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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8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임진년이 지나가고 어느덧 1593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일본의 평양 방면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심정은 실로 참담하기만 했다. 그 동안 조선군이 남기고 간 군량미로 그의 군대가 겨우 연명은 해 왔으나 이제는 그나마도 바닥이 나 버렸고, 총탄과 화약도 겨우 비상용만 남아 있었다. 이런 때 만약 조선의 의병들이 싸움이라도 걸어오게 되면 그들의 속사정이 금방 들통 나 버리고 말 것이다. 유키나가에게는 마치 바늘방석과 같은 하루하루였던 것이다.

일본의 따뜻한 날씨에만 익숙해 있던 일본 병사들은 평안도의 매서운 추위에 몹시 시달려야 했다. 기다리는 보급 선단은 부산진 깊숙이 숨어 있다가 이순신이라는 괴물 함대에 의해 쑥밭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출항 기지인 부산진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일본으로 영원히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병사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부상자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상처가 곪아 썩어 들어가고, 여름 복장을 한 채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식량마저 떨어져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었고 한성의 사령부도 속수무책으로 모든 것을 현지 사령관의 재량에 맡긴 상태였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한성으로 후퇴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나 그것만은 절대 용납되지 않고 있었다. 만약 후퇴라도 했다가는 후일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위험이 있어서 좀처럼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철군의 명분을 찾고 있던 유키나가가 평양성의 왜군을 점검하니 겨우 8천 명뿐이었다. 이때 김명원, 이일, 이원익 등의 장수들이 정규군 8천 명과 의병 3천 등 총 11,000명으로 평양성 탈환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 조선의 요청을 받은 명 나라의 군대 5만이 이여송을 장군으로 하여 도착해 있었다.

1월 7일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의 칠성문. 보통문. 함구문 등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를 철군의 명분으로 삼아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유키나가는 은밀히 포위되지 않은 대동문을 통하여 평양성 철수 작전을 지휘하여 빠져나갔다. 부상자와 병자는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힘이 남아 있는 자들만 대동문을 통해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유키나가의 명령은 비참한 것이었고 그 자신은 울고 있었다.

* 따라서 명군의 참전으로 왜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엄청난 과장인 것이다. 당시의 명군은 거지 군대로서 자신들의 식량마저 조선군에게 얻어먹으며 전투를 했으니 이게 어디 동맹국을 지원하러 온 군대인가? 또 그들의 전투력이라는 것도 도망가던 왜군이 벽제에 이르러 반격해 오자 혼비백산해 개성까지 도망쳐 버린 오합지졸이었던 것이다. 명군의 역할을 과장한 것은 그 동안 군 작전에 무지한 학자들이 사대사상에 젖어 명국의 공을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이때 평양 작전에 종군했던 왜병 요시노 진고자에몬은 후에 그의 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날 밤은 북풍이 몹시 불었다.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하였고, 인간의 지각을 모두 앗아가는 듯하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지팡이 대신 활을 잡지도 못할 정도였고, 막대기가 다 된 다리를 그저 몽유병자처럼 질질 끌고 갈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동사(凍死)나 아사(餓死)라는 죽음만이 길가에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21일, 패장 유키나가는 간신히 한성에 도착하였다. 철군 도중 1400명이 죽고, 살아남은 자는 6600명에 불과하였다. 그는 차마 한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의 용산(龍山)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유키나가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성까지만 오면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정은 한성 사령부도 마찬가지여서 성내의 쥐를 잡아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순신의 해상 봉쇄는 이렇게 왜군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해상 봉쇄로 보급선이 끊긴 까닭에 이미 다른 경로로 북상해 있던 왜군들은 모두 서울로 집결해야만 하였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하여 가토 기요마사 부대도 이미 서울에 집결해 있었다. 이리하여 서울에만 무려 10만이 넘는 왜병들이 들끓어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난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할 수 없이 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와 17명의 왜장들은 연서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그들의 극심한 식량난을 알리고 더 이상 전투 행위가 불가능하니 최소한 부산 지구까지 만이라도 철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별다른 묘책이 있을 리 없었던 히데요시도 결국 철병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4월 18일 서울을 점령했던 왜병들은 결국 스스로 서울을 떠나 후퇴를 개시하였다. 이미 기진맥진한 왜병들은 부산까지의 긴 행군 도중 그들을 사냥하려는 조선 의병들의 습격을 염려하여 조선과 동맹 관계에 있던 명군에게 매달려 회군시 그들의 안전을 미리 보장받고 있었다. 또 함경도까지 쫓아가서 잡은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하여 조선군의 추격을 막았다. 이 모든 사태가 다 이순신 제독의 남해안 봉쇄로 인한 결과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삼도수군통제사
남해안 봉쇄를 통해 일본 상륙군의 보급망을 완전히 차단하여 그들을 굶주림 속에 몰아넣고, 급기야는 그들이 그렇게도 점령을 소원했던 서울마저도 스스로 포기하고 떠나게 만든 이순신의 활약은 실로 영웅적인 것이었다.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쳐 버린 비겁한 왕 이연의 눈에도 이순신은 확실히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제 이순신을 빼놓고는 조선 수군을 생각할 수 없게 되자 이순신은 특명을 받아 조선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3도 수군통제사의 본영으로는 한산도가 선정되었고, 경상 좌.우 수군, 전라 좌.우 수군, 충청 수군을 총망라하는 자리였다.

대제독 이순신은 즉각 군함의 증강 계획에 착수하였다. 전투함 250척을 보유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만약 그의 계획이 성공리에 달성된다면, 비로소 부산과 대마도 간의 해상로마저 완전 봉쇄하여 조선에 이미 상륙해 있는 왜병들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든 뒤 일망타진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250척의 군함에 따르는 각종 군기와 식량 확보 및 신병 모집 등 모두를 통제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였다. 당시의 이연 정부는 이순신의 수군을 도와주기는커녕 군량미로 지어놓은 농산물을 공출해 갈 정도로 부패하였고, 벼슬만 올려놓고는 엄청난 책임과 의무만 지우고 있었다.

한편 부산으로 철수한 왜군들은 이순신이 있는 한 남해안을 통과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육군의 작전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이 3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니 더 이상 조선 정복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산에 집결해 있던 왜군들은 서서히 본국으로 철수해 갔고, 그 자리엔 정치꾼들이 들어서서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세월만 낚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꾼들의 작태마저도 이순신에게는 도움이 되고 있었다. 우선 수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조선 해군을 다시 증강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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