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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6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제 3차 출전
일본의 전략 변경을 간파한 이순신은 곧 이억기를 불러 3차 연합함대 구성과 함께 출전을 계획하였다.

6월 23일 일본의 제 1군인 야스하루 함대 70여척이 웅포를 발진해 견내량을 통과했다.
7월 4일 이억기 함대 25척이 여수에 도착하고 7월 6일 제 3차 이순신 연합함대가 전라좌수영을 발진하였다. 도중에 원균 함대 7척이 합류하여 연합함대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 1척을 더해 거북선 2척을 포함 총 56척의 규모가 되었다.

7월 7일 이순신은 적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7월 8일 이른 아침 6척의 특공선단을 견내량에 투입했다. 이 때 왜군 정탐선 2척을 발견해 추적을 시작했다. 적 정탐선은 그들의 본진이 있는 두호리 포구로 도망을 갔고, 두호리 안에서 대기 중이던 야스하루는 즉각 요격 함대를 발진시켰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남북 길이 약 3Km, 너비 약 500m의 수로이다. 이순신의 특공함대와 왜의 요격함대는 즉각 조우하였다. 곧이어 야스하루의 기함이 기동하기 시작하자 이순신의 특공함대는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어 특공선단은 70여척의 왜 함대의 추격을 받으며 한산도 북쪽의 넓은 바다로 빠져 나왔다. 왜의 선단도 견내량을 빠져나오며 추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순신의 치밀한 함정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곧 학익진을 펴며 야스하루의 함대를 에워쌌다. 야스하루는 함정임을 알고 후퇴하려 했으나 좁은 견내량을 통과하며 밀려드는 후속함대 때문에 후퇴를 포기하고 일전을 각오하였다. 야스하루가 총공격을 명령하자 조선의 전함들은 일제히 측면으로 배를 돌려 왜선을 가로막고는 포문을 열었다.

이 전투에 대한 일본측의 ‘협판기(脇坂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일본측)는 조선의 배를 약 30리 정도 추격하였다. 조선 배들은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 넓은 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우군(왜함대)의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거리면서 공격하였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할 수 없이 좁은 수로로 다시 후퇴하려고 하였으나, 적선(이순신 함대)들이 퇴로를 막고 커다란 불화살을 마구 쏘아 아군의 배는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야스하루의 가신(家臣) 와타나베와 와키자카를 비롯하여 높은 사람들이 많이 전사하였다. 대장인 야스하루는 노가 많은 배를 탄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 역시 도망치는 도중에 조선군의 공격으로 갑옷에 화살을 맞아 위험했으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이 한산도 해전은 이순신의 학익진과 정(丁)자 타법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해전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해전에서 적의 주력 전함 35척 포함 총 59척을 격침하고 기함 1척과 소형 쾌속선 13척만을 놓쳤다. 또 전투에 참가한 1만여 명의 왜병 중 8980명이 도살되었고, 400여 명이 한산도로 도망쳤다가 210명이 잡혀 죽고 190명만이 탈출하였다.

7월 9일 역풍이 불어 외즐포에서 하루를 쉬고, 7월 10일 새벽 이순신은 왜군의 본영인 안골포를 소탕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오전 7시경 약 21Km 떨어진 안골포에 도착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했다. 안골포에는 일본 해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연합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일본 최대의 거함인 니혼마루를 비롯하여 오타루마루, 나미키리마루, 야마시라즈마루 등 대형의 전함들이 즐비한 이 연합함대는 전날의 야스하루 함대의 괴멸 소식에 미리부터 겁을 먹고 안골포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안골포는 지형이 얕고 좁으며, 썰물 때는 바닥이 노출되어 크기가 큰 판옥선은 마음대로 항내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갖은 방법으로 유인을 하려 했으나, 왜군은 야스하루 함대의 전멸을 경험한 터라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밀물 때를 기다려 아주 좁은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다. 이순신은 제장들에게 명하여 전함들을 줄지어 투입하되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전함이 천.지.현자 총통 및 각종 대포들을 발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즉시 빠져나와 다음 배가 공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전투는 길어지게 되었고, 또 적의 기함 니혼마루를 지키려는 다른 왜함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좀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이리하여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싸움은 온종일 계속되어 저녁 8시경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왜함들을 격침하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기함 니혼마루도 항해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일단 전투를 끝낸 후

항구의 입구를 봉쇄한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잔적을 소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온종일 계속된 전투로 피곤에 지친 몸을 견디지 못하고 파수병들이 깜빡 잠든 틈을 타고 니혼마루가 몰래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11일 새벽 이순신의 함대는 다시 왜적 소탕전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잔적들은 모두 도망쳐 버린 뒤였다. 이순신이 즉시 수색조를 편성하여 양산강, 김해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으나 이미 왜적들은 모두 부산 쪽으로 도망간 후였다. 이로서 남해의 해운로를 확보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북쪽으로 진출했던 왜병들은 군수품 부족과 다가오는 겨울 추위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승전 후 전 연합 함대를 모아놓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게 하여 함대의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였다. 이를 지켜본 왜병들은 이제 그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해야만 하였다. 대단히 효과적인 함대 시위였던 것이다.

제 4차 출전
7월 13일 제 3차 출전에서 귀영한 함대는 즉시 제 4차 출전을 위해 폭약 등의 군수품 조달에 돌입하였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는 뜻이 잘 맞아 앞으로의 전망 등에 대해 많은 의논을 하였다. 이 때 선조는 왜적이 평양으로 진군하자 또 다시 도망하여 의주까지 가 있으면서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왜선의 본진인 부산 공략을 이억기와 의논하였다. 이억기는 흔쾌히 동의하고 원균을 비롯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일단 비밀로 하고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단 80척의 함선으로 500척이 넘는 적을 상대하겠다는 죽음을 불사한 결의였던 것이다. 이억기는 바로 전라우수영으로 돌아가 출동 준비를 마치고 8월 1일까지 좌수영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조하면서 우수영에 대한 지휘권도 이순신에게 맡기고 명령에 따를 것임을 다짐했다.

이억기의 함대는 8월 1일 좌수영에 도착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이억기의 전함 40척과 협선 52척이 이순신의 전함 34척과 협선 40척과 연합하여 전함 74척과 협선 92척의 전란이후 최대의 연합함대를 편성한 것이다. 이순신은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23일간 합동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는 부산 침투를 염두에 둔 훈련이었지만 병사들은 그 의미를 몰랐다.

8월 24일 오후 4시, 드디어 연합 함대는 여수에서 출항하였다. 관음포에서 1박을 한 후 노량을 통과하여 8월 25일 원균의 함대 7척과 합류하였다. 다시 당포에서 1박한 후 8월 26일 밤에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8월 28일에는 낙동강 일대를 수색하고 8월 29일 장림포에서 적선 6척을 격침했다. 9월 1일 새벽 2시 장항포를 출항한 함대는 오전 8시에 적선 5척을 격침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적선 8척을 다대포에서 격침하고, 오전 10시에는 적선 9척을 서평포에서 격침했다. 이어 오후 2시에 적의 척후선 2척을 송도 앞에서 격침하고 이어 3시 30분경 요격선 4척을 초량목에서 격침하는 등 연전연승을 계속하며 부산진으로 진출하였다. 9월 1일 오후 3시 30분경 초량목을 통과한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멀리 부산진에 무려 470척의 일본 함대가 밀집하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조선에 침입한 모든 일본 함선이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함대는 80여 척이었으므로 무려 6배에 달하는 것으로 6대 1의 싸움이라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만약 이대로 도망을 친다면 사기가 오른 왜선이 맹렬히 추격해올 것이므로 이순신의 함대는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에 왜선들은 공포의 이순신 함대의 돌격에 겁에 질려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돌격해 들어가자 이억기의 함대로 뒤를 따랐고, 원균도 엉거주춤하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부산진의 왜선 470척 중에는 이미 함대를 이순신에게 잃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등도 섞여 있었다. 이미 이순신의 신화는 왜군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어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왜선들을 에워싸고 있는 지상에 축성된 왜성과 포대 진지였다. 조선의 육군에서 탈취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의 대포로 무장한 포대 진지는 이순신의 함대가 사정권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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