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957
조선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1: 고려가 사천성인 촉(蜀) 지방을 평정하다
지금 소개하는 글은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 - 그 숨은 비밀을 찾아서>(집문당, 2003)에 실린 내용이다. 원문과 새로운 번역문을 보고서 력사를 한번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자.
[원문]
賀平蜀表 李穡
皇建極而撫九有. 奄宅中邦. 師以律而出萬全. 畢 群醜. 捷音所及. 喜氣交騰. 欽惟云云. 以堯舜神聖之資. 當殷周征伐之擧. 起江湖跨楚越. 所向無前. 平齊魯掃燕雲. 攸 相慶. 大勳斯集. 汚俗惟新. 男有室女有家. 悉皆安堵. 書同文車同軌. 孰敢不庭. 惟彼蜀邦. 盜稱名字. 負險拒命. 夫豈知 臂圖輪. 聲罪加誅. 不 若鴻毛燎火. 劍閣塔. 安流. 玆由天運之方來. 實出聖謀之獨斷. 混一之速. 前古所稀. 臣某. 幸獲逢辰. 想聞奏凱. 岑守職. 敢忘再造之私. 虎拜揚休. 恭上萬年之祝.
[* 중간에 한자가 빠진 것이 있는데, 한자 지원이 안되어서 일어난 문제이니, 필요하신 분은 위에 소개한 책을 참고 바랍니다.]
[번역]
사천의 촉(蜀) 지방을 평정한 일을 하례하는 표문 리 색
황제께서 군림하여 구주(九州)를 어루만지시니, 중국(中國: 中邦)에 오래 거처하시고, 군사가 기율(紀律)로써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나가며, 못된 무리들을 모두 섬멸하자, 승리했다는 소식이 미치는 곳마다 기뻐하는 모습이 솟아올랐습니다.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운운. 요순(堯舜)의 신성하신 자격으로 은(殷)나라·주(周)나라의 정벌의 의거(義擧)에 당하시어, 강호(江湖)에서 일어나 초(楚)나라·월(越)나라를 가로질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 없고, 제(齊)나라·노(魯)나라를 평정하고, 연산(燕山)지방과 운중(雲中)을 쓸어 도처에서 서로 경하(慶賀)하며, 큰 훈공(勳功)이 겹쳐 모이고, 더러운 풍속이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남자는 아내를 가지고, 여자는 시집가 모두 가정에 안도하고, 글은 같은 글자, 수레는 같은 궤도, 누가 칭경(稱慶)하지 않겠습니까?
생각건대 저 촉(蜀)나라 지방이 명자(名字)를 도둑질해 황제라 일컬었으니, 험고한 지역을 믿고 명을 거역함이 제 어찌 당랑(螳螂)의 팔로 바퀴를 막음인 줄 알았겠으며, 죄를 성토하고, 주륙(誅戮)을 가함이 마치 기러기 털을 모닥불에 태움과 같았습니다. 검각(劍閣)의 길이 다시 탄탄해지고, 출렁이는 염여퇴( 堆)의 물결이 금시 잔잔해졌으니, 이는 모두 천운의 사연(使然)이요, 성모(聖謀)의 독단(獨斷)에서 나온 것이므로, 혼일(混一)의 빠름이 오랜 옛날에도 드물었던 일입니다. 신 리색은 다행히 성시(盛時)를 만나 개선가를 바로 듣는 듯하니, 제잠( 岑)에 구실을 지키면서 감히 나라를 다시 일으킨 은혜를 잊으오리까. 호배(虎拜)로 성덕(聖德)을 찬양하여 공손히 만년의 축수를 올립니다.
이 글을 지은 리색(李穡: 1328∼1396년)은 고려 말기 삼은(三隱) 의 하나 목은(牧隱)이다. 그는 14살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부친 리곡(李穀)에 의해 원나라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에 괴과(魁科: 과거에 첫째로 합격함)에 들었으며,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장원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지제고(翰林知提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內書舍人)·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가 되었으며,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371년(공민왕 21)에 정당문학(政堂文學), 1373년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때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는데,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함안(咸安) 등지로 귀양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문 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금천(衿川)·여흥(驪興)·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졌으나, 고사했으며,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피서를 가다가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역시 리색은 성균관 대사성 시절 즈음에 주원장이 활약했던 시기의 사람이다.
이 글의 앞부분은『고려사』권43 공민왕 21년(임자, 1372) 3월에 거의 같은 글로 나온다. 다만 "云云"은 "皇帝陛下"일 것이며, "江湖(양자강과 동정호)"는 "江淮(양자강과 회수)"로, "惟新"은 "維新"으로 적혀 있을 뿐이다.
여기서의 황제는 천자요 고려의 임금 공민왕이다. 이 글을 지었던 시기에는 주원장이 황제의 칭호를 받을 수 없고, 그 자신이 사천성 지방에 겨우 명승(明昇) 일당의 불법한 행위를 징계한 것밖에 없다.
여기서 검각(劍閣)은 사천성 검각현 동북쪽의 검주(劍州)이다. 섬서성에서 사천으로 가는 길목이다. 아무리 칭찬·하례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한반도에 살면서 사천성 검각현의 길이 어쩌니, 저쩌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지역을 다녀왔거나, 가까이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말이다.
또 염여( )는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서남쪽 구당협수(瞿塘峽水)의 강이다. 이런 지역을 포함하여 고려가 명실공히 요순 임금의 덕치로서 초나라·월나라·제나라·노나라 지방을 모두 평정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蜀邦. 盜稱名字" 곧 "촉 지방의 임금이 명자(名字)를 도둑질해 황제라 일컬었다"는 것으로써 알 수 있으며, 이로 보아,『고려사』에 있는 기록은 1372년(임자. 공민왕 21)에 대하(大夏)의 임금 명승(明昇)과 관련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5월에 진리(陳理)·명승(明昇) 등 남녀 27명씩(모두 54명)이 서울에 들어왔다. 진리·명승이 궁중에 들어왔다. 공민왕이 보평청에 나왔다. 진리·명승은 계단 위에서 절하고, 임금은 앉아서 절을 받았다. 례가 끝나고서 그들은 사신의 아래 자리에 앉았다. 명승은 나이 18살이요, 진리는 22살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明史』(명사)에 보면, 1371년(홍무4. 공민왕 21년. 신해) "4월에 명승(明昇)의 장수 정세정(丁世貞)이 문주(文州)를 쳐부수었지만, 수장(守將) 주현충(朱顯忠)은 여기서 죽었다. 중산후(中山侯) 탕화(湯和)가 사천성 중경(重慶)에 이르자 명승이 항복했다."고 했으며, "7월에 부우덕(傅友德)이 성도(成都)로 가서 사천(四川) 지방을 평정했다. 명승은 서울[京師(경사): 개봉]에 이르렀는데 귀의후(歸義侯)에 봉했다."고 했다. 그리고 1372년(홍무5. 공민왕 22. 임자) "1월에 진리(陳理)·명승(明昇)이 고려(高麗)에 옮겨갔다."고 한 것에서 사천 지방에 있던 주원장이 고려의 제후임을 알 수 있다.
뒤에 설명되지만, 1381년에 운남 지역이 평정되고, 1417년[태종 17, 명나라 성조(成祖) 15, 년호 영락(永樂)] 이후에 신강성 옥문관(玉門關)·돈황(敦煌)·이녕(伊寧)에까지 이르렀다.
조선(朝鮮)의 중심에 중국(中國)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2 : 고려가 안남(安南) 지역을 평정하다
이 글은 이미 발표된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집문당, 2003)에 나온 것이다. 원문을 번역한 것이 어디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면서 조선사의 진실을 찾아가보자.
[다만, 원문에 빠진 것이 있는 것은 한자 지원이 안되는 이 싸이트의 한계 때문임을 양해바랍니다. 원문을 확인 하려면 위에 소개한 책을 참고 바랍니다.]
[원문]
賀平定安南箋 李穡
崇居貳極, 翼文德於誕敷, 參決萬機, 揚戎兵於克詰, 屬玆播告, 擧有 , 竊以 爾昏迷, 敢行剽竊, 實人神之共怒, 而天地之不容 宜整六師, 以施九伐, 風霆動湯, 皇威耀於荒 , 日月貞明, 俗歸於美化, 匪伊示武, 惟以底寧, 恭惟仁篤好生, 義敦除暴, 致一方之再造, 期四海之永淸, 凡在見聞, 鑄非蹈舞, 伏念 逢盛際, 喜聽捷音, 職雖係於 岑, 阻參稱賀, 心切馳於鶴禁, 倍祝康寧.
[번역]
안남(安南) 지방을 평정했음을 경하하는 전(箋) 리색
황태자의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크게 펴는 문덕(文德)을 보좌하시고, 만기(萬機)를 참결(參決)하시어 필승의 작전을 수행하시니, 이번 포고(布告)에 모두들 환성을 올립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조그만 혼미한 것들이 감히 표절(剽竊)을 행하니, 실로 사람이나 귀신도 공노(共怒)하여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일인지라, 마땅히 육군(六軍: 천자가 통솔하는 7만5000명의 군사)을 정돈하여 구벌(九伐)을 베풀 것인데, 천둥번개 같은 세찬 세력이 움직여 황위(皇威)의 위엄에 빛나고, 해와 달이 정명(貞明)하여 야만스런 풍속이 미화(美化)에 귀속하니, 이는 무력(武力)을 시위함이 아니요, 오직 평정(平定)을 위함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어질다는 것은 호생(好生)에 돈독하고, 의(義)는 제폭(除暴)만을 위주하니, 한편으론 나라를 다시 일으킴으로써 사해(四海)의 영원한 평화를 기약할 것입니다. 무릇 보고 듣는 자는 뉘 아니 기뻐 춤추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외람되이 성시(盛時)를 만나 반갑게 첩보를 듣고서, 구실이 비록 시골에 매어 칭하(稱賀)에 참례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황태자의 궁전에 달려 배나 강녕을 축원합니다.
[해설]
리색은 고려가 촉(蜀)지방을 평정한 사실을 표로 올린 것이다. 이것은 고려의 임금에게 올린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안남 지방 평정에 황태자[貳極(이극)]가 직접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육군(六軍)이라는 표현으로써 알 수 있다. 1군이 1만2500명이니, 6군이면 7만5000명이다. 이 군사는 천자가 통솔하는 부대이다.
공민왕의 황태자라면 뒷날에 우왕(禑王)인 무니노(牟尼奴: 1364∼1389년)가 되며, 이 때가 나이 8살 때가 된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표절(剽竊)했다"는 말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곧 "稱盜名字"(칭도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1371년의 촉(蜀) 지방 - 대하(大夏)의 명승(明昇)과 관련된 글임을 알 수 있다. 이 안남(安南)이란 곳은 귀주성(貴州省)의 안남현(安南縣)일 수도 있고, 안남도호부가 있었던 교주(交州)로서 광서성 창오현(蒼梧縣)이 중심이 되는 광동(廣東)·광서(廣西)·안남(安南) 지역이다.
북회귀선(北回歸線)이 있는 엄청나게 멀고도 더운 열대지방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곳까지 고려의 천자가 통솔한 군사가 세력을 뻗쳤던 것이다.
이런 력사적 사실을 한반도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조선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3 : 고려 조정이 운남(雲南) 지역을 평정하다
이 글도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집문당, 2003)에 실린 내용이다. 빠진 한자가 많은 것은 그 원문을 참고하여주기 바란다.
[원문]
賀 朝廷平定雲南 發遣梁王家屬 安置濟州 表 李崇仁
大春秋之一統. 運啓中中邦. 整雷霆之六師. 威加南極. 捷音遠播. 喜氣旁騰. 竊以虞書書載有苗之征. 漢史記交趾之擊. 盖其執迷而干紀. 故乃聲罪而致誅. 爾雲南. 濱於海 . 妄謂險遠之足悖. 敢肆跳梁而不恭. 爰出睿謀. 偉矣萬全之擧. 克平 俗. 赫然一怒而安. 息馬投戈. 超今邁古. 玆盖重華協德. 光武同符. 告厥成功. 混車書 宇之內. 屈此群醜. 置 虜海島之中. 是宜 之消. 益慰神人之望. 伏念幸逢昭代. 欣聞凱歌. 攝政釐東. 雖阻駿奔之列. 陳詩美上. 聊伸燕賀之誠.
[번역]
고려 조정이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을 압송하여 제주(濟州)에 안치함을 하례하는 표 리숭인
춘추[春華秋實: 문예(文藝)와 덕행(德行)이 뛰어남]의 일통(一統)을 크게 하여 운(運)을 중국(中國: 中邦)에 열었고, 뇌정벽력(雷霆霹靂: 천둥번개) 같은 육군(六軍: 천자가 통솔한 군사)의 위엄이 남방에 떨치니, 첩보(捷報)가 멀리까지 전해지자, 기쁜 기운이 곳곳에 솟아오릅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우서(虞書)에는 유묘(有苗)의 정벌을 실었고, 한사(漢史)엔 교지(交趾)를 격차했음을 적었으니, 대개 저들이 사리에 어두워 천명(天命)을 항거했으므로, 죄악을 성토받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저 조그만 운남이 바닷가에 있어, 망령되이 험하고 먼 것을 믿고서 감히 도량(跳梁)하여 불공(不恭)하므로, 위대할손 만전(萬全)의 꾀로써 광속( 俗)을 냅다 평정하고, 벌컥 한번 노(怒)하시어 평화를 회복하였으니, 이는 대개 중화(重華)가 덕을 협찬(協贊)하고, 광무(光武)의 공(功)과 부합됩니다. 그 성공을 보고함에 환우( 宇) 안에 거서(車書)가 통일되고, 이 못된 무리들을 굴복시켜 해도(海島: 제주) 안에 포로를 안치하니, 이로써 요분(妖 )이 마땅히 사라지고, 더욱 신인(神人)의 기대를 위로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다행히 소대(昭代: 잘 다스려진 세상)를 만나 반가이 개선가를 듣고, 정사를 동방에서 돕는 때문에 준분(駿奔: 썩 빠르게 달림)의 대열에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시(詩)로써 임금님을 찬미하여 애오라지 연하(燕賀)의 정성을 폅니다.
[해설]
이 글의 저자는 리숭인(李崇仁: 1349∼1392년)이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호는 도은(陶隱)이다. 그는 공민왕(1330∼1374년)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으며, 우왕(1364∼1398년)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한때 유배되었다. 그 뒤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으며, 1386년(우왕 12)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는 간신 리인임(李仁任)의 인족(姻族)이라 하여 통주(通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첨서 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에 또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다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게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리숭인의 젊은 시절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던 그런 시기였다. 그 시기에 고려 조정에서는 운남 지방에 전군으로써 평정하였다는 글을 지어 올린 것이다. 그것도 그곳을 다스리던 양왕(梁王) 가속을 붙잡아다 제주(濟州)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내용이다. 그러나 고려가 개경(開京)인 하남성 개봉(開封)에서 다스린 나라였다면 아주 쉬운 내용이 되며, 그 해도(海島)라는 제주(濟州)는 산동성 제남(濟南) 지역이 되므로 모두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 된다.
이 글은『고려사』의 1381년(신유, 우왕 8) 7월에 거의 같이 적혀 있다. 다만 맨 앞에 "황제가 운남을 평정하여 양왕(梁王) 가속을 붙잡아다 해도(海島) 제주(濟州)로 옮겼으며, 우왕에게 보내온 밀직사사 류번여(柳藩如)가 개경(開京: 京師)에 축하드리는 표문에 이르기를"이라는 것이 적혀 있고, "致誅"가 "致討"로 적힌 것이 다를 뿐이다. 제주로 옮겨진 사람들은 박박태자(拍拍太子) 및 그 자식들 60명이었다. 이 제주는 한반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제주도(濟州島)가 아니며, 산동성 제남(濟南)·제녕(濟寧) 지역이다.
리숭인이 지은 이 글의 제목에는 "朝廷"(조정), 곧 "고려"라고 했고,『고려사』속에는 문장 속에 "帝"(제), 곧 "황제"라고 했다. 우리는 통상 황제라면 "명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 내용으로 보아 결코 "명나라"라고 볼 수 없으며, 고려의 "우왕"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리숭인이 자신이 소속한 임금인 우왕에게 보낸 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운남을 평정한 시기가『고려사』대로 따른다면, 앞에서 안남(安南)을 평정한 1371년보다 10년이 지난 1381년임을 알 수 있다. 고려는 10여 년에 걸쳐 남방 지역을 평정한 것이다.
이 시기에『明史』(명사)에 보면, 태조 14년(1381) "9월 1일에 부우덕(傅友德)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삼고, 람옥(藍玉)을 좌부장군(左副將軍), 목영(沐英)을 우부장군(右副將軍)으로 삼아, 군사들이 운남(雲南)을 쳤다. …11월 30일 조용(趙庸)이 광주(廣州)의 해구(海寇)를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12월 17일에 부우덕은 백석강(白石江: 운남 곡정현 동북 8리)에서 원나라 군사에게 크게 패하여 마침내 운남 곡정현(曲靖縣)으로 내려갔다. 21일에 원나라의 량왕(梁王) 파잡라와이밀(把 刺瓦爾密)이 보녕현[普寧縣: 광서성 용현(容縣)]으로 달아나 자살했다."고 했다.
"파잡라와이밀"은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다섯째 아들인 운남왕(雲南王) 홀가치(忽哥赤)의 후예로서 량왕(梁王)에 봉해졌던 사람이다.
여기서 명나라를 나라[국가]라고 본다면, 이것은 2달의 차이가 나긴 하지만, 같은 지역인 운남을 고려의 군사도 정벌했다는 모순이 발생된다. 결국 명나라란 고려의 제후국이기에 고려·조선의 역사가 성립될 수 있게 된다.
이 운남(雲南)은 어디인가? 지금도 중국 남서부의 맨 끝의 국경 지방이다.
그리고 유묘(有苗)니, 교지(交趾)라는 지명을 보자.
묘(苗)는 묘주(苗州)를 말하며, 묘족(苗族)을 가리킨다. 사천성에서 운남성 지역에 걸쳐 사는 사람들이다.
교지(交趾)는 운남성 서주현(西疇縣) 서남쪽 지방인데, 이곳은 마관현(馬關縣) 땅과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월남(越南)이다.
그 량왕(梁王)이 다스렸던 터가 바로 이 운남 지역이며, 우왕 8년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이곳의 북쪽 사천 지방에 10년 전에 고려의 전군을 보내 평정한 곳이며, 명나라가 세워진 곳이다. 그것은 곧 고려의 제후의 나라다. 어찌 한반도에서 무슨 군사를 그렇게 내었으며, 어느 길로 운남까지 갈 수 있단 말인가! 육로? 해로? 한반도에서는 그 어떤 길로도 불가능하다. 또 량왕 등을 한반도 남쪽 제주도로 어떻게 옮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 글은 앞의 리색의 글과 마찬가지의 시기를 말하며, 뒤에 설명되는 1371년 대하(大夏)의 명승(明昇)과 관련된 사건이며, 주원장(朱元璋)과도 관련된 것임에 분명하다.
비록 맨 끝에 "연하(燕賀)"라 하여 "사람이 집을 지으면 제비들이 서로 축하하며 기뻐한다"는 뜻에서 남의 성공 - 명나라 주원장의 일을 축하하는 말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오직 각색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제목에서 그냥 "朝廷"(조정)이라 했으니, 곧 "고려의 조정"이며, 다른 글의 표현에는 "稱賀"(칭하)·"稱慶"(칭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저 "慶賀"(경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운남 지방에는 지금도 10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차나무가 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차왕수(茶王樹)"니, "Big Tree"라고 하면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의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다.
조선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4 : 고려의 남쪽에 명나라가 이웃해 있다
[원문]
北元遣兵部尙書 哥帖木兒來 都摠兵河南王中書右丞相擴廓帖木兒 貽書曰… 上北邇大朝 南隣朱寇. …今料彼設若不歸大朝 亦當南事朱寇 則呑 無厭.
移書曰… 小之事大必得所恃, 乃可立國. 如先君往年, 以大駕北狩, 必暫餌朱寇, 以安境內.
[번역]
북원(北元)의 병부상서(兵部尙書) 패가첩무르( 哥帖木兒)를 파견해왔는데, 그는 도총병(都摠兵) 하남왕(河南王) 중서 우승상(中書右丞相) 확곽첩무르(擴廓帖木兒)가 준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 내용에 …고려(高麗)는 북쪽에 북원(北元: 大朝)이 가까이 있고, 남쪽에 명(明: 朱寇)나라가 이웃해 있다. …생각컨대 설령 고려[彼(피)]가 원나라[大朝(대조)]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도 또한 남쪽의 주원장[朱寇(주구)]을 꼭 섬기게 되고야 말 터인데, 그 때에 주원장은 당신 나라[고려]를 집어삼키고야 말 것이다.
편지를 보내왔다. 그 내용에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데는 반드시 믿는 곳이 있어야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너의 전왕(前王: 공민왕)이, 지난해에 우리 황제(순제)께서 북쪽으로 옮기셨기 때문에, 반드시 잠깐 동안 명(明: 朱寇)나라에게 미끼[餌]를 주어서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을 것이다.
[해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적힌 말만으로 판단해보자.
두 사료의 내용은 1376년(병진 우왕2) 10월에 고려 우왕(禑王)에게 전해준 원나라의 사신이 보낸 같은 편지의 내용이다.
원문의 "朱寇"(주구)는 "(명나라 태조를 가리킴)"으로 설명했으니,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키며, 또 그가 있는 곳이다. 원(元)나라가 순제(順帝) 때에 패하여 북쪽으로 쫓겨가자 북원(北元)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북원(北元)이라면 본디 원나라의 발원지인 울란바토르(Ulanbator: 烏蘭巴托)로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明史』(명사)에 보면, 이보다 10개월 전에, 확곽첩무르는 1375년[홍무(洪武) 8] 8월 21일에 죽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패가첩무르가 심부름 왔다면 죽어서 귀신이 된 확곽첩무르의 글을 가져왔단 말일까? 둘 중에 하나는 거짓 기록이다.
확곽첩무르는 하남성 침구현(沈丘縣) 사람이며 본디 왕씨(王氏)였으며, 어렸을 적의 자(字)는 보보(保保)였다. 화림(和林)에서 대장군(大將軍) 서달(徐達) 등 15만 군사들에게 파하자, 명나라 군사는 마침내 요새(要塞)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는데, 그는 주인[순제(順帝)]을 따라 금산(金山)으로 가서 죽었다.
화림은 화녕로(和寧路)이며, 이곳은 원나라 때의 옛 도읍지이며, 지금의 외몽고(外蒙古)의 고륜(庫倫) 서남쪽 북위 48 동경 103 에 있다. 울란바토르의 서남쪽이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금산(金山)"은 하남성 신양현(信陽縣) 남쪽의 산일 수도 있지만, 화림에서 패했다고 했으므로, 그 화림 근처의 산이거나, 그 서쪽에 있는 알타이산[Altai Mt. 阿爾泰山(아이태산)]일 것이다.
일단 그런 사람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에서 고려의 남쪽에 명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 놓았다. 시기가 1376년인데 그 때의 고려가 만약 한반도에 있었다면, 이 설명은 전혀 설득될 수 없는 기록이다.
고려가 어느 곳에 있었다는 것은 그 이듬해 1377년 9월에 "전 대사성(前大司成) 정몽주(鄭夢周: 1337∼1392년)를 답례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보내어 다시는 해적 금지를 요구하는 국서를 전했다.
조선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5 :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다
고려를 중심으로 하여 지난날에는 그 남족에 명나라가 이웃해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
오늘은 아예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었다는 사례를 들어본다.
이런 사례를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조선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생각하면 그 지리적 위치가 머리에 윤곽으로 잡힐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정체성을 칼로 무우 자르듯이 밝힌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다파나국이 한반도와 그북쪽지역의 국가였다는 것도 하나의 가설로 내세웠을 뿐이다. 한반도의 정체성을 발히는 것은 조선의 정체성을 밝히면 자연스레 나올 문제라고 본다.
그래서 다음의 사례를 잘 읽어보자. 물론 이 글은 <대동여지도에서 낙타전쟁>(집문당, 2003)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원문]
遣前大司成鄭夢周 報聘于日本 且請禁賊 書曰 竊念本國 北連大元 西接大明 常鍊軍官以充 守禦 於海寇 只令沿海州郡 把截防禦賊徒偵候 … 厚意其益圖之.
[번역]
전 대사성(前大司成) 정몽주(鄭夢周)를 일본에 보내어 답례하고, 또 왜구를 금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에 '생각컨대 우리 나라(고려)는 북쪽으로 원나라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 명나라와 붙어있어 항상 군관들을 훈련하여 수비 방어를 담당시키고 있으며, 해적에 대하여서는 다만 연해의 주·군에 명령하여 방어하게 했었다.… 앞으로 잘 조처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해설]
여기 이 내용은《고려사절요》에서는 정몽주를 일본에 보냈다는 말만 적혀있지만,《고려사》에는 고려·북원·명나라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놓았다. 즉 분명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다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고려의 남쪽에 명나라가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한반도의 서쪽에 붙어있는 곳에는 물고기가 사는 황해(黃海) 바다일 뿐이다.
더구나《中國歷史地理》(중국역사지리: 石璋呂, 臺灣: 中國文化大學出版部, 1983)의 "섬서(陝西)편에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욕심을 내었으나, 국세(國勢)가 부진(不盡)하여 실현하지 못했다.'라고 했다."는 기록에서 명나라의 강역의 한계가 동쪽으로 사천성 동쪽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려의 서쪽에 명나라가 붙어있었다.
이런 기록을 종합하면, 결국 명나라의 강역은 촉지방인 사천성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뻗쳐 있으므로, 고려의 중심지 서울 개봉(開封: 開京)과 서경(西京)이요 서도(石)라는 장안(長安) 쪽에서 보면, 명나라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서쪽과 남쪽이라는 말이 성립되게 되는 것이다.
1370년(공민왕 19, 명 태조 3) 6월 신사일에 "황제는 또 시의사인(侍儀舍人) 복겸(卜謙)을 보내어 와서 과거(科擧)보는 절차[程式]를 공포하였다. 그 조서에 이르기를, …홍무 3년(1370) 8월에 비로소 특별히 과거를 설치하여, 재덕(才德)이 겸비한 선비를 등용할 것인 바, …향시(鄕試)를 각 성(省)과 직예(直隸)의 부주(府州) 등처에서는 500명을 뽑아서 거느린다. 그러나 인재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은 규정된 수에 구애하지 않으며, 만약 인재가 모자라 규정된 수에 차지 않으면 실제 정형 대로 공(貢)에 충당할 것이다.
등용할 인원은 하남성(河南省) 40명, 산동성(山東省) 40명, 산서성(山西省) 40명, 협서성(陜西省: 섬서성) 40명, 북평성(北平省) 40명, 복건성(福建省) 30명, 강서성(江西省) 40명, 절강성(浙江省) 40명, 호광성(湖廣省) 40명, 광동성(廣東省) 25명, 광서성(廣西省) 25명이다. 나머지는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 직예성의 부주(府州) 100명으로 향시(鄕試)에서 뽑는다. 회시(會試)의 정원은 100명으로 하며, 고려(高麗)·안남(安南)·점성(占城) 등의 나라에서는 만일 경서(經書)에 밝고, 몸가짐이 바른 선비가 있으면, 각각 그 나라에서 향시를 실시하되, 서울[경사(京師)]로 올려 보내어 회시에 응하게 하는 바, 규정 인원수에는 상관없이 뽑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11개 성(省)에 400명에 이른다. 특별히 고려에 사신을 보내면서 이 11개 성의 선발 인원수를 밝힌 것으로 볼 때, 이 지역이 고려의 직할 강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에 실제 고려가 당당하게 존재하였기 때문에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겨우 3년째 되는 해에 방대한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는 규정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조치는 고려라야 만이 가능한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9개 성(省) 가운데서 2개 성(省) 강소성·안휘성은 다른 곳과는 달리 지금 중국의 동쪽인 바닷가에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당시에 왜(倭)의 지역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나머지 7개 성(省) 사천성·운남성·귀주성·감숙성·녕하성·청해성·신강성은 동경 110 의 서쪽인 지금 중국의 서부 지역이다. 마침 주원장이 사천성에서 명나라를 세웠던 지역의 남쪽과 북쪽에 해당된다. 여기서 과거(科擧)의 선발 인원수를 밝히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명나라가 직접 관장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곧 이 지역이 명나라의 강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머지 7개의 성(省) 지역이 명(明)나라라고 보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이 "례부주사(禮部主事) 륙옹(陸 )이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환송하는 시의 머릿글"에서 알 수 있다.
"엎드려 공손히 생각해보니, 천자의 총명함[황명(皇明)]이 서융(西戎)의 한 지역에 있는 나라까지 해내(海內)·해외(海外)로 뻗쳐 신하라 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덕망이 높으신 천자께서 한량없는 귀중한 력서(曆書)와 복물(服物)을 물려받고, 덕을 닦아 전쟁을 평정하여 온통 어진 마음으로 대우하였다. 그래서 1400년 11월 15일에 례부주사 륙옹(陸 )과 부사(副使)로 홍려행인(鴻 行人) 림사영(林士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니, 력서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1401년 2월 6일에는 임금들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문 밖까지 나가 맞이하였는데, 의장(儀仗)이 좌우로 늘어서고, 북과 나팔수가 앞에 서서 궁중으로 인도하니, (사신들이) 절하고 일어나 춤추며 만세 삼창으로 예의를 매우 삼갔으니, 이는 천자의 명령을 조심성 있게 받드는 때문이다. … 내가 생각해보니, 우리 동방이 기자(箕子)가 팔조(八條)의 교(敎)를 시행한 때부터 풍속이 염치(廉恥)를 숭상하고, 중국(中國)을 높일 줄 알아서 대대로 사대(事大)하는 례의(禮義)를 가르쳐왔는데, 우리 조선에 와서 더욱 충성하고 순종하니,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기고, 조서로 타이르기를 간절히 하며, 상금 내리는 것이 겹겹이 쌓였으니, 은혜가 지극히 중하였다."고 했다.
변계량이 쓴 원문에 "欽惟 皇明"(흠유황명)에서 "皇明"(황명)이란 대개 "명(明)나라"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欽惟皇上"(흠유황상)과 같은 의미로서 "천자의 총명함" 또는 "큰 명덕(明德)"의 뜻으로 "천자(天子)"를 가리키며, "上"(상) 자체가 천자를 가리킨다.
이 내용을『태종대왕실록』에 보면, 1401년[태종 1, 건문(建文) 3] 2월 6일의 첫머리에는 "중국의 사신"이 아니라, 그저 "조정의 사신"일 뿐이다. 이것은 "변방의 작은 나라[명(明)]의 조정"이라는 뜻이다.
이런 덕치(德治)에 감화된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제2대 정종(定宗)의 천자즉위(天子卽位)에 사신들을 보내왔던 것이며, 명나라의 사신들이 조서를 가져와 천자 정종에게 만세삼창을 외쳤던 것이다.
"조정의 사신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옹(陸 )·홍려 행인(鴻 行人) 림사영(林士英)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오니, 산붕(山棚)·결채(結綵)·나례(儺禮)를 베풀었다.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성밖에서 마중하여 의정부(議政府)에 이르렀다. 이 때 수창궁(壽昌宮)이 불탔는데, 이는 시좌전(時坐殿)이 좁았기 때문이었다고 조서를 전했다.
이에 하늘을 받들고 선왕의 업을 이어받은 황제는 조서에 이르기를, '중국의 바깥, 천지와 사방 안에 무릇 땅덩이를 가진 나라는 반드시 인민이 있고, 인민이 있으면 반드시 임금이 있어 통치한다. 땅이 있는 나라는 대개 수로 헤아릴 수 없으나, 오직 시서(詩書)를 익히고 예의를 알아서, 능히 중국의 교화를 사모한 연후에야 중국에 조공(朝貢)하고, 후세에 일컫는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나라가 있어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또 혹은 큰 나라를 섬기지 못하여 착하지 못한 것으로 사방에 알려지는 자도 있다.
생각건대 이와 같이 조선은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익혀서, 본래 배우기를 좋아하고 의(義)를 사모하는 것으로 중국에 알려졌고, 우리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께서 만방(萬邦)을 무림(撫臨)하니 모두들 신(臣)이라 일컫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혹시라도 게으르고 방자한 일이 없었고, 짐(朕)이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를 공경히 받아 비로소 큰공을 이어받았으니, 곧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하례하였다. 그때에 짐이 양음(諒陰: 임금의 상중)에 있었으므로 겨를이 없어 회답하지 못하였다. 상복을 벗을 즈음에 마침 북번(北藩)의 종실(宗室)이 시끄러워 전쟁[軍旅]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회수(懷綏)의 도(道)가 이제까지도 모자랐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처럼 권지국사(權知國事: 임시 임금) 리경(李 : 李芳果, 전날 정종 임금)은 능히 사대(事大)의 례(禮)를 두터이 하여 짐의 생일을 맞아 다시 공물을 베풀었으니, 마음씀씀이 아름답게 여겼다. 이제 사신(使臣)을 보내서 건문(建文) 3년(1401)의 대통력(大統曆) 1권과 문기(文綺)·사라(紗羅) 40필을 내려 지극한 뜻에 답한다. 이와 같이 천도를 순(順)히 받들고 번의(藩儀)를 공손히 지키어, 간사한 것에 현혹하지 말고, 거짓에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충순(忠順)을 굳게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보전하여, 후세로 하여금 <인현(仁賢)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빛이 난다.>고 말하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이에 조서(詔書)로 보이니, 마땅히 짐의 권회(眷懷)하는 바를 몸받으라.'고 하였다.
읽기를 마치니, 임금이 명령을 받고,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위로하였다.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으로 가니, 임금이 태평관에 이르러 위안(慰安)하고 궁(宮)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명나라 주원장으로 볼 수 있지만, 조선의 리성계이다. 태조고황제는 1398년 윤5월에 죽었는데, 그가 조상하고 하례를 어찌할 수가 있겠으며, 명나라 혜제(惠帝)라면, 그는 상주(喪主)인데, 남들이 하는 행위처럼 조상하고 하례를 할 수가 있겠는가? 고황제는 오직 태조 리성계일 뿐이다.
이 내용에서 권지국사 리경(리방과: 정종)의 행위로 보아 이 중국조정은 중앙조정이요, 상왕·태상왕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1401년에 대통력(大統曆)을 내렸다는 말은 그 때에 정종 리방과가 태종 리방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말이다. 대통력은 귀중한 력서(曆書)와 복물(服物)로 임금·황제의 상징물이다.
또 고려·안남(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지역)·점성(참바왕국: 베트남 남부) 지역은 별도로 언급된 것을 볼 때, 고려가 이 자리에 들어갈 성격이 아니며, 나머지는 별도로 취급되는 기미국(羈 國) - 위성국가(衛星國家)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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