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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영산강 들녘의 달집태우기

서울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녘에야 영산포 역에 도착하여 안개에 휩싸인 영산강 방죽을 줄곧 걸었던 기억이 난다. 텅 빈 5일 장터 바닥을 헤집다가 불빛 찾아 들어간 봉놋방 안이 딴판이었다. 뚱뚱한 행상꾼 여편네들이 지독한 사투리에 웃음을 버무려가며 제멋대로 세상을 깔보고 있었다.

쥐불놀이의 동그라미와 풍년 소망. 쥐불놀이를 돌리노라면 왜 불꽃 동그라미들이 생겨날까.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융통되는 장애 없는 세상 만들고 싶어서이리라.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쳐 시로 승격을 시키는데 처음에는 ‘금성시’라 했었다. 유서 깊은 고을 이름을 놓칠 수 없다고 서로 고집을 부렸던 탓이다. 1986년에 가서야 그 지명을 ‘나주시’라 붙이기로 결정을 본다.

영산포읍이었던 강변은 지금 나주시 영산동이 되어 있는데 ‘등대’가 반갑기 그지없다. 바다 아니라 내륙 안으로 웬 등대가 들어와 버린 것일까 묻지는 말아야 한다. 영산포가 서해 바다로 들랑거리는 물산 풍부한 외해(外海)의 포구였으니 당연히 등대가 있었다.

오늘의 나주시는 너무도 변해버려서 도무지 지리감각을 되찾을 수 없다. 하지만 반가운 것이 눈에 익었던 ‘나주 읍성’의 자취와 관아 거리의 모습이다. 읍성의 남문이던 ‘남고문’은 1993년에 복원되어 사적 3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와 나주목사의 살림집이던 내아 건물 ‘금성관’이 현존되고 있다.

# 대농촌 곡창지대의 응전과 도전

영산강 들녘 일대는 대농촌 곡창지대인 만큼 민족문화유산의 보배로운 곳간(寶庫)으로 갈무리 되어오는 고장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함에도 ‘오늘이 예전과 같지 아니하다’고 박경중(朴炅重)씨는 말한다.

나주시 남내동에 있는 박경중씨의 자택은 전남 문화재자료 153호로 지정돼 있는데 안채와 초당,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 모두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일 가옥으로서는 전남 최대 규모라 하지만 그보다는 제대로 된 법식(法式)과 규범의 전통건축물을 지켜내느라 집안사람들의 고충과 애로가 있었다 한다. 작년에 전남도청이 지원을 하여 ‘전통문화체험 가옥’으로 개방을 해놓고 있는데, 쌀로 만든 부침개인 부꾸미와 식혜 등의 ‘종갓집 음식’도 이 집은 보존시켜오고 있다.

‘천년 역사의 목사(牧使) 고을’인 나주는 전통적인 체통과 근대적인 긍지를 공유한다. 마한 및 백제시대로부터 이미 ‘동아시아문화’의 중심 교류 권역이었다는 자부가 있고, 그리고 옛 나주역(驛)이 ‘광주학생운동 기념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데에서 살필 수 있듯이 근대 청년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을 선도해왔다는 각성이 있다.

나주 제창마을의 대보름 달집태우기. 풍물잽이들이 법석을 떠는데 달빛은 교교히 내려오고 달집 불꽃은 불끈불끈 치솟는다.

그러하건만 20세기 100년을 관통케 한 전근대-근대-후근대의 ‘문명사적 간격’이 참으로 엄청나다. 중앙집권 지역으로부터 떨어진 데라면 어디랄 것 없이 시간환경의 소외 및 낙후와 함께 지역문화의 자생조건이 무너져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드문 예외가 되기를 바라고 싶지만 나주 지역의 응전과 도전이 실은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

# 이 강산 좋을씨고, 회진 마을의 문화생태경관

나주의 별스러운 향토음식으로 셋을 꼽는데 맛을 본 사람들은 잊지 못하리라. 영산포의 홍어와 구진 나루의 장어, 그리고 나주 관아거리의 곰탕이다. 송기숙 소설가의 아량으로 영산강 나루를 나돈 적이 있는데 장어구이에 홀리면서 ‘남도 인간해방론’을 듣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화순의 운주사는 고려 역사의 미스터리를 간직하고 있지만, 조선왕조 창업의 주역이던 정도전 이야기도 빼놓지 못한다. ‘새 세상 만들기’의 꿈을 이 역사인물이 나주 땅에서 일깨우게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은 고려시대에 ‘소재동(消災洞)’이라 했는데, 당시에는 ‘거평(居平)부곡’이라는 특수부락이었다. 정도전이 1375년(우왕 1)에 유배를 와서 3년 동안 기거했던 막사리 집터가 이 마을 서쪽의 백룡산 산비알에 있었다. 나주문화원 이사 이재홍씨가 직접 안내해 주었다. 여러 독지가들과 함께 그는 삼봉 정도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 집터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연을 밝히어 유지비인 ‘소재동비(碑)’를 세웠다.

‘순박무외모(淳朴無外慕) 역전위업(力田爲業)’이라고 정도전은 썼다. 고을 사람들은 순박하기만 하여 바깥세상에는 관심이 없고 힘껏 농사짓는 일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농민들이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지식인의 울분도 얹어 그는 ‘역성혁명’의 웅지를 슬몃 드러내 보인다.

이 강산 좋을씨고. 다시면 회진리의 회진(會津)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처럼 ‘물돌이 동네’이다. 강과 산을 품에 넣어 이 마을은 나주 임씨의 세거(世居) 지역임을 알게 하는 종택, 서원, 정자들과 함께 백호 임제(林悌)의 기념비를 느런히 간수해놓는다.

‘회진성(城)’은 둘레가 2.4㎞(7만6천평)에 달하는 큰 규모의 고대 토성이다. ‘흙의 시대와 사람들’은 다도해의 짙은 바다 냄새와 함께 멀게 달려온 백두대간의 대륙풍을 사납게 맞아들였을 터. 회진성의 역사경관을 복원하고 아울러 가까운 강변의 구름송이 같은 ‘복암리 고분군’을 여기에 연계시켜 ‘문화관광특구’로 조성시키는 사업을 작년부터 벌이는 중이다.

나주 복룡마을의 대보름 당제. 아낙네들은 풍물을 잡고 남정네들은 할아버지 당산나무에게 고축을 올린다.

# 할아버지 당산나무와 당제, 그리고 달집태우기

‘해의 날’인 설날보다 ‘달의 날’인 정월대보름 쪽의 민속 행사들이 더욱 풍성한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농가월령가’의 서문이 알려주듯 농사의 세시풍속은 달님의 태음력 ‘운기도수’에 맞추어 시후(時候)를 맞추어 나가게 마련이다.

깡통에다가 철사를 매달아 겅중거리며 ‘쥐불놀이’를 하고 ‘석전(石戰)놀이’에 이마빡이 터졌다. 정월대보름 달맞이는 공간과 시간의 기슭을 벗어나던 곳에서 벌어지던 꿈 마당이었던가.

사진작가와 문필가 등속들은 매년 대보름 무렵에는 ‘민속경관’을 꼭 보아야 한다는 마음만 앞서 전국 떠돌이로 발품을 팔게 마련이다. 작년 이맘때에도 장성 갈재 넘어 영산강 물줄기 따라 남도 땅을 헤집었다. 나주시 봉강면 옥정리 복룡마을과 영강동 안창리 제창마을의 두 곳 당제의 소문은 이미 익히 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대보름 민속도 예전 같지 아니하여 어딘가 한 귀퉁이가 허전해졌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복룡마을은 할아버지 및 할머니의 두 당산나무를 받들고 있는데, 당제 올리는 주 공간은 마을 입구의 ‘할아버지 당산’ 쪽이다(높이 15ｍ, 수령 500여년). ‘당산 신령기’의 영기와 함께 대발을 당산나무에 걸어 놓고 그 위에 시루떡, 돼지머리, 숭어, 명태를 매달아 놓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 상을 차리어 나머지 제물인 과일, 나물, 어류, 과자, 술 등을 진설한다.

제창마을은 영산강 수운을 통해 서울로 진상하던 물품들의 창고가 있었던 교통의 요지였고 아울러 상업 교역지대였다. 동서남북의 방위신으로 네 당신을 모시고 중앙에 당집을 세워두어 대보름 당제를 드리는데, 최근에는 새롭게 달집태우기를 마련해놓고 있다. 대보름 달빛은 교교하게 내려오고 달집의 불길은 불끈불끈 치솟는데 ‘뒤풀이’의 가무음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박태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