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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7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오후 4시경 이순신의 함대가 포대 진지의 사정권에 들어가자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포수는 바로 왜병들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들이었다. 아직 조선식 대포를 다룰 줄 몰랐던 왜병들의 입장에서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포탄이 떨어지기만 했지 좀처럼 우리 함대를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아마도 조선인 포수들이 고의로 조준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왜병들이 조선인 포수들을 잔혹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어 육상의 포대에서 모과 열매만한 수마석괴(水磨石塊:돌을 둥글게 깎아 만든 포탄)들이 무수히 날아와 함선에 명중해 희생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대포에 의해 조선인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물러서지 말고 돌진하라! 지상포를 두려워 말라! 눈앞의 적선을 격멸하는데 정신을 집중하라! 우리가 적선에 바짝 접근하면 적들도 포를 쏠 수 없게 된다!”고 외치며 진격을 독려하였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 속으로 뛰어든 이순신과 그의 24척의 특공함대는 결사적으로 포를 발사하며 적선들을 파괴해 갔다. 7만 명의 왜병들은 그들의 조총 사정거리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전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억기의 함대도 곧 이 결사전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적선을 향해 포를 발사하였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결사전은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오후 7시경, 부산 앞바다는 온통 불타는 왜선으로 뒤덮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모든 기동함대의 대포들은 연속된 포격으로 인한 포열(砲熱)로 인해 더 이상의 사격이 불가능하였고, 포탄도 거의 다 떨어져 그야말로 유감없는 일전을 벌이고 퇴각하게 되었다.

연합함대의 기함인 이순신의 중군선으로부터 주목을 요하는 나팔이 울리고, 공격 중지와 퇴각을 명하는 깃발이 올랐다. 미친 듯이 울려대던 포성이 일시에 멈추고, 연합함대는 질서 정연하게 전장을 빠져 나갔다. 불과 3시간에 걸친 이 결사 해전으로 일본은 군함 100여척과 적어도 3800명의 수군을 잃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함대도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한 6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부상자도 25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전함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이순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207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었다. 적선 격침 및 대파 359대 0, 사상자 33,780 대 243.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 이순신의 이 불멸의 기록은 세계 해전사에 영원히 신화로 남을 것이다.

**전황(戰況)
이순신 함대의 빛나는 승리는 상대적으로 일본군의 수륙 연합 작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4월 14일 새벽에 부산에 상륙 후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서울 함락 3일 전에 도망친 조선 왕을 쫓지 않고 무려 16일 동안이나 서울에 머무르며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의 수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본군은 오히려 육군이 고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모든 지원을 육군에 집중시켰고, 서울 점령 때쯤이면 해군이 보급품을 싣고 수로를 이용하여 편안하게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므로 한강에서 재보급을 받고 평양 공격에 나설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다음의 보급 지점을 평양으로, 3차 보급 지점을 신의주로 하여 각각 대동강과 압록강을 이용한 보급으로 설정하여 육군의 돌격적인 진군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육군은 속전속결을 위해 가벼운 장비만으로 서울 점령에 온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고니시 군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보급품이 바닥난 상태에 있었다. 고니시는 재보급을 받기 위해 해군 수송 선단을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최강이라 예상하던 경상 우수군을 일거에 격파한 일본 보급 선단과 호위 함대들은 느긋하게 한려수도를 돌아 한강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때 나타난 이순신의 함대에 5월 7일 옥포에서 일격을 당해 4천의 일본군과 2천 톤 이상의 보급품이 수장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놀라운 소식은 일주일 후인 5월 15일 서울에 도착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도 전달되었다.

예상치 못한 보급 선단의 괴멸로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소용없어진 고니시는 할 수 없이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진격해 갔다. 평양성을 깨뜨리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 고니시는 그 기간이면 초전의 실패를 극복하고 일본 해군이 조선 해군을 격멸하고 대동강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쳐 평양성엔 무혈입성하는 행운을 얻었다. 행운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군은 평양성을 버리면서 무려 10만석이 넘는 군량미를 고스란히 남겨놓고 가 일본군을 궁지에서 구해준 것이다. 이로서 식량 문제는 해결되었고, 조선의 왕은 불과 3일 거리인 의주에 있다는 정보도 이미 입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탄약 부족이었다. 만약 그들의 속사정이 조선군에게 알려지면 그들은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모두 애타는 마음으로 보급 선단의 도착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그렇게 기다리던 72척의 일본 대선단이 또 다시 이순신에게 걸려 남해안도 통과하지 못하고 당포 등지에서 모조리 괴멸되고 만 것이다. 이로서 고니시는 평양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불과 3일 거리의 조선 왕도 추격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를 불안해하며 대동강만 쳐다보던 고니시에게 더욱 암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 해군 제독 이순신을 잡기 위해 무려 6만의 병력과 함대가 투입되었는데 이들이 불과 이틀만에 한산도, 안골포 해전 등에서 모두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 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라 좌수군인 이순신 함대에게 서해 보급로가 봉쇄당한데 비해, 동해쪽은 경상 좌.우 수군이 모두 초전에 무너져 무방비 상태였던 까닭에 보급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가토 군은 7월에 벌써 회령까지 진격하여 그 곳에 도망쳐 와 있던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잡는 쾌거를 이루었다. 순조로운 보급이 작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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