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에 도착한 이순신 제독의 기동함대는 즉각 포구 입구를 막고 적의 탈출로를 봉쇄하는 한편 공격 태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왜적들도 최신 정예함 아타카(安宅)를 앞세우고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 때 당포항의 정박했던 일본 함대는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8) 함대로서, 전날 사천에서 일본군이 조선해군의 기습 공격으로 전멸했다는 소식을 밤새 사천을 탈출해온 패잔병들의 보고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메이 고레노리는 사천해전의 참패의 원인을 이순신 함대의 기습에 겁먹은 지휘관이 싸워볼 의지도 없이 포구 안에 숨는 바람에 발생된 필연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때 가메이는 이순신 함대와 회심의 일전을 벌여 볼 심산으로 아타카라는 최신예 전함을 앞세우고 쳐나오고 있었다. 바야흐로 조선과 일본간에 본격적으로 준비된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측의 결전 의지는 곧 그들의 움직임을 세밀히 주시하고 있던 이순신 제독에게 읽혀지게 된다. 그러자 기동함대의 기함에서는 곧 학익진을 명하는 깃발을 올랐고, 선봉의 거북선에게 곧바로 진격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돌격명령의 신호를 발견한 귀선함장 이언량(李彦良)은 다른 전선들을 따돌리고 맹렬히 앞으로 튀어나와 적의 기함을 노리고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거북선의 일차 목표는 적의 대장선이었는데, 가까이 접근하여 보니 내가 바로 대장선이라고 과시라도 하듯이 적선 중 유난히
큰 배가 눈에 띄었다.
배 위에는 높은 층루가 우뚝 서있고, 사면은 붉은 휘장으로 두르고 황(黃)자가 크게 적혀 있으며, 붉은 일산(日傘) 아래에는
왜군 대장이 전혀 흔들림 없이 서있는 모습이 보여 대장선이 틀림없었다. 그 자가 바로 가메이 고네노리였다.
거북선은 곧장 적의 대장선 밑으로 치고 들어가 입 속으로부터 현자포를 내밀고 적장을 향하여 발사하였다. 거북선이 적 함대사령관을 잡는 순간이었다.
현자포는 정확했다. 늠름하던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는 대추장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유구 영주의 임명장이 적힌 금부채를 꽉 쥔 채 배 아래층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적장 가메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몸을 피할 생각도 없이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것은 그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의 대장선으로 가까이 접근하여온 거북선의 미묘한 모습에 넋을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북선이 적의 기함을 공격하여 그 기능을 마비시키자, 부사령관 이몽귀가 적선에 뛰어 올라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의 목을 베고
손에 쥐고 있던 금부채를 빼앗아 왔다.
우후 이몽귀가 가져온 금부채는 한복판에 ‘6월 8일 수길(秀吉)’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왜국의 대추장
풍신수길(豊臣秀吉)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채의 오른쪽에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고 쓰여 있고 왼쪽 편에는 ‘귀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부채에 쓰여 있는 말뜻을 그대로 풀어보면 왜국의 대추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북선의 공격을 받고 죽은 가메이 고레노리에게
오키나와(琉球)를 영지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일전쟁 당시 오키나와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왕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말인즉 아직 자기에게 속하지도 않은 남의 독립왕국을 제멋대로 제 가신에게 준다는 정신빠진 이야기인데, 이런 엉터리 약속을
남발한 히데요시의 정신박약한 발상이나 또 이 말을 믿고 죽는 순간까지 공수표 같은 금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은 가메이 고레노리나
다같이 유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건 대장을 잃은 가메이 고레노리 함대는 이후 주군의 복수를 한다는 각오로 마귀떼 같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전쟁을 무모한 용기와 흥분된 감정만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사실상 이번 당포해전은 개전 초기에 적의 대장을 격살함으로서 이미 그 승부가 결정된 전투였다.
그로부터 다시 한나절이 흐르는 동안 이순신 제독의 냉철한 지휘를 받은 기동함대는 함재포를 골고루 발사하며 한사코 달려드는
적선들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만다.
이번 해전으로 일본의 가메이 함대 21척과 수병 2820명은 완전히 전멸되었다.
거북선을 앞세운 당포해전의 완벽한 승리는 이순신 함대의 병사들을 완전히 역전의 용사들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막연히 왜적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 전투에서의 승리만이 자신감을 심어주는 여건이었던
것이다.
6월 4일 정오, 전라우수영의 이억기가 25척의 전함을 이끌고 합류하여 왔다. 이로서 전라좌수영의 전선 23척과 우수영의
전선 25척 그리고 형식적이나마 경상우수영의 원균 함대 3척을 모두 합쳐 52척의 당당한 대연합함대가 꾸며졌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삼도연합함대의 최고 사령관을 누가 맡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두 수사는 함대를 당포 전양에 정박시켜 놓고 지휘권문제와 더불어 앞으로의 전략을 심도깊이 논의하였다.
그 결과 그 동안의 실전을 통하여 함대운영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이순신 제독이 총사령관을 맡기로 합의하였다.
6월 5일, 이순신 제독의 삼도 연합함대는 인근 바다를 샅샅이 수색하며 서서히 전진하던 중 마침내 진해(鎭海) 앞바다에서
대선 4척과 소선 수척으로 형성된 소함대를 발견하였다.
제독은 함대의 선두에서 항진 중이던 좌척후장 정운으로 하여금 급히 추격하게 하여 왜선들 중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불태워
버렸다.
8)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
일본 돗토리 시에 인접한 시가노성의 성주였다. 약삭빠른 일본인들은 가메이 고레노리의 사당을 만들어 금부채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가 1598년까지 살았던 것처럼 기록하였는데 이는 1591년의 당포해전으로 이순신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은폐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