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3년,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콬瘡幕府)가 멸망하고,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현해(玄海)의 해적들은 다시 살길을 찾아 목숨을 걸고 한반도의 남해안과 멀리는 중국 연안을 휩쓸며 노략질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바다의 조운선(漕運船)이나 정부의 곡물창고를 털어가는 정도였으나, 차츰 그 정도가 심해져 식량을 강탈한 후에도 살인, 방화, 강간 등을 일삼는 등 그 옛날 대마도나 일기도 해적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최무선은 이러한 해적들의 난동을 매우 걱정하면서 왜구들을 바다에서 때려잡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왜적들이 육지로 상륙하게 되면 수많은 인명 피해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에게도 몽골군과 같은 화약이 있다면, 대포를 만들어 멀리서도 왜적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약 제조법은 원나라의 일급 기밀이어서 여간해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화약과 대포만이 왜구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 최무선은 화약 제조기술을 알아내기 위하여 연구에 매진하였다.
때마침 몽골(元) 상인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이 염초장(焰硝匠)으로 일한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벽란도(碧瀾渡)로 입항한 이원을 집으로 모셔다가 극진히 대접하면서 화약 제조방법을 익혀 나갔다.
몇 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최무선은 그 제조법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였는데 그것은 초석(硝石)에 유황(硫黃)을 혼합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초석이 고려 땅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는데다가 몽골도 초석의 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원에게 배운 제조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최무선은 다시 원점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였다. 고려에서는 생산되지도 않고 또 몽골로부터는 수입할 수도 없는 초석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 전혀 새로운 제조법을 개발해 내야만 했던 것이다.
최무선은 필사적인 노력 끝에 염초 10에 유황 1을 배합하여 만드는 국산 화약 제조법1)을
개발해 내었다. 이제는 유황이 문제가 되었으나, 유황은 우습게도 우리가 제압하려던 왜(倭-일본)로부터 쉽게 수입2)할
수가 있었다.
1375년 가을, 최무선은 드디어 조정 대신들과 군부의 고위층을 초대하여 그 동안 그가 발명한 폭약의 성능을 실험해 보였다.
1377년 10월, 마침내 가우리 조정에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여 최무선으로 하여금 화포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가우리는 화약과 화포를 국가 방위사업으로 승인하고 본격적인 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화포는 철이나 동으로 만든 동체(포신)에 포구로부터 화약을 넣고 피사체인 철환(鐵丸)이나 각종 전(箭)을 역시 포구로 장전한 후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기구였다. 따라서 화약의 발명과 더불어 각종 총통과 피사체들도 발명되어야 비로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최무선은
특별히 전함용 함재포를 많이 만들어 이것들을 군선에 장착하였다. 처음부터 왜구를 바다에서 섬멸하려는 생각에서였다.
최무선과 그의 무기 개발 연구팀의 활약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그들의 발명품으로는 우선 대포 종류로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이며, 피사체 종류로는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그리고 로켓 종류로 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왕씨가우리[高麗]와 이씨조선(李朝鮮)군의 주력 전투장비로 발전해 갔다.
1380년 8월, 왜구(倭寇-일본해적)의 괴수 아지발도(阿只拔都)는 곡창지대인 호남일대의 식량을 강탈하기 위해 무려 2만여 명의 중무장한 졸개들을 5배여 척의 배에 분승시켜 진포(鎭浦•群山)로 상륙시켰다.
그동안의 해적들이 소규모로 출몰하며 빠른 속도로 치고 빠지는 전법을 써온 것과는 달리, 이들은 겁도 없이 장기간 내륙 지방을 휩쓸고 다니며 잔혹하게 백성들을 살해하고 마구잡이로 약탈을 자행하는 등 가우리의 관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였다.
이에 놀란 가우리 정부는 도원수에 심덕부(沈德符), 상원수 나세(羅世) 그리고 화통도감(火筒都監) 최무선을 특별히 부원수로 삼아 전선 40척으로 왜구들을 격멸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상륙한 아지발도의 해적 집단3)은 일본의 내란 중 패주하다 소속 부대를 이탈한 낭인(浪人)이나 열악한 환경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도적으로 변한 막가는 자들의 집단이었다.
이미 일본측의 관병들로부터도 쫓기며 그들 사회의 제도권 안에서도 안주할 근거를 잃어 삶에 악이 바친 자들로 뭉친 이들은,
그들의 값없는 목숨을 하늘에 걸고 앞뒤 분간 없이 날뛰는 극악무도한 강도들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전투력은 제압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공할 수준이었을 것이므로 그동안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병했던 지방의 관병들이
속수무책으로 깨어지기만 했던 상황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동안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대비해 온 최무선은 군선에 장착한 대포를 이용하여 왜선을 격멸시킴으로써, 왜적을
바다에서 원천 봉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무선의 가우리 함대 40척이 진포의 출입구를 봉쇄하고 보니, 아지발도와 왜국의 주력은 이미 상륙하여 보이지 않고
진포에 정박시킨 500여 척의 왜 선단은 불과 수천 명의 졸개들이 지키고 있었다.
노략질에 정신이 팔린 왜구들이 배로 이동하지 않고 배를 정박해 둔 채 육지의 민가들을 휩쓸고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이에 최무선은 처음의 작전을 변경하여 적선을 모두 격멸하여 퇴로를 끊고 내륙지방으로 올라간 왜구들을 독안에 든 쥐로 만들어 전멸시킬 계획을 세운다.
1) 최무선은 염장(鹽藏-소금밭) 근처의 함토(鹹土)를 모았는데, 그것이 부족할 경우에는 바닷물의 염분을 많이 흡수한 바닷가의 흙 중에서 인마(人馬)가 오랫동안 통행하면서 다져놓은 흙을 채취하여 이 흙을 바닷물로 걸러서 가마솥에 넣고 염초를 구워냈다. 훗날 이순신도 이 방법으로 국산 화약을 제조하게 된다.
2) 왜인들은 아직까지 유황의 위력을 알지 못했기에 유황은 가우리와 교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던 것이다.
3)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왜구는 현해탄에 근거를 두고 있던 생계형 해적집단과는 달리 일본내전에서 패한 낭인무사 2만 5천여 명 정도로 꾸며진 사실상의 정규군 규모였다.
김경한 119.198.172.163 2010-05-17
이때의 왜적침입이란 한반도인가요 아님 대륙조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