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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 - 이순신 9
※ 본 내용은 대쥬신 제국사의 권5에 실려있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전쟁 발발 4년째로 접어든 1597년 1월 초, 왜국의 대추장 히데요시는 더 이상 정치꾼들의 말장난에 휘말리기를 거부하고, 실패했던 조선 정벌을 기어코 성공시키기 위해, 제 2차 조.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14만 7500명이 투입되었다. 지난 1차 때에는 조선의 군함이 거함이어서 해전에서 이길 수 없었다는 왜장들의 변명을 받아들여, 이번에는 모든 함대를 조선 군함보다 훨씬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 우선 해군부터 공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철병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재차 침입해 오고 무려 15만의 왜병들이 새로 투입되자, 제 2차 대전이 발발했음을 감지한 이순신 제독은 즉각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1월 27일, 돌연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 권율로부터 왕명이 전달되어 왔다.

그런데 그 명령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1월 15일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로 쳐들어올 것이니 적장을 바다에서 잡으라는 것이다. 이 정보는 적장 유키나가가 그의 부장 요시라를 통해 권율에게 전해온 것을 조정에 보고해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이 명령에 대해 첫 째로 정보의 제공자가 적장이므로 신뢰할 수 없고 적의 책략일 수 있다는 것과 둘 째, 그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장 하나를 잡기 위해 조선 수군을 움직일 수는 없으며, 나라의 모든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총력전에서 적장 하나를 잡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순신 제독의 선진적인 작전 구상이나 전쟁관을 당시의 우둔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뜻을 전해들은 이연 왕은 자신의 명을 어겼으므로 ‘왕을 업신여긴 죄’, 그리고 출동을 거부했으므로 ‘적을 놓아 주어 이적 행위를 한 죄’를 씌워 1월 27일, 이순신을 전격 해임하고 서울로 압송하였다. 물론 이 사건의 배경에는 이순신을 질투한 원균 이하 그의 추종배들의 사주가 있었다.

구국의 영웅을 어리석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해서 해임하고 옥사에 가둔 선조는 후임 통제사로 원균을 임명하였다. 원균은 1597년 2월 6일 한산도에 부임하였다. 그때, 전임의 이순신으로부터 인수받은 품목은 전함 200척,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 대포 300문 등이었다.

원균은 전임 이순신 제독의 참모들을 무자비하게 파면 또는 강등시키고, 자신의 측근들을 주요 요직에 앉혔다. 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원균의 압제에 견디지 못한 많은 수군들이 군복을 벗어 던지고 탈영하기에 이르렀다. 또 15만의 왜군과 대치하고 비상 전시 상황을 망각한 듯, 원균은 매일 술과 계집을 작전 본부로 불러들였다. 자연히 군의 기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런 원균의 작태는 그를 철저히 옹호하며 지원했던 왕 이연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동안 천재적인 이순신의 용병술에 힘입어 연전연승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조정 대신들은 막연히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을 일방적으로 물리칠 수 있으리라 과신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바로 원균 자신이었다. 그는 수군의 병권을 쥐게 되면 일거에 적의 임시 소굴인 부산으로 쳐들어가 왜군을 일망타진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고, 왕 이연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원균의 이런 어린애 같은 헛소리를 그대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믿고, 바다에 나가 적장을 잡아오라는 유치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일단 그의 소원대로 삼군 통제사에 임명되자, 적을 소탕하러 출동하기는커녕 한산도 본영에 처박혀 태평성세라도 맞은 듯 매일같이 질탕하게 놀면서 주색잡기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원균의 출전
왜병들이 매일같이 부산과 대마도를 분주히 오가며 병참 수송을 하여 조선 상륙군을 증강시키고 있었으므로,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즉시 출동하여 왜군의 수송로를 바다에서 차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원균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결코 출전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그만큼 적은 증강되어 갈 뿐이었다.

도원수의 명령이 무시되자 권율은 이 사실을 선조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왕은 선전관 김식(金軾)을 파견하였다. 7월 1일, 마침내 수군 사령관 원균은 도원수 권율 앞으로 소환되었고, 이 자리에서 왕의 선전관 김식은 출전하라는 어명을 전했다.

7월 5일, 마침내 원균은 출전을 하였다. 군함과 협선을 합쳐서 무려 268척이나 되는 대함대였다. 오전 내내 준비를 마치고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산도의 두을포를 출항하였고, 오후 2시경에 3도 수군의 최대 요충지인 견내량을 통과하였다. 대낮에 조선 수군의 대함대가 움직이자 이를 숨어서 감시하던 왜의 척후병들은 놀라 상부에 보고하였다.

7월 5일 저녁 7시, 조선의 함대는 철천도의 외즐포에 도착하여 밤을 지샜다. 다음날 정오에 외즐포를 출발하였고, 2시쯤 영등포를 통과하여 옥포로 향하였다. 한편, 조선의 대함대가 출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일본 해군의 참모들은 멀리 안골포 남단에 있는 육망산(陸望山:해발 187m)에 올라가 조선의 기동 함대가 서서히 옥포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이순신이 쥐도 새로 모르게 이동하던 것에 비해, 대낮에 당당히 함대가 움직이는 것에 의아해 하면서도 부산을 공략하려 하는 것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안골포. 웅포. 가덕. 김해. 죽도 등지에 분산된 함선들을 모두 부산으로 집결시키도록 하고 결전을 준비하였다. 그 동안 이순신의 조선 함대 공포증에 시달려 온 일본 수군으로서는 원균의 비상식적인 작전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만반의 대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7월 7일 새벽 4시, 원균의 삼도 수군 연합 함대는 옥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였고, 약 3시간 후에는 가덕도 남방을 통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함대의 움직임은 봉수대 및 응봉(해발 358m)과 연대봉(해발 459m)에 설치되어 있는 왜병의 감시 초소에 의해 낱낱이 포착되고 있었다. 조선 해군 함대의 가덕도 남방 통과를 알리는 봉화가 하늘 높이 올랐고, 이를 발견한 부산의 왜장들은 무려 1천여 선의 대함대를 부산 방어를 위하여 절영도(영도)의 후면에 대기시켜 놓았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절영도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저녁 7시경이었다. 이때의 상황을 유성룡의 기록으로 살펴보자.
“균이 절영도에 이르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었으며,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정박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돌연 왜선들이 출현하자 원균은 곧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노를 저어 피곤에 지쳐있어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왜선은 우리가 피곤해지도록 유인했으며, 우리 함대는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밤이 깊어지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졌고, 우리 배는 표류하여 서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왜선과는 교전도 못해 본 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조선 함대는 제각기 그 곳을 빠져나와 본영이 있는 한산도를 향하여 막연하게 달아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 한 척의 왜선도 조선 함대를 추격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의 유인 작전에 걸려 전멸당한 경험이 있는 왜장들은 신임 제독 원균을 만나 또 무슨 예상 못한 함정이라도 있지 않을까 지극히 신중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해에 무지했던 한심한 원균은 날씨 변화와 사람의 한계를 무시한 멍청한 항해를 강행함으로써, 왜적들과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극도로 지쳐서 마치 패전한 것처럼 무려 20여 척의 함선을 일시에 잃고 말았던 것이다. 왜선의 추격을 예상하고 공포의 탈출극을 연출한 원균 함대가 겨우 가덕도에 도착하자, 극도로 목이 말랐던 병사들은 저마다 앞을 다투어 상륙하여 정신없이 물을 찾았다.

그러나 가덕도에는 왜장 도진의홍이 이끄는 살마군(薩摩軍)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뛰어든 비무장의 조선 수병들을 발견하고 무자비하게 도륙해 버렸다. 상륙하기 전에 정찰병 하나 파견할 줄 몰랐던 원균의 무지로 인해 무려 400여 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7월 9일 새벽 4시경, 원균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간신히 칠천량의 외즐포에 도착하였다. 왕의 명령을 받고 부산의 일본 함대를 격멸하겠다고 떠났던 원균 함대는 왜선과는 교전 한 번 못해 본 채 무려 20척의 함선과 400여 명의 부하들만 잃고 말았다. 마치 패잔병처럼 전의를 상실한 원균에겐 한산도 본영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균의 승첩 보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도원수 권율은 원균이 부산 문턱에서 되돌아왔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하였다. 권율은 원균을 급히 불러들여 명색이 삼군 통제사인 그를 묶어놓고 곤장을 때려 그의 비겁함을 꾸짖은 다음, 다시 부산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한산도 본영으로 돌아가려던 원균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부산으로 쳐들어갈 용기도 없어 매일 술만 퍼마시면서 자포자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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