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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2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이순신이 부임한 전라좌수영은 전함 25척과 해군 4000여명으로 편제된 해군 기지로 경상우수영이나
경상좌수영의 각 75척 12000여명에 비해 작은 규모였다. 이순신은 부임하자 부실하게 관리되던 병기고를 점검하고 함선과 좌수영의 성(城)과 해자(垓子), 봉화대 등을 보수하는 등과 함께 왜에 잡혀갔었거나 다른 경로로 왜에 대해 알고 있는 병사들을 통해 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이해 진 기강을 바로잡아 나갔다. 또 좌수영 앞의 돌산도(突山島)와의 사이에 수중 장애물을 설치한다.

이 장애물은 돌산도와 좌수영 사이 진입 수로 중 한 곳을 막아 적은 병력을 반대쪽에 집중 배치함으로써 방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수로를 무슬목(無膝項)이라 부른다.
이러한 이순신의 전쟁 준비는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이때까지도 선조는 왜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 하였기 때문에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때의 준비에서 군관인 이봉수(李鳳壽)는 최무선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하며 대량 생산할 방법을 연구하고 이를 비축하였고, 정걸은 판옥선과 거북선을 개발하면서 이외에 새로운 불화살, 철익전, 대총통 등의 무기를 발명해 전란에 대비하였다.

이렇게 전란을 준비하는 동안 1592년이 되었다. 이해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기 직전,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의 반대로 변방으로 쫓겨 갔던, 원균(元均)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2월에 부임하였다. 또 이순신과 같은 해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억기(李億?)는 후에 전란이 발생하자 이순신을 도와 나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겉보기의 상황과는 달리 대부분의 수군은 그 준비 상태가 형편없었다. 미리부터 준비하던 전라좌수영은 전란에 대해 대비가 되어 있었으나, 다른 군영들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원균이 부임한 경상우수영은 전임 수사의 관리 소홀로 전함들은 기동이 가능한 것이 거의 없었고, 병사는 수백 명의 오합지졸들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살핀 원균은 이를 바로 잡기보다는 주색잡기에 빠져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고, 이는 다른 군영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 당시 조선의 군벌이 얼마나 부패했고, 국왕인 선조가 군사력에 대해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때 일본에서는 전쟁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591년 3월 9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신들과의 회의에서 조선 침략을 결정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떠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에게 즉각 선박 건조 할당량이 주어졌고, 1년 후인 1592년 3월 15일을 기하여 히데요시의 병력 동원령이 포고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영주들은 병사의 징집과 보급품의 징발을 시행하여 정규군 30만 7천명과 10만 이상의 잡역부와 노수(수군의 노 젓는 이) 등 도합 40만여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3월 16일 히데요시는 교토를 출발해 새로 건립한 나고야성으로 향했다. 이 나고야성이 조선 침략 전선의 총본부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곧이어 나고야성에 머무를 예비군과 조선으로 출병할 군단들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여, 일본 역사상 최대의 군행렬이 4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 조선 침략군 편제
* 조선 출정군은 모두 9개 군으로 나뉘었다.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 - 18700명
제2군 : 가토 기요마사 - 20800명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 - 12000명
제4군 ; 시마즈 요시히로 - 15000명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 - 24700명
제6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15700명
제7군 : 모리 테루모도 - 30000명
제8군 : 우키다 히데이에 - 10000명
제9군 ; 하시바 히데카스 - 11500명 등
총 15만 8천8백 명으로 이외의 15만 병력도 계속해서 조선에 투입되게 된다.

실제 조선 침략의 선봉장은 당시 나이 40세의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38세의 불교 신자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각각 ‘십자가’와 ‘나무묘법연화경’을 새긴 군기를 사용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은 4월 2일 오전 8시 유키나가군 1만 8천명이 선두로 출발하고 이어 기요마사의 제2군이 출발, 4월 2일 저녁 일기도(壹岐島)의 가쓰모토 항에 도착하였다.
4월 7일 밤 그 동안 역풍에 곤란을 겪다가 간신히 대마도의 완노우라항에 입항한 후 수일간 대기, 4월 10일 밤에 바람이 순풍으로 바뀌자 유키나가는 야간에 출항 명령을 내려 4월 12일 이른 새벽에 부산포에 도착하게 된다.

1592년 4월 12일의 이른 새벽에 부산포의 첨절제사 정발(鄭撥)은 병졸 몇을 데리고 자신의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정발 장군은 25세에 궁마(弓馬)로 무과에 급제한 후 36년간 변방만을 돌며 무인으로 살아오다 60세를 맞은 노장이었다. 정발과 그의 일행이 부산진성(釜山鎭城)을 나와 절영도(영도)에 도착했을 때 바다 위로 수백 척의 선단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왜적의 침입임을 직감한 정발은 즉시 부산진성으로 돌아가 휘하 병사 700여 명에게 전투태세를 명하였다. 마침내 임진왜란(壬辰倭亂: 일본에서는 문록의 역[文祿의 役]) 7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안개를 뚫고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 1군 18,700여 명은 빠른 속도로 부산포 상륙 작전을 마쳤다. 언덕 위의 부산진성에서 왜군의 상륙을 지켜보던 정발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휘하 700여 명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수된 자로서 부산진성을 그대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유키나가의 협박에 분노한 정발 첨사는 휘하 7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왜적에 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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