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최무선과 이순신의 전술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최무선(崔茂宣) : 이순신의 전술을 가능케 한 사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최무선을 단순히 ‘화약을 발명한 사람’ 또는 ‘중국의 화약 비법을 배워 우리나라에 화약을 전한 사람’ 등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최무선의 화약 발명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의 세월과 그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는 2대에 걸친 노력을 통해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를 이용해 독자적인 화약을 제조할 수 있게 한 혁명이었다.

또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대포류 등의 무기들은 200여 년이 흐른 후에 이순신이 왜적을 막고 나라를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은 이순신의 전술이 모두 최무선의 화약과 대포 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1333년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백성들은 극도로 피폐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들은 도적떼가 되어 중국 연안을 노략질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던 고려와 몽고의 토벌군이 행했던 ‘해적질에 대한 응징’을 기억하는 왜인들은 처음에는 중국쪽으로만 진출하였으나 곧 가까운 거리인 고려의 연안에도 다시 출현하게 되었다.

최무선은 이런 해적들의 난동을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해적의 피해가 컸고 왜적의 배가 빨라 고려의 해군선으로는 추적하는 것이 곤란했던 것이다. 몽골군이 보유하고 있는 화약과 같은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원나라의 일급기밀에 속하는 화약제조 방법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최무선은 독자적으로 화약제조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원나라 상인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이 염초장(焰硝匠)으로 일한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벽란도(碧瀾渡)로 찾아갔다. 최무선은 이원을 집으로 모셔다 극진히 대접하면서 화약제조 방법을 익혀 나갔다.

몇 달의 각고 끝에 그 제조법을 완전히 터득하였는데 초석(礎石)과 유황(硫黃)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초석은 고려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는 것이었고 원나라도 초석의 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 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최무선은 고려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이용해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염초와 유황을 배합하여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유황 역시 고려에서 생산되지 않았으나 왜에서는 많이 생산되는 것이었고, 또 왜가 유황의 위력을 알지 못해 유황은 고려와 교역할 수 있는 왜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던 것이다.

염초는 소금을 채취하는 염장(鹽場) 근처의 함토(鹹土)나, 바닷물의 염분을 많이 흡수한 바닷가의 흙 중에서 사람이나 말이 오랫동안 통행하면서 다져 놓은 흙을 모아 가마솥에 넣고 구워내는 것으로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최무선은 최초의 국산 화약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375년 조정의 대신들과 고위층을 초대하여 폭약의 성능을 실험해 보이게 된다. 1377년 10월, 마침내 고려 조정은 화통도감(火筒都監)을 설치하여 최무선으로 하여금 화포를 제작하게 하였다.

최무선과 화통도감의 기술자들은 대포 종류로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으로 그 크기와 용도, 위력이 다른 여러 가지를 개발하였다. 또 피사체(포탄)의 종류로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등이 개발되었다. 이외에도 로켓 종류로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개발의 성과는 1380년 8월에 있은 왜구의 괴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격파하면서 진가를 발휘하였다. 아지발도는 호남 일대의 식량을 강탈하기 위해 무려 2만여 명의 졸개와 5백여 척의 배로 진포(지금의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는데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특별히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40척을 동원, 왜구의 격멸을 명하게 된다.

고려 함대가 진포를 역포위 하였을 때는 이미 왜구의 주력이 상륙한 다음이었으나 이들은 왜 선단을 격멸하고 내륙의 왜구들을 전멸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에 수천의 왜구가 지키고 있는 왜 선단을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최무선의 발사 명령으로 그 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병사들은 능숙한 솜씨로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이 중 화포, 화통, 질려포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로켓 형식의 유화, 주화, 촉천화는 전선 깊숙히 파고들어 적선단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500여 척의 선단은 단 한 척도 남김없이 격멸되어 상륙한 왜구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렸다.

상륙한 왜구들은 두목 아지발도를 중심으로 집결하여 관군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2만여 명의 도적떼는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 집결하였다. 고려 조정의 명을 받은 삼도 도순찰사 이성계가 마지막으로 운봉 일대의 왜구들을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하는 것으로 아지발도의 왜구들은 완전히 전멸하게 된다. 1383년 또 다른 왜구들이 120척의 배에 분승하여 침입해 왔으나 정지(鄭地) 원수가 전선 47척으로 관음포에 출동하여 왜선을 단번에 격퇴하니 이것이 박두양(朴頭洋) 해전이다.

고려 조정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정벌키로 하고 2년의 준비 끝에 1389년 2월 함대 사령관 박위를 중심으로 전선 100척을 동원 대마도 토벌 원정에 나서게 된다. 여기에서 30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적 소굴을 철저히 파괴했으며 왜선 1척을 연구 목적으로 나포하는 전과와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100여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 모든 전투가 최무선의 화약과 각종 무기들을 활용한 전투였으며 하나같이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대마도 정벌은 고려 해군의 마지막 작전이었으며 3년 후에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망하게 된다.

이성계와 최무선

고려 말년 경 몽골(원 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을 몸부림쳐 온 한족(漢族-중국)은 마침내 주원장(朱元璋)을 중심으로 명(明) 나라를 건국하는데 성공하고, 원의 세력을 북방으로 밀어내게 되었다. 세력 확장을 계속하던 명이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에 있던 철령 이북 지역을 명의 직속령으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옴으로써 고려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철령 이북의 지역은 중국에 세워졌던 우리 민족의 대제국 금(金-김 제국)으로부터 몽골이 강탈한 북방의 영토였다. 그 사이 우리와 동일계의 혈통인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상호 혼인 등을 통해 다져져, 쌍성총관부 영역을 모두 고려에 할양한 적이 있는 등 전례가 있어, 고려는 당연히 북방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1388년 최영과 이성계, 조민수를 주축으로 5만의 관군을 동원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다. 공민왕의 명령으로 1370년에 두 차례나 요동을 평정한 경험이 있는 이성계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고, 북으로 밀린 원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명은 요동에 소수의 군사밖에 배치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전략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을 넘지 않고 갖은 핑계를 대며 개경의 고려 조정에 요동 정벌을 철회해 달라는 요청만 거듭하고 있었다.

북방의 군벌로서 세력을 키워온 이성계는 민심까지 흔들리는 이 기회를 얻어 북쪽 변방 출신으로서 오랜 세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한 자신의 욕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최영은 어림군(근위대) 천 여명으로 개경성 밖에서 일전을 치렀으나 화원으로 쫓겨 갔고, 왕을 대신하여 고봉현으로 귀양갔다가, 1388년 12월에 처형되었다. 다시 우왕은 8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이성계의 진지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폐위를 당하였고, 강화도로 귀양을 갔다가 강릉으로 다시 보내지게 된다. 이성계는 창왕을 세웠다가 그 역시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고, 얼마 후 이들이 왕손이 아닌 요승 신돈(辛旽)의 아들이라고 누명을 씌운 뒤 각각 강화도와 강릉에서 처형하였다.

이성계는 다시 공양왕을 억지로 왕위에 세웠다가 다시 임금 구실을 못한다는 이유로 내쫓으니 결국 고려는 건국 475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후 이성계는 고려의 왕가인 왕씨(王氏)들의 반격을 막고자 1394년 4월, 공양왕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왕씨들을 찾아내 멸족시키게 된다. 이에 고려의 4대 성씨의 하나로 많은 수를 자랑하는 왕씨들은 많은 수가 멸문을 당하고, 살아남은 일부의 사람들도 성을 옥(玉), 전(全), 전(田)씨 등으로 바꾸고 숨어살게 된다.

이런 명분 없는 무력에 의해 왕위를 찬탈한 이성계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무력을 가진 자가 다시 똑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각 지방의 호족들이 가진 사병을 폐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상당한 저항과 혼란이 있었으나 마침내 지방의 사병 조직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통신 수단으로는 중앙 정부가 모든 군사력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지방의 사병조직 철폐(우리는 국사교과서에서 이를 ‘왕권강화’라고 배운다)는 결국 군사력의 축소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군사력이 축소된 만큼 이성계는 안으로부터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으나,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명나라의 신하국을 자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 강제로 찬탈한 왕위에 대한 권위를 외국의 힘을 빌려 세우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성계는 명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 위해 중국의 학문을 백성들에게 배우도록 하였고, 이런 사람들을 선비라 부르며 국정을 맡기니 날마다 모여 하는 짓이란 서로 헐뜯고 모략질 하는 것이었다.
또 왕권을 무력으로 쟁취한 이씨 왕들은 완력이 있어 보이는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 처형하는 것을 일삼으니, 백성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칼과 창을 버리고 중국의 시나 읊고 다니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은 대동이족(大東夷族)의 자존심마저 잃고 무력은 날로 약화되기에 이른다. 이성계의 이런 미치광이 같은 정책은 최무선 같은 우국 충정의 인사들에게 깊은 우려를 낳았다. 화통도감마저 해체되자 최무선은 벼슬을 버리고 자택에 은둔하여 새로운 총포의 연구에만 매진하게 된다. 물론 이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태조(太祖) 4년, 70세의 최무선은 깊은 병에 걸렸다. 최무선은 앞날을 예감하고 부인을 불러 그가 쓴 두 권의 화약 제조 비법인 (화약수련지법-火藥修練之法)을 비밀리에 보관토록 한다. 그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후에 이를 전수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만약 그의 아들 ‘해산’이 해득하기 전에 나라에서 자신을 찾는다면 책의 존재를 절대 밝히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최무선은 이성계 일파를 신뢰하지 못했던 것이다.

1395년 3월 최무선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갈고 닦게 된다. 1396년 왜구 4800여 명이 동래, 기장 등을 침범하자 조선 조정은 대마도 정벌을 실행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무력행사에 있어 문관을 총 사령관으로 하여, 문관에게 무관이 지휘를 받는 전통을 세우게 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전통은 총 사령관을 문관으로 함으로써 자신이 행한 왕위 찬탈이 재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여튼 대마도 정벌은 성공하였고, 대마도를 정식의 속령으로 하는 성과도 올리게 되었다. 물론 이로서 대마도민은 조선과 정식의 교역을 허가받았으므로 노략질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기도와 북구주의 영주들도 스스로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조선의 신하되기를 자처하게 된다. 일본의 통치자인 아시카가 막부도 조공과 함께 조선 왕조의 출범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 국교의 정상화를 요청하였다.

이렇게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이 해소되는 동안 북방 여진족으로부터의 위협이 증가되게 되었다. 이들 역시 쥬신족(朝鮮族)의 후예로서 동족이었으나 오랜 기간 동안 거친 삶을 살아온 그들은 상당히 과격한 성품을 가진 부족이었다. 군부의 반란을 우려해 축소해 온 군사력과 중앙 집중의 명령 체계는 여진족의 기습 공격에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없도록 하였고, 성에 더 많은 대포를 준비하면 소수로 기병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태종 원년에 이르러 조정은 최무선을 찾게 된다.

그러나 최무선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최해산이 이를 잇고 있었다. 따라서 조정은 최해산을 불러오게 된다. 최해산은 태종 원년에서부터 세종 10년까지 30년간 군기사(軍器司)에서 각종 육전용의 무기를 만들게 된다.

최무선이 소형의 함재포를 중심으로 개발에 주력한 반면, 아들 최해산은 북방의 기마병 침략군에 대응하기 위해 육전용의 화포와 탄류의 개발을 주로 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켜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한 화약의 제조 방법도 개발하였다.

이렇게 아버지 최무선과 아들 최해산에 의해 개발된 다양한 화약과 화포류는 훗날 이순신 함대를 통해 나라를 구하는 무기가 된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 대쥬신제국사-추무태왕
  •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