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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1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1586년 오랜 기간의 전국 시대를 거친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두 사람에 의해 평정이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사로 정권을 쥐게 된 심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왕을 보필하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자리에 올랐다. 태정대신의 자리에 올라 일본을 호령하던 히데요시에게 오랜 전국으로 엄청난 수로 양성된 무사들과 몰락한 귀족들 등이 새로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과거 백제의 땅으로부터 쫓겨 온 왜왕가의 복수라는 내부적인 명분과 명을 치겠다는 외부적인 명분을 앞세워 조선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게 된다. 가장 먼저 대마도를 거쳐야 하는 이유로 조선의 속령이 된 대마도의 도주를 불러 굴복시켰다. 그리고는 대마도주를 시켜 조선으로 하여금 명을 치기 위한 길을 열든가 항복을 하라는 통보를 하게 한다.

대마도주 요시노리는 그의 아들 요시토모(宗儀智)와 가짜 중 겐소 등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그의 충성심을 조선에 보이기 위해 정해 왜변의 주동자였던 해적 신삼보라, 망고시라, 긴시요라 등을 잡아 바치고 이때, 잡혀간 조선 해군 공태원 등 100여 명을 구출해 데려갔다.
요시토모는 조선에 와 왜왕이 새로 들어섰으니 통신사를 파견해 축하해 주기를 간절히 청원하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1590년 4월말에 200여 명으로 구성된 친선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게 된다.

조선의 왕 이연(선조)은 통신사의 파견 요청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이웃 나라의 신왕을 그대로 승인해 주고,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던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사절단에는 정사(正使)에 황윤길(黃允吉, 西人), 부사(副使)에 김성일(金誠一, 東人), 서장관(書狀官)에 허성(許筬)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일자무식하고 예의가 없으며, 외모가 작고 천하게 생긴 등 볼품이 없자 판단에 있어 많은 실수를 하게 된다.

히데요시는 통신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명을 치고자 하니 함께 명을 치거나, 왜병이 명을 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사절단은 약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를 하였다. 황윤길과 허성은 왜가 침략할 것이라 주장하면서 징집과 훈련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에 위배가 되는 주장을 하면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태조의 가르침대로 군병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이의 10만 양병론을 흘려버린 사람이었다. 따라서 황윤길과 허성의 주장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부사 김성일은 선조의 귀에 맞는 대답을 하고, 반대파인 황윤길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히데요시의 외모를 말하며 침략은 없을 것이라 보고한다.

선조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바로 김성일의 말이 옳다 하면서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라는 관직을 제수하고, 국론을 ‘왜인의 침략은 없다’라고 정해 버렸다. 왜인들의 침략 계획을 선조는 단순히 ‘없다’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정해 버린 것이다.

이후에 대마도주의 아들 요시토모가 조선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에게 1592년에 왜가 조선을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 귀뜸해 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오억령을 국론을 어지럽힌 자라 하여 파면하고 심희수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심희수 역시 동일한 보고를 하였지만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때서야 유성룡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신들이 왜의 침략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정여립의 왕권에 대한 논조를 역모로 몰아 친족은 물론 친구를 포함 주위의 관련된 모든 사람을 무려 1천여 명이나 참살한 전례가 불과 10수개월 전에 있었으므로 아무도 바른말을 주장하지 못했다.

선조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하들 중에서 누군가에게서 주장이 나오면 이를 선택하는 것으로 마치 신하의 뜻을 존중하여 정책을 펴 가듯 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조선에 당파 싸움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원래의 동인과 서인은 학문적인 견해 차이로 출발하였으므로 학문의 경쟁적 발전에 기여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선조는 바로 이들을 이용해 신하들의 단결을 방해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제거하며, 그 책임을 이를 고소해 온 파당에 덮어씌우는 정책을 폈다.

이로서 조선을 오욕의 역사로 몰아넣은 파당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선조는 신하들의 논쟁을 일부러 격화시키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왜의 침략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이때 왜의 침략을 믿게 된 유성룡은 과거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대했었던 사람이나 그는 이것에 연연해 국사를 그르칠 사람이 아니었다.

유성룡은 선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대비책을 세우고자 지금의 전북 정읍 현감으로 있던 어릴적 친구 이순신(李舜臣)을 은밀히 집으로 불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둘은 왜의 침략이 있을 것으로 공감하고 미리 대비를 하기로 한다. 이에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발령하여 바다에서 적을 막기로 계획한다. 유성룡은 주위의 반발을 우려해 먼저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발령하고, 곧이어 고사리진(高沙里鎭)의 첨사로 전임시켰다가 수일 후 다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발령하였다. 1591년 2월 16일 전라좌수영에 부임한 이순신은 비로소 전쟁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선 해군의 작전구역과 병력 상황
* 전라우수영 : 전함 30척, 해군 5000명
* 전라좌수영 : 전함 25척, 해군 4000명
* 경상우수영 : 전함 75척, 해군 12000명
* 경상좌수영 : 전함 75척, 해군 12000명
  이외에도 당시 조선 해군은 충청수군 전함 30척, 해군 5000명 및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도   수군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편제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는 20%밖에는 가동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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