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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3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유키나가의 제 1군은 유키나가의 직속군 7000여 명과 그의 사위이면서 대마도주의 아들인 요시토모가 이끄는 5000여 명의 해적, 마쓰우라 시게노부의 해적 군대 3000여 명, 아리마 하루노부의 2000명, 오무라 요시사키의 1000명, 고지마 스미하루의 700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대마도주의 아들 요시토모는 조선의 속령으로서 일본과 조선의 눈치를 살피다 히데요시 편에 붙어 이번 전쟁에 참가한 것이었다. 따라서 부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안내에 따라 유키나가군은 서슴없이 부산진성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많은 유키나가의 제 1군을 결사적으로 막던 정발은 뒤이은 기요마사의 제 2군을 보고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부산진성을 막아 낼 수 없음을 알았다. 부산진성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정발을 지원키 위해 달려온 다대포 첨사 윤홍신과 함께 사투를 벌이던 부산진성의 수비군은 결국 모두 전사하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시간만으로, 단 700명의 병력이었던 정발장군의 부대가 얼마나 치열하게 항전을 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전함 75척과 협선 등 100여 척에 달하는 함대와 12,000에 달하는 병사를 지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병의 출현과 함께 동래로 도망쳤고, 유키나가군이 부산진성의 본진인 동래성으로 향하자 또 다시 도망쳐 버렸다.

이때 동래성의 방위를 맡던 경상좌병사 이각도 겁을 먹고 달아나 버렸다. 그나마 박홍은 도망치기 전에 부하들을 각 수영(水營)에 보내 왜침을 통보하도록 하고 파발마를 서울로 띄웠다. 이후 박홍은 부끄러워 산속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유키나가의 왜병들이 동래성으로 진군하자 동래 부사인 송상현(宋象賢)과 양산 군수 조영규, 홍윤관, 송봉수, 노개방 등의 장수들이 결사 항전을 다지고 결전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부산포에 왜군이 상륙한 4월 12일에서 단 이틀이 지난 4월 14일의 일이었다. 이때 박홍이 버린 경상좌수군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으며, 4월 15일 오전 10시에 박홍이 보낸 사자가 경상우수영에 도착하여 원균에게 왜침을 알리고, 다음날 오후 10시에 원균의 통보로 이순신도 이를 알게 된다.

박홍의 또 다른 사자는 4월 16일 오후에 경상관찰사 김수에게 왜침을 알리게 된다. 이에 김수 관찰사는 4월 17일 파발을 띄워 전라좌수군이 경상도 경내로 월경할 수 있도록 긴급 요청하고, 4월 19일 김수의 왜침 통보가 이순신에게 전해진다. 이에 앞서 4월 18일에는 김수가 원균에게 출전을 명령한다. 4월 27일 오후 7시에 조정에서 내려온 파발은 이순신의 함대가 경상도로 월경해도 좋다는 허가와 함께 작전권을 이순신에게 부여하게 된다.

긴박하게 조치되는 동안 부산진과 동래를 함락시킨 유키나가의 제 1군은 양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고, 기요마사의 2군도 경주를 거쳐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 3군이 4월 30일 김해부(지금의 김해)로 침공하고 나가마사의 일부 군대는 5월 2-3일에 거쳐 합포(마산)와 웅포(진해)를 침공하게 된다. 연이어 5월 7일에는 경상우수영이 있는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옥포와 승포에도 나가마사의 3군이 침공하였다.

4월 18일 경상관찰사 김수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은 경상우수영의 원균은 전혀 정비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으나 이미 늦었다. 경상우수영에는 출전할 수 있는 함선과 병력, 무기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에 원균은 4월 19일 전투를 포기하고 관내의 창고를 불태워 모든 군사 기밀 문서를 없애고, 경상우수영의 함대 73척 중 기동이 어려운 전함 40척과 협선 17척 등 모두 67척을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남은 함선을 끌고 사천(泗川)으로 도망쳤다.

왜침 하루전인 4월 11일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서는 정걸과 나대용이 중심이 되어 개량해 온판옥선(전함)에 뚜껑과 용머리를 달고,돛과 대포를 설치

한 거북선의 완성이 있었다. 왜침이 시작된 4월 12일 오전에는 거북선의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이 배의 이름은 귀선(龜船:거북선)이라 명명되었다. 거북선은 길이가 27.6m이고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무려 33.7m에 이르며 너비는

또 승선인원은 선격, 무사, 타공, 요수, 정수 등이 각 2명씩이고 사부, 화포장, 포수 등 포병이 52명, 노 젓는 이가 100명인데 그 중 80명은 거북선 좌우현의 노 8자루씩 모두 16자루에 전속되어 있고, 20명은 예비병이었다. 이때 노는 한 자루당 노장 1명과 노수 4명이 담당하는 것이다.

전투시에는 전원이 달라붙어 전함의 기동력을 극대화하게 된다. 이외에 주요 화력으로 좌우 방패판에 22개씩의 총구멍이 있고, 거북 머리에도 2개의 소포 구멍이 있으며, 아래 양쪽에는 대포 구멍이 2개 있다. 또 배 양편에 12개의 대포 구멍이 있고 꼬리쪽에도 포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거북선의 주포로는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銃筒)이 있었다. 그중 가장 작은 황자총통은 전함의 거북 머리 속에 숨겨 두었다가 전투 중, 적의 대장선 밑을 파고들어 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적장을 격살하는 특수 목적에 사용되었다. 가장 큰 천자총통은 1290근의 무게이며, 한번에 사용되는 화약은 30근에 달하는 대구경 포였다. 수철연의환(水鐵鉛衣丸)이라 부르는 탄체를 발사할 경우 그 도달 거리가 10리(4Km)에 달했고, 조란환(鳥卵丸)을 사용하는 경우 한 번에 3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대량 살상무기이다.

이런 신무기인 거북선이 진수식을 하고 이순신이 승선하여 판옥선 등과 함께 함재포를 쏘아보며 해전 연습에 들어가기 몇 시간 전에, 부산에서는 왜적들의 침공이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4일 후 이순신은 원균에게 왜침을 통보 받았고, 19일에는 김수 관찰사로부터의 연락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을 벗어나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상부의 연락을 기다리며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는 앞서 설명한 통신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중앙 집중적 군사 지휘체제가 갖는 가장 취약한 약점인 것이다. 김수 관찰사의 월경 요청과 왜침 보고는 4월 17일 오전에야 한성에 도착했고, 선조가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월경 허락과 원균과의 합동 작전이 결정되어 이것이 이순신에게 통보된 것은 무려 10일이 지난 4월 27일 오후 7시였다.

* 당시 왕권의 명령없이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순신이 움직일 수 있게 되는데 전쟁 발발 후 15일, 김수관찰사에 의한 요청이 있은 후 10일이 걸렸다는 점은, 허울좋은 왕권강화가 국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이것이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전락시킨 이유가 되고 만 결정적인 실증이 될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곧바로 원균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서로 만날 장소를 문의하였다. 원균의 파발은 4월 29일 정오에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왜적의 규모는 5백 척 정도이다.
2. 적선이 현재 정박하고 있는 곳은 부산, 김해, 양산강, 명지도 등이다.
3. 경상우수군이 적선 10척을 격침시켰다.(이 부분은 원균의 거짓말이다.)
4.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서 결국 이를 막지 못하고 경상우수영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5. 만날 장소는 당포(경남 통영군 신양면 산덕리)로 정한다.

등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사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해 처음 계획한 원균과의 연합 작전도 경상우수영의 괴멸로 말미암아 불가능하고, 단독으로 적을 제압하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아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500척의 적에 맞서 자신의 24척만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순신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이순신의 요청을 받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은 전라우수영에 명하여 이순신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는 그의 함대를 이끌고 즉각 출동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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