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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10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한편, 원균 함대의 부산 공격으로 일시 당황했던 왜장들은 공격이 있던 날 원균이 보여준 수상한 행동이 작전과는 무관한 원균의 무지였음을 알고 조선 수군을 전멸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이리하여 부산을 결사 수호하려던 왜장들은 작전을 바꾸어 원균 함대를 전멸시키기 위하여 1천여 척의 대연합 함대를 조선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로부터 불과 60리 거리에 있는 웅포와 안골포 등지로 총집결시켰다.

7월 15일 밤 10시, 왜군은 6척의 특공 함대를 파견하여 원균 함대의 방어 태세를 시험해 보았다. 그런데 원균은 함대가 정박해 있는 외즐포의 외항에 경비선 하나 세우지 않고 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왜선들의 대담한 야습으로 원균 함대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일본 특공 함대가 돌아가자, 눈치 빠른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밑에 있다가는 목숨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직속 함대 12척을 이끌고 일본 특공함대를 추격하는 척하면서 외즐포를 벗어나 한산도 방면으로 도망쳐 버렸다.
불과 6척의 특공 선단 출현에 조선 수군의 본진이 허둥지둥 했다는 소식에도 왜장들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동안 이순신 함대의 유익.매복.기습 작전에 걸려 참패를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결국 원균의 무지함에 대해 확인하고도 전 일본 해군을 비롯하여 무려 10만의 육군까지 동원하여 조선 수군 전멸전을 준비하였다. 이 작전에는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고니시 유키나가 등까지 참전하여 무려 30여 왜장들이 연합하였다. 16일 새벽 4시경, 일본 최대의 연합 함대가 외즐포로 통하는 상.하 양쪽의 항구 입구를 겹겹이 포위한 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일시에 돌진해 들어갔다. 원균의 조선 함대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술기운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원균은 갑옷도 걸치지 못한 채 기함에 올라 외즐포를 탈출하기 위하여 좌충우돌하였다. 겨우 겹겹이 쳐진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한산도로 달아났다. 거의 모든 조선 군함들은 불타고 있었고 기함을 따르는 배는 2, 3척에 지나지 않았다. 간신히 한산도로 통하는 견내량 입구에 도착하니 그곳에도 수백 척의 왜선들이 수로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의 기함을 발견한 왜선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집중 공격을 퍼부으니 기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여 버렸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원균은 배를 버리고 물에 뛰어들어 간신히 섬으로 기어올랐다. 그러자 이를 본 왜병들이 공을 다투며 추격하여 결국 원균은 그들에게 잡혀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원균의 기함이 전장을 이탈하여 달아나자 이억기와 최호(충청 수사) 함대도 적의 포위망을 뚫고 기함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원균이 배를 버리자 방향을 바꿔 춘원포로 향했는데 그곳에도 왜선들이 대기하고 있어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이억기는 목에 칼을 꽂아 영웅답게 자결하였다. 이로서 전설적인 이순신 함대는 원균에 의해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조선 해군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기고만장한 우키다 히데이에는 7월 17일, 작전 회의를 통해 이미 북진중인 우군(右軍)을 제외하고 좌군(左軍)과 중군(中軍)의 10만 대병을 군선을 이용하여 곧장 한강으로 상륙시켜 한성을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7월 29일, 일본의 좌군과 중군은 일제히 서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총사령과 우키다 히데이에는 부산에서 출발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웅천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거제도에서, 모리 요시나리와 이토 우헤이는 안골포에서 출발하였다. 이외에도 하치스가 이에마사와 나마고마 히토마사 등도 타군과 보조를 맞추어 가며 모두 사천 근처로 집결하였다.

사천에 집결한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올라가서 구례를 삼키고, 8월 16일엔 벌써 남원성을 함락시켰으며, 다시 바다로 내려와 전라 우수영을 목표로 진군하였다. 이때의 좌중군 연합군은 대형 수송선 130여 척에 70여 척의 호위 전함을 거느린 10만의 대병이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우리는 지금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 이순신이 이전의 신화를 뛰어넘어 더욱 위대한 신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게 된다. 불과 12척의 패잔선으로 일본의 정예 함대 200여 척과 10만 대군을 격멸시키는 믿겨지지 않는 신화인 것이다.
이 명량해전이야말로 그 동안 사가(史家)들이 손꼽아 온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을 수백 배 뛰어넘는 진정 위대한 대첩으로,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용병술을 확연히 살펴볼 수 있는 해전이다.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서울에 압송된 후 죄인으로서 혹심한 고문을 받았다. 판부사 정탁의 목숨을 건 구명 운동으로 간신히 사형만은 면하고, 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7월 18일, 그러니까 원균의 함대가 전멸당하고 이틀이 지난 뒤 새벽에 원수부의 군관 이덕필과 변홍달이 찾아와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을 이순신에게 전하였다. 곧이어 도원수 권율이 원수부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사병 신세인 이순신을 찾아왔다. 해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말단 부하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앞에 나타난 권율은 마치 그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대영웅을 죄인으로 몰아 백의종군시키고 있음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 난국을 타개해 줄 사람은 이순신 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우국충정에 불타는 이순신은 과거 통제사 시절 그의 밑에서 종사했으면서, 지금은 원수부에 속해 있는 9명의 군관을 차출하여 대책반을 편성한 후, 남은 전선이 정박해 있는 하동(河東)의 노량진(鷺梁津)을 향하여 달려갔다.

전선으로 달려가는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손으로 조선 해군을 다시 재건하여 10만 왜병들의 서해 진출을 막아야 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건져 해군 재건에 활용해야 할 만큼의 악조건에서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를 맞으며 말을 달려 진주에 도착, 진주 부사와 논의를 한 후 4일 만에 다시 142km를 달려 7월 21일, 목적지인 노량진에 도착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하여 이 곳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한편, 선조의 명령으로 이번 해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종군한 선전관 김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서울로 돌아갔다. 그는 원균 함대의 괴멸 과정을 소상히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때가 7월 22일이었으니, 원균이 패전한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왕은 급히 대신들을 소집하여 사후 대책을 의논해 보았으나, 이미 조선 수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구국의 영웅을 죄인으로 몰았던 선조는 뻔뻔하게도 다시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요술이라도 부려 자신의 왕조를 구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이로서 1597년 7월 23일자로 된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8월 3일 이른 아침 이순신에게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움직임은 대단히 기민해졌다. 상대는 수백 척의 대형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에게는 12척의 함선이 있을 뿐이었다. 제독은 이 12척의 전함(판옥선)의 전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전 함선을 거북선과의 절충형으로 개조하였다.

즉 갑판의 벽을 높여 병사들이 적의 조총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왜인들은 이 배도 거북선이라 불렀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선 배를 움직일 병사와 전투병들이 필요했다. 이 때는 이미 배에 딸린 병사들의 태반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 또 군량미도 구해야 했고, 탄약과 피사체도 모두 부족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의무만 지워줬을 뿐 쌀 한 톨 지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9명의 군관을 이끌고 이 모든 보급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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