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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 조선 육군의 패전 원인

많은 학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육군의 패전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다. 혹자는 패전보다는 민초와 승려 등 활발히 일어난 의병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혹자는 명의 파병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당시 조선 군대와 관료조직의 부패에 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김산호 선생의 ‘대쥬신제국사’를 본 독자들이라면 어찌 이렇게도 강성했던 우리 한민족이 부패와 무능의 관리들이 판을 쳤다해도 그렇게 당하기만 했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학술적 검증을 충분히 거친 의견은 아니지만, 그간 논의에 따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당시 일본군의 전력이다. 일본은 수백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도 없는 전투를 치르며 그 전력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풍부한 전투경험을 가진 병사들이 매우 많았고, 또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마인드도 거부감이 별로 없는, 즉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의 독특한 전쟁문화와 국민성을 형성시키기도 했는데, 전투를 치르는 주체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백성은 각자의 생활을 전쟁중에도 그대로 영위하는 전쟁문화인 것이다. 결국 국민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한 저항을 받지 않는 전쟁이었고, 또한 경험마저 풍부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의 일본군은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통해 얻었던 조총을 발전시켜 세계 제일의 조총을 생산하는 무기 선진국이었다. 물론 많은 전쟁이 더욱 발전시켰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 조총은 유럽에 수출되어 유럽산 조총에 비해 몇 배의 가격을 받고 팔릴만큼 세계적인 명품에 속했다. 따라서 당시의 유럽에서는 세력 싸움을 벌이는 성주들 간에 일본 조총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로 인식될 만큼 인기가 있었으며, 일본 조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세계 제일의 조총을 자체 생산하고, 수백년간 쌓인 풍부한 전투경험과 실전으로 다져진 병사들이 합쳐져 세계 제일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왜군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조선의 군대가 철저히 기마전술에 적합한 훈련만 해왔다는 것이다. 즉 오랜 역사를 통해 기마전에 익숙해졌고, 반대로 북방을 통해 침입하는 적들도 주로 몽골, 여진, 거란 등 우리와 같은 기마민족이었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전술 훈련과 무기체계, 전투훈련 등 모든 요건이 대기마전술(代騎馬戰術)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군은 전 병력이 보병이었다. 이는 배로 상륙한 탓도 있지만, 일본내에는 말이 별로 없었던 것과 일본의 지형이 급경사가 많아 기마전을 할 수 있는 곳이 적었다는 점 등으로 원래 보병 중심의 전투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이 점이 일본군에게 조총이 더욱 유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대기마전과 대보병전의 차이점을 예로 들어보자. 먼저 성(城)의 형태를 보면, 대기마전을 염두에 둔 경우, 일단 성의 주변을 각종 장애물로 에워싼다. 즉 언덕과 해자, 나무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하는데 이는 기마로 인해 쇄도하는 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진입로를 폐쇄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 성 외곽은 토성(土城), 석성(石城)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나, 높이를 크게 높이지는 않는다. 또 성의 설치는 주로 산성 등으로 하여 기마로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위치를 주로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점은 보병에게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된다. 즉 적의 쇄도를 막기 위한 모든 장애물이 보병들에게는 몸을 숨길 수 있는 방어요소가 되어 적은 피해만으로 성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고, 성을 넘는 것도 상대적으로 낮은 성곽의 높이로 쉬워지는 등이다.

또 무기체계에서 보면 주로 장창(長槍)을 사용하게 되는데, 방어측에서는 자신이 기마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라면 검(劍)만으로는 적을 치기에 짧기 때문이다. 물론 기마를 통한 공격에서도 장창을 사용하는 것이 검을 사용하는 것보다 유리하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장창을 가진 병사가 보병을 상대하는 것은 훨씬 불리한 싸움이 된다. 몸과 몸이 일정 거리 이하로 접근하게 되면, 짧고 가벼워 쉽게 다룰 수 있는 검(劍)이 훨씬 빠르게 공격할 수 있게 되고, 창은 반대로 휘두르거나 찌르는 동작이 커 공간이 크게 노출되어 검에 의해 찔리거나 베어지기가 쉽고, 두 손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근접한 적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수단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 외곽에 흩어져 있는 나무와 언덕, 바위 등을 엄폐물로 삼아 접근한 왜군이 조총으로 공격을 하다가, 성을 넘어서는 검을 휘두르며 싸웠던 당시의 전투에서 조선의 육군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았음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혹자가 말하는 부패와 조총의 소리와 위력에 놀라 병사들이 사기를 잃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량의 대포를 장비하고 있던 조선의 군대가 처음에는 놀랐을지언정, 전쟁기간 내내 그보다 작은 화력의 조총에 어쩔 줄을 몰라 했을리도 없고, 당시 조선의 활이 조총보다 유효사거리가 더 길었다는 실증의 사실과, 조총보다 발사속도가 몇 배 이상 빠른 것이 활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이는 그리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조선에는 기마병도 없고,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조랑말 말고는 말도 거의 없었는데 무슨 기마병이냐?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점은 필자가 전문의 역사가가 아닌 탓에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엄청난 오해이다.

쉽게 예를 들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왕건’을 시청한 독자라면, 마지막에 왕건과 견훤이 견훤의 아들 신검군과 운명을 건 전투를 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제작비 등의 문제로 장수들 몇 명만이 말을 타고, 후속의 부대는 모두 뛰어다녔지만, 멘트에서는 왕건측 9만여명, 신검측 10만여명으로 양측이 합해 약 20만 여명의 대병력이 일전을 겨루었다고 하고 있다.

이 때 고려 전투군의 편제는 왕건측은 박술희가 기병 1만과 제 2군으로 보병 1만, 홍유와 박수문이 기병 1만, 왕순식(김순식)이 기병 2만, 유금필이 흑수말갈, 달고, 철륵부족 등의 군대 9천 5백 등과 왕건의 본군을 합쳐, 기병 4만 9천 8백명, 보병 3만 7천명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검측 역시 이와 비슷한 비율, 즉 기병이 더 많은 비율로 약 10만이라는 대 병력을 이끌고 있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보다 6백여년이나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또 고려를 침략했던 몽골은 기마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로 세계를 호령했는데, 이들이 고려에서 다량의 말을 수입해 갔음은 우리 한반도에 말이 얼마나 많았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 할 것이다.

이런 기록들은 이 사건 이전이나 이후,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이다. 즉 우리들은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에 물든 패배주의적 교육의 효과와 경제력의 부재에서 오는 드라마, 영화 등에서의 표현 부족으로 무의식속에, 우리는 보병과 단추 몇 개 달린 갑옷을 입은 초라한 병력을 가진 나라로 이미지가 박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수만에서 수십만 필의 마갑(말에 입히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수십만의 병사들이 투구에서 장화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철편이나 동편으로 덮은 갑옷을 입고 싸웠던 군대를 가진 나라였던 것이다.

이런 군대가 조선시대에 와서 이성계에 의해 축소되고, 세조에 이르러서는 반정의 비용을 마련코자 사가(私家)의 말을 공출해 명나라에 수십만 필이나 수출함으로써(중국에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말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병력도 주로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한반도에서 말이 씨가 말랐던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많이 줄어든 임진왜란 시점에서도 적(敵)은 기마병이었고 보병전투 경험도 적은 편이었으므로, 조선의 군대는 모든 것을 대기마전에 맞추어 훈련하고 장비해 왔던 것이다. 결국 이것인 조선 육군의 가장 큰 패전원인이었을 것으로 본다.

* 이 글의 내용은 필자가 김산호 선생님과의 대화 등을 통해 생각해 본 것으로 검증할 수 있는 연구를 거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견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틀렸든 맞았든 보다 발전적으로 검증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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