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지금까지 이순신이라고 하는 한사람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업적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았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들여다본 모든 사건들이 결국 앞으로 전개될 이순신의 활약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본서는 이제부터 이순신과 조일전쟁(朝日戰爭)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기로 한다.
우선 이순신의 출신배경부터 간단히 살펴보면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에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그리고 조정에서 왜침은 없을 것이란 국론을 정하던 이 때 그는 정읍 현감을 지내고 있었다.
조선 통신사의 귀국보고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물러나온 우의정 유성룡의 마음은 대단히 착잡하였다. 아무리 왕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하여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고는 왜놈들의 의지가 아닌가? 어떻게 우리의 왕실이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국론으로 정해놓고 더 이상 반대의견을 제출할 수도 없게 만들 수 있을까?
유성룡은 지금까지의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보면 왜인들이 침략해 올 가능성은 분명히 보이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정의 한 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오기와 의심으로 가득 찬 임금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은밀히 전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유성룡이 한번 정해진 국론을 무시하고 전쟁준비를 하여 민심을 불안하게 한다면 이는 임금의 덕치에 누를 끼친다는 누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유성룡은 정읍(井邑) 현감(縣監)으로 있는,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이순신(李舜臣)을 은밀히 집으로 불러들였다.
왜침의 가능성에 관하여 이순신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이순신은 대답하기를
“솔직히 말씀드려 상감께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국론으로 정하셨다 해도 왜놈들이 상감께
의견을 여쭈어보고 전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감께는 불충이 되옵니다만,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진 무인들의
입장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미리 대비해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미리 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준비하여 두면, 침략해 올 뜻이 있던 적들도 그 의기가 꺾이게 되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미리 겁을 먹고 허둥대면, 애초에 침략할 뜻이 없다가도 생기게 되는 법이옵니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솔직담백한 의견 진언(進言)에 감동하여 그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생각해 두었던 것들을 은밀히 꺼내 놓았다.
“만약 왜놈들이 침략한다면, 반드시 바다를 건너야 하니 무엇보다도 바다를 철저히 방어해야
할 것이오. 그래서 무능한 전라 좌수사 이유의(李由義)를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함경도 조산 만호(朝散萬戶) 원균(元均)을
임명하였소. 그런데 돌연 사간원(司諫院)이 중심이 되어 원균을 맹렬히 탄핵하여 할 수 없이 다시 함경도 부녕부사(富寧副使)로
전출시켰소. 그러니, 이 공이 전라 좌수사 자리를 맡아 바다를 지켜 주시오. 내 아무리 찾아봐도 이 공(이순신)만한 적임자가
다시는 없을 듯하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이 막중한 책무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다만, 원균측의 반발이 극심할 것을 염려하여 이 공을 먼저 진도(珍島) 군수로 발령한 뒤, 기회를 보아 다시 전라 좌수사로 승진시켜 수군의 지휘를 맡길 것이니 미리부터 준비를 하고 대기하기 바라오.”
“이것들은 그 동안 궁중에서 보관해 오던 귀중한 병법서들이오. 공이 맡아서 연구하시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이 병법서를 받으시고, 오늘 있었던 일은 우리 두 사람만의 묵계(默契)로 하여 주시오.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니 서로 몸조심하는 것이 제일이오.”
이때, 유성룡은 이순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으며 앞으로 닥쳐올 국란(國亂)에 이순신 같은 큰 용이 그의 숨은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큰물을 마련하여 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가 조•일 7년전쟁(朝日七年戰爭)동안 남해의 패자로 멸망의 위기에 몰린 조국을 홀로 구해낼 한민족 최고의 성웅(聖雄) 제독을 섭외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닥쳐올 국란을 예감하고 초조하게 그 대책을 찾아 고심하던 우의정 유성룡은 마침내 왕 이연 앞에 나아가 숨은 인재 이순신을
강력히 추천하여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전출시켜 우선 용(龍)에게 물 냄새를 맡게 하였다.
이렇게 진도군수로 부임한 이순신은 유성룡과의 묵계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어느새 바다로 배를 띄워 장차 자신이 관장하게 될
수역을 미리 탐사해보고 이 지역 방위에 필요한 최선의 방책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순신이 겨우 진도 일대의 물길을 익혔을 무렵, 정부는 다시 고사리진(高沙里鎭) 첨사(僉事)로 승진시켜 전임시켰다가 불과 수일이 지난 후 다시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전격 발령하였다.
이로서 이순신은 군수에서 첨사로 그리고 수군절도사로 이르는 공식 루트를 하자없이 절차를 거쳐 오른 셈이다. 이 배경에는
물론 우의정 유성룡의 용의주도한 배려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1591년 2월 10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령받은 이순신은 2월 16일에 임지인 전라좌수영에 부임하였다. 당시 조선
해군은 남해의 4개 해군사령부 외에도 충청도 해군이 전함 30척에 해군 5000명을 보유하고 있었고,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도
지역 해군사령부가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문헌에 보이는 조선해군의 해안방위는 잘 조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위 지도를 보고 혹시 좌수영과 우수영의 위치가 서로 바뀐 것이 아닐까 의아해 하는 독자가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지도를 볼 때 북쪽을 위로하여 보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경성(京城)인 한양에 앉아있는 조선군 최고 사령관인 국왕의 시각으로 보면 왼쪽과 오른쪽이 뒤바뀌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두가 편제상의 병력뿐이고 실제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수령들의 탐오로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편제의 약 2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은 그곳의 관리가 예상했던 대로 참담할 지경임을 확인하고 병력 충원과 보급품 확보 그리고 전투무기의
재정비 등, 좌수영을 처음부터 새롭게 세운다는 마음으로 재건계획에 돌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