듯한 역사분위기를 깔아놓았다.
어쨌든 이익, 안정복 등이 내세운 삼한정통론으로 하여 ‘한’이 새삼스레 역사의 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식은 결국 19세기 변동기에 새로운 문제를 던졌던 것이다.
-고려 해상무역 왕성 ‘꼬레아’로 유럽전파-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뭉뚱거려 동이(東夷)라 불렀다. 이는 국명이 아니라 혈연집단을 나타낸 말이었다. 이(夷)는 ‘근본’을 뜻한다고도 하고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자도“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이는 여러 가지 이름이 보이는데 아홉 종류를 합해 구이라 불렀다. 이들은 요동 일대에서 살다가 차츰 중국의 산동반도로 진출했고, 이어 회수 일대에서 살았다. 또 내륙 쪽으로 연달아 진출했다. 그리하여 은나라 말기에 두 차례에 걸쳐 정벌을 단행한 기록이 갑골문자에 나타난다.
그 뒤 중국 사람들은 동방의 종족을 두고 예맥이라 불렀다. 예맥족들은 혼하와 길림 일대,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지방, 춘천 또는 강릉지방에 살았다고도 한다.
예맥족을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예맥의 예는 ‘더럽다’, 맥은 ‘오소리(또는 담비)’라는 뜻이다. 야만이라는 말과 통한다.
고구려가 일어나 영역을 크게 넓혀가면서 그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갔다. 고구려는 동방의 나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는 통에 북쪽 지대의 중국 사람들은 많은 반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유민을 보고 ‘거우리 팡쯔’(句麗 幇子)라 불렀다. 또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는 고구려 노(奴)라는 욕을 먹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여 글자 한 자를 빼고 국명으로 삼았으니 발음도 비슷했다. 고려는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벌였다. 예성강 입구에 있는 벽란도는 국제항구로 등장하여 중국 상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개경에는 이들 상인이 묵는 숙소를 지정해 둘 정도였다.
중세 동아시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비롯, 네덜란드 상인 등 유럽 사람들의 발길이 잇달았다. 고려는 자연스레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유럽 사람들은 고려를 ‘꼬레아(corea)’라 부르기 시작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이 동방을 침략하면서 많은 지도를 작성했다. 어느새 꼬레아는 코리아(korea)로 바꾸어 표기했다. 영어권 표기를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를 이은 조선은 코리아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본이 알파벳 순서대로 국명을 적을 때 꼬리아는 시(C)로 시작되고 재팬(japan)은 제이(J)로 시작되어 시가 앞에 가기 때문에 케이(K)로 바꾸게 작용했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떠돌았다. 현재 이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진실을 더 규명해 보아야 할 일이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쪽에 거주하는 여러 종족을 뭉뚱거려 동이(東夷)라 불렀다. 이는 국명이 아니라 혈연집단을 나타낸 말이었다. 이(夷)는 ‘근본’을 뜻한다고도 하고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자도“구이(九夷)에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이는 여러 가지 이름이 보이는데 아홉 종류를 합해 구이라 불렀다. 이들은 요동 일대에서 살다가 차츰 중국의 산동반도로 진출했고, 이어 회수 일대에서 살았다. 또 내륙 쪽으로 연달아 진출했다. 그리하여 은나라 말기에 두 차례에 걸쳐 정벌을 단행한 기록이 갑골문자에 나타난다.
그 뒤 중국 사람들은 동방의 종족을 두고 예맥(穢貊)이라 불렀다. 예맥족들은 혼하와 길림 일대,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지방, 춘천 또는 강릉지방에 살았다고도 한다.
예맥족을 부여와 고구려의 뿌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예맥의 예는 ‘더럽다’, 맥은 ‘오소리(또는 담비)’라는 뜻이다. 야만이라는 말과 통한다.
고구려가 일어나 영역을 크게 넓혀가면서 그 이름이 널리 퍼져 나갔다. 고구려는 동방의 나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는 통에 북쪽 지대의 중국 사람들은 많은 반감을 보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유민을 보고 ‘거우리 팡쯔’(句麗 幇子)라 불렀다. 또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는 고구려 노(奴)라는 욕을 먹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여 글자 한 자를 빼고 국명으로 삼았으니 발음도 비슷했다. 고려는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벌였다. 예성강 입구에 있는 벽란도는 국제항구로 등장하여 중국 상인은 물론 아라비아 상인들의 발걸음도 잦았다. 개경에는 이들 상인이 묵는 숙소를 지정해 둘 정도였다.
중세 동아시아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비롯, 네덜란드 상인 등 유럽 사람들의 발길이 잇달았다. 고려는 자연스레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유럽 사람들은 고려를 ‘꼬레아(corea)’라 부르기 시작했다.
19세기 유럽 사람들이 동방을 침략하면서 많은 지도를 작성했다. 어느새 꼬레아는 코리아(korea)로 바꾸어 표기됐다. 영어권 표기를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를 이은 조선은 코리아로 불리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본이 알파벳 순서대로 국명을 적을 때 꼬리아는 시(C)로 시작되고 재팬(japan)은 제이(J)로 시작되어 시가 앞에 가기 때문에 케이(K)로 바꾸게 작용했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떠돌았다. 현재 이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진실을 더 규명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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