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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8장 이순신함대
이순신 함대 제1차 출동(李舜臣 艦隊 弟一次 出動) 4

이순신 제독이 세계 해전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고 전라좌수영으로 개선하고 보니, 서울로부터 참담한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그 동안 서울에서는 국왕 이연이 백성들을 속여 안심시키고는 왜적이 서울로 쳐들어오자 저만 혼자 살겠다고 야반도주해 버렸고,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모두 불태웠으며, 길가의 백성들도 이 비겁하고 치사한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며 저주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제독은 곧 장교회의를 소집하고 “유감스럽게도 서울은 이미 왜적들에게 점령당했고, 임금께서는 평양으로 몽진을 떠나셨다 한다. 우리는 다시 출동하여 남해안의 왜적들을 쓸어내고 보급선을 차단하여, 이미 상륙한 왜적들을 고립시켜야 한다.”면서 남해안 방어선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때의 몽진(蒙塵)이라 함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인데, 진짜의 뜻은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도망쳤다는 뜻을 애매한 글장난으로 흐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따위의 임금에게도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성리학적 교육을 받아온 이순신에게 국왕의 몽진소식은 가슴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그는 시급히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1차 기동 함대의 전적에 대하여 자세하게 적은 장계를 올려 승전을 아뢰었다.

이순신의 장계를 받은 왕 이연6)은 그 동안 연이은 육군의 패전 소식만 접하다가 처음으로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왜적 해군을 크게 격파하였다는 소식에 너무나 감격하여 이순신의 작위를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칭호와 함께 종2품(從二品)으로 올려 주었다. 바보 왕 이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실속 없는 벼슬 따위나 올려주고 할일을 다한 듯 앉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국가가 통째로 유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 제독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병사들의 충원이나 전투에 필요한 보급품 등 전략물자이지 이런 따위의 벼슬 놀음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이연의 유치한 벼슬 선심 쓰기는 승리의 장계가 올라 올 때마다 계속되었으니, 이순신은 곧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거처 정헌대부(正憲大夫)라는 정체불명의 칭호를 연이어 받고 드디어는 정2품(正二品)으로 승진한다.

왜군의 조총공격에 화살로 대응하던 조선 육군의 허망한 패배는 결국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할 국왕마저 왜적들에게 쫓겨 도망쳐 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하였다. 이제 조선이 살길은 남해를 돌아 한강과 대동강으로 연결하려는 왜군들의 전략물자 공급항로를 중간에서 철저히 차단하여, 이미 북쪽 깊숙이 진격한 왜군들을 보급부족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자멸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5월 27일,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왜적 10여척이 사천포와 곤양(昆陽)까지 쳐들어와서, 그의 잔존 함대 3척을 이끌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노량까지 도망쳐와 있다는 공문을 받았다.

사천포라면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적선이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만에 공격해올 수 있는 거리로써 절대방어선을 넘은 것이었다. 결국 원균은 또다시 적에 대한 방위를 포기하고 자기 관내의 마지막 경계선까지 도망쳐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곧 이억기 전라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내 즉시 뒤쫓아 와 자신을 지원하라 요청하고, 자신은 23척의 전선만을 거느리고 단독출전에 나섰다. 이 때 유진장(留鎭將)에 윤사공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鄭傑)에게는 따로 전선 한 척을 주어 후방의 경계방위를 맡겼다7).

5월 29일, 제2차로 출진한 이순신 기동 함대는 여수를 발진하여 적의 침입이 확인된 사천으로 향하였다. 함대가 하동을 지나자, 그제야 그 곳에 숨어 있던 원균이 잔류함대 3척을 이끌고 기어 나와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였다.

이순신 기동함대가 사천 포구에 도착하여 보니, 왜적의 큰 전함들이 무려 12척이나 중무장한 상태로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썰물로 이순신 함대에게 불리한 상태여서 함대를 되돌려 겁먹고 도망치는 듯이 서둘러 물러나왔다.
그러자 이를 도망치는 것으로 여긴 왜선들이 잠시 뒤따라 나오더니 돌연 옥포해전의 참패를 기억해낸 듯 추격을 멈추고 포구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물길이 썰물에서 밀물로 바뀌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이순신 함대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바뀐 물길로 거북선의 기동이 자유롭게 되었고, 다른 전함들도 빠른 속도로 적을 향해 진격해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침내 공격명령의 깃발이 기함에서 올랐고 사기충천한 기동함대가 거북선을 앞세우고 돌격해 들어가 천(天), 지(地), 현(玄), 황(黃)자 총통 등 모든 함재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일본함대는 순식간에 무너져 갔다.

사천의 왜적들을 깨끗이 소탕한 이순신 함대는 사량 앞바다로 물러나와 닻을 내리고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6월 2일 오전 8시경, 드디어 찾고 있던 왜적의 대장선이 당포에 결진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게 된다.

이때 제독은 전날의 전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의 대장선을 발견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기동함대의 즉각적인 출동을 명령했다. 기록에 의하면 제독의 함대가 당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경이라 하였다. 이것은 사량에서 당포까지의 직선거리 14Km를 시속 7Km의 항속으로 항해했음을 말한다.

사천해전의 전과
일본 측의 누각대선 12척과 척후대선 1척 등 총 13척이 격침되었고, 이들 전선의 소속 해군병 2600명을 잃었다.

이순신 함대측은 단 한척의 손실도 없었으나 이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적의 유탄에 왼쪽 어깨를 맞아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제독은 이때의 부상으로 한동안 극심한 고생을 겪게 된다.

이연(李淵)

6) 이연(李淵) 왕(1552~1608)
이씨 조선의 제14대 왕으로서 임진왜란을 자초한 원흉이다. 이자는 명종 때 까지만 해도 역적행위로 간주하던 붕당행위를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는 통치행위의 수단으로 삼고, 욕심 많고 순진한 학자들을 교사하여 서로 싸우게 하는 등 치사하고 교활한 술수로 일관하였다.

7) 제2차 출동당시 거북선에는 귀선돌격장에 이기남과 이언량, 두 명의 장교가 있었다. 거북선의 임무 수행 중에는 최선봉 돌격선으로서 적진의 한복판에 뛰어 들어 좌충우돌하며 배의 양옆에 도열한 대포들을 동시에 발포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데, 이럴 때 제1차 출동시의 경험으로 보아 한명의 지휘관만으로는 서로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신속 정확히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함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 출동에는 좌우측의 함포 조를 각각 나누어 2명의 장교들로부터 따로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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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도엽 210.122.146.19 2013-02-14

    6) 이연(李淵)에서 연(淵)자 한자가 잘못된거 같습니다. 淵→昖로 수정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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