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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국통사① 치우천황

  제2장 한웅시대-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②
배달한국 제3세 천황 우야고 한웅
[倍達桓國 第3世 天皇 右耶古 桓雄]

개천(開天) 182년(계해년) : B. C 3718년, 우야고 한웅은 신시 배달한국의 제3대 천황으로 즉위하여 국력신장의 막중한 책임을 이어받았다.

여기서 이때의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 신시 시절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冊曆)이 있었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 회(回)의 날엔 천신(天神), 2회의 날엔 월신(月神), 3회의 날엔 수신(水神), 4회의 날엔 화신(火神), 5회의 날엔 목신(木神), 6회의 날엔 금신(金神), 7회의 날엔 토신(土神)에 제(祭)를 지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인들의 일상생활 중에 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으며,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祭官)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수두[蘇塗]의 제관들은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선출된 단군(檀君)들이고, 이들 중 대천제(大天祭)를 모실 수 있는 고유권한을 가진 최고 어른이 대단군(大檀君) 한웅[桓雄]님이다. 즉 한웅님은 국가권력의 최고 통수권자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 임무를 겸임하는 제정일체(祭政一體)의 통치제도상 최고 수장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시(神市) 시절의 음악을 공수(貢壽, 供授), 혹은 두열(頭列)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축제가 열리면 모여서 삼신께 제사를 지내고, 무리를 지어 돌면서 합창을 하고 나라가 크게 번영하길 빌었다. 이것을 후한(後漢)의 반고(班固)가 지은 『백호통소의(白虎通疏義)』에서는 조리(朝離), 중국 『오경(五經)』의 『통전악지(通典樂志)』는 주리(侏離)라 하였는데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하늘에게 기원하고 그 순리에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라 했다.

축제(祝祭)의 뜻을 풀어보면, ‘축(祝)=빈다(祈願)’는 뜻과 ‘제(祭)=제사(祭祀)’를 합친 말로, 하늘을 향한 사람들의 집단적인 노래와 음악, 무용 등의 제사의식을 말한다. 이 의식은 지금까지도 남사당의 건립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기는 것과 우리의 생활터전을 이야기하고, 역대 조상 임검님들을 노래하며 나라의 태평성대를 비는 것이다. 또 축제에 참가한 여자들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온갖 액(厄)과 살(殺)을 불러 어르고 달래서 복을 비는 액풀이, 살풀이 등의 굿을 한다. 이 굿에서 불려지는 비나리1)의 가락 속에는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경외감과 유한(有限)한 삶의 한계를 용서와 화해로 극복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주1) 비나리
하늘에 전하는 인간의 노래.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은 천(天)·지(地)·인(人)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도(天道)에 바탕을 둔 신선도(神仙道)로 귀결된다. 『청학집(靑鶴集)』에 의하면, 한님(桓因)은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조종(祖宗)으로 그 뜻이 한웅[桓雄]과 단군(檀君) 대(代)를 거치며 계승되어 오다가 문박씨(文朴氏)에게 전승되었고, 문박씨는 단군의 도(道)를 향미산인(向彌山人) 영랑(永郞)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신선도는 약 1만년 전 신화적 존재인 국의 님시절부터 한웅과 단군 시절을 거쳐 신라(新羅) 4선(四仙)의 한 사람인 영랑에게 전승되었던 것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 하」편에, 한국의 한님이 한웅천황에게 “천도(天道)를 대각하여 종교를 세우고 자손만대에 홍범이 되게 하라.”고 교시하는 내용이 있고 “한웅천황이 삼신(三神)으로 종교를 창설하여 선계의 계율로써 업(業)을 삼고 무리를 모아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 법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가 단기전(檀紀前) 1565년 10월 3일이다. 오늘날의 개천절은 단군 시조의 쥬신제국 건국기념 행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커밝한 한웅 선조의 배달한국 개천 기념일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이날은 또 한웅께서 우리 민족을 위하여 천도(天道)를 대각하여 신선도를 베푼 기념일이기도 하다.

또『단군세기』를 보면 “개천(開天) 1565년(B. C 2333년) 10월 3일에 신인(神人) 왕검이 단목의 터에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다. 이것은 B. C 2333년 10월 3일에 개천절(開天節) 의식을 치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결국 그보다 1565년 전 10월 상달 3일에 커밝한 한웅님이 처음으로 나라를 열며 수두제천의식(三神 : 하느님)을 치룬 성도일(成道日)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신단실기』와 『단군교 부흥경략』을 보면, 단군신교가 전승되면서 삼한(옛 쥬신)에서는 천신교(天神敎), 가우리에서는 경천교(敬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밝해에서는 신종교(辰倧敎), 요(遼)와 김제국(金帝國)에서는 배천교(拜天敎) 그리고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 등으로 불리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한민족과 중화족은 제천의식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 한민족은 삼신(三神)을 일체로 보아 동시에 제사지내지만, 중화족의 교천제(郊天祭)는 오직 천신상제(天神上帝)에게만 제사지낸다.

이즈음 점차 나라의 질서가 바로 서고 백성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이 평안해지자 봉황(鳳凰)이 백아강(白牙岡)에 날아들었다. 설문(說文)에 “봉(鳳)은 신조(神鳥)로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온다.”고 했다. 봉의 암컷을 황(凰)이라 하는데, 봉황(鳳凰)이 나타나면 천하가 안녕하며 모든 새들이 그를 따른다고 했다. 예로부터 동양을 상징하는 동물 가운데 봉황은 동방의 동이족을 상징하였고, 용(龍)은 서방의 한(漢:중국)족들이 상징물로 삼았다. 봉황(鳳凰)은 태평성대(太平聖代)의 표상이며 봉황우비(鳳凰于飛)는 사이좋은 부부를 비유하는 말로 쓰거나 동방천자국(東方天子國)의 길상을 상징한다. 중국 삼황오제의 기록 중에 용(龍)보다 봉황(鳳凰)이 더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을 봉황으로 상징하는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그 맥을 잇고 있는데,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상징 문양이 무궁화를 봉황이 감싸고 있는 모습등이 그 예이다.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에, “나라가 안정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사방 멀리서부터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의 산꼭대기에는 사방에서 옮겨온 백성들이 담을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고 네 집이 한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총 수확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했다. 해마다 풍년이 들고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기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전했다.”라고 하여 바야흐로 이 시대가 바로 태평성대였음을 말해준다.

1977년 7월 14일, 중국의 『광명일보(光明日報)』는 황하유역의 대문구문명권(大汶口文明圈)에서 발견된 유물에 대한 방사선탄소(放射線炭素) 연대측정 결과를 보도하였다. 당란씨(唐蘭氏)의 주도로 진행된 측정 결과를 인용한 보도에 의하면, 대문구문명의 연대는 5785년 전(오차범위±100년)의 것이며 당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문자가 함께 출토된 이 문명의 주인공은 동이족인 소호(少昊)씨 계열로 은(殷)문명의 흔적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동이족이 중국의 동부를 지배했었던 역사적인 증거인 셈이다.

▼ 개천(開天) 281년(임인년)
B. C 3619년, 모사라 한웅께서 신시 배달한국의 제4세 천황 위에 즉위(卽位)하셨다.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전 (三聖紀全)』에 수록된 「신시역대기 (神市歷代記)」를 보면 제(帝)께서는 무려 107년간이나 임금의 자리에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연환경이 요즈음에 비하여 훨씬 더 조화로웠을 당시의 사람들이 무병장수했다는 기록들이 여러 고서에 종종 보이고 있다.

배달한국 제5세 천황 태우의 한웅
[倍達桓國 第5世 天皇 太虞義 桓雄]

개천(開天) 388년(기축년):B.C 3512년, 태우의 한웅께서 천황위에 즉위하셨다. 천황은 사람들에게 마음을 맑게 하고(淸心), 숨은 고르게 하며(調息), 정기를 보정(保精)하여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하늘의 술법을 가르쳐주었다.

천황은 12명의 황자를 두셨는데, 맏황자는 다음 황위의 계승권을 가진 황태자(皇太子) 다의발(多儀發)이고 계자(季子, 막내아들)는 태호라 하였다. 태호의 호는 복희(伏羲)로, 사람들은 흔히 ‘태호 복희’라 불렀는데, 이는 ‘큰 햇빛’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태호라는 이름은 양기가 크게 일어나서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뜻으로 설명해 음기 속에서 솟아난 봄의 태양이라고 하였다.

태호 복희(伏羲)

복희에 관한 이야기는 『밀기(密記)』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복희가 성년이 되어 그 첫번째의 벼슬로 우사부(雨師部) 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대체로 한 가문(家門)이 특정 벼슬을 독점적으로 세습하여 전문성을 유지한 듯하다. 『밀기』에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서 ‘우사’의 직(職)을 세습(世襲)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치우’직을 세습하여 온 치우천황가(家)의 경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복희가 우사부에 취임할 당시, 우사부에서는 이미 태우의 한웅님의 지시에 따라 장생구시(長生久視)2)의 술(術)을 완성하고 새로이 신시(神市)의 세(世)3)라는 역법(歷法)에 관한 연구가 진행중이었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이르기를, “태호 복희가 어느 날 꿈에 산신이 몸에 강령(降靈)하여 신통력을 얻고 만리를 통철(洞徹)한 후 삼신산(三神山)에 올라 하늘에 제사하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었는데 삼절삼련(三絶三連 : 세 번 이어지고 세 번은 끊어짐)하여 환위추리(換位推理 : 서로 위치를 바꾸어 추리해보는 것)하면 묘하게도 삼극(三極)이 변화를 일으키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하였다.”고 했다.
복희는 이미 선인(仙人)의 경지에 오른 발귀리(發貴理)와 동문(同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수두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기록하기를, “발귀리 선인4)이 이미 원(圓)은 일(一)로 무극(無極)이며, 방(方)은 이(二)로 반극(反極)이고, 각(角)은 삼(三)으로 태극(太極)으로서 원각방(圓角方)의 조화는 무궁무진하여 진명(眞命)의 근원이 되니 만법(萬法)이 여기에서 나온다.”고 하여 복희에 앞서 동양 철학의 근본이 되는 한역(桓易)의 이론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주2) 장생구시(長生久視)
일종의 참선 수련법으로 묵념(默念), 청심(淸心), 조식(調息), 보정(保精)을 통하여 장수(長壽)할 수 있는 술(術).

주3) 신시(神市)의 세(世)
첫째 날은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내고. 둘째 날은 월신(月神), 셋째 날은 수신(水神), 넷째 날은 화신(火神), 다섯째 날은 목신(木神), 여섯째 날은 금신(金神),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은 토신(土神)에게 각각 제사를 지냈다.

주4)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
기록상으로는 태호 복희와 동문수학 하였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복희의 스승으로 보인다. 태호 복희가 우사부의 장관으로 부임하였을 당시 발귀리 선인은 이미 장생구시의 술을 완성하고 있었다.

팔괘(八卦) : 양(陽)은 ( ), 음(陰)은 ( )의 기호로 여덟가지 기호를 만들어 천지만물을 대표한다.
『역경(易經)』에 팔괘는 사람의 신체 각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건(乾 )은 머리, 곤(坤 )은 배, 진(震 )은 발, 손(巽 )은 다리, 감(坎 )은 귀, 리(離 )는 눈, 간(艮 )은 손, 태(兌 )는 입이다.

『수두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한역(桓易)은 우사(雨師)의 관(官)에서 나왔다.”고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 물론 복희가 우사부의 장관직에 있었으므로 한역을 복희가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배경에 발귀리 선인(發貴理仙人) 같은 고명한 학자의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역의 깊은 철학적인 이론을 이 책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치우천황의 위대한 정복사업을 그리려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이다.

우사부에서는 육축(六畜)을 길렀다고도 했다. 육축이란 소, 말, 돼지, 개, 닭, 양 등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사직의 업무가 앞서 언급한 일 외에 또다른 임무로 목축사업을 관장했던 것 같다. 사실 목축에 관한 기록은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도 나오는데, 커밝한[居發桓] 한웅 천황께서 배달한국을 세우실 때,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위하여 주택을 건설할 것과 축사(畜舍)를 지어 소, 말, 개, 돼지, 수리, 호랑이 등을 기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우사부의 책무란 요즈음의 교육부와 산업자원부를 합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위의 기록 중에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그것은 소, 말, 돼지, 개는 가축이지만 수리나 호랑이 등은 식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수리는 탁월한 사냥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호랑이는 무슨 목적으로 길렀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이 책의 후반부, ‘치우천황의 중국 정복전쟁’ 중에 저절로 설명될 것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다.

이때 화산지역의 신흥 세력인 중원 토인의 나라 수인씨(燧人氏)족과 그곳에 머물던 동이족들 사이에 모종의 마찰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천하를 관장하던 태우의 한웅[太虞儀桓雄]은 그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태호 복희를 파견하여 수인씨의 난을 진압하도록 한다.

이때 화산지역의 신흥 세력인 중원 토인의 나라 수인씨(燧人氏)족과 그곳에 머물던 동이족들 사이에 모종의 마찰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천하를 관장하던 태우의 한웅[太虞儀桓雄]은 그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태호 복희를 파견하여 수인씨의 난을 진압하도록 한다.

복희씨(伏羲氏)의 화하족 정벌(華夏族征伐)

배달한국의 제1차 화하족 정벌군 사령관이 된 황자 태호 복희는 곧 천명(天命)을 받들고 군을 인솔하여 지금의 요양을 떠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타고 내려와서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청구(靑丘)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지방군들을 징집하여 군을 재편성한 후 낙랑(樂浪)을 경유하여 마침내 화산(華山)에 나타나니 반란을 일으킨 토착세력 수인(隧人)족과 유소(有巢)족의 족장들이 나란히 나와 사죄하고 같이 살기를 애걸하므로 복희씨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복희는 난을 진압한 후에도 군대를 유지하였으며,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총독이 되어 토인(土人 : 현지인)들의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참고로, 이때 등장하는 수인씨나 유소씨는 중화족을 의미하는 한족(漢族)이 아니다. 우리 민족을 뜻하는 동이의 ‘이(夷)’자는 갑골문에 보이는 것처럼 역사의 첫 무대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지만, 한족이라는 이름은 한(漢)나라 때 처음으로 나온다. 따라서 이때의 수인씨나 유소씨는 먼 옛날부터 중화지구에 살던 토착민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지 적응에 성공한 복희는 마침내 성씨를 풍성(風姓 : 아직은 성씨가 없었음)으로 하고, 족명은 봉씨족(鳳氏族)으로 하여 청구에 정착할 뜻을 굳혔다.

복희는 스스로 용사(龍師)가 되어 새 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신하들의 벼슬명을 모두 용(龍)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주양(朱襄)에게 비룡씨(飛龍氏)라는 벼슬을 내려 서계(書契)를 관장하게 하고, 호영(昊英)은 잠룡씨(潛龍氏)로 갑력(甲歷)을 만들게 하였다. 또 대정(大庭)은 커룡씨[居龍氏 : 건축부 장관], 혼돈(渾沌)은 항룡씨(降龍氏 : 치안부 장관), 음강(陰康)은 상룡씨(上龍氏 : 농산부 장관 ), 율륙(栗陸)은 수룡씨(水龍氏 : 산림과 수로 관장)로 임명했다. 그외에도 오관(五官)을 두었는데 춘관(春官)은 청룡씨(靑龍氏), 하관(夏官)은 적룡씨(赤龍氏), 추관(秋官)은 백룡씨(白龍氏), 동관(冬官)은 흑룡씨(黑龍氏), 중관(中官)은 황룡씨(黃龍氏)라 하였다.

왼쪽 그림은 태호 복희(伏羲)가 누이인 여와[女휶]와 결혼하여 서로 교접중인 모습이다. 옛날에는 한번 획득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 간의 결혼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져온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그림에서 복희는 손에 각자를, 여와는 컴퍼스를 들고 있다. 머리 위엔 태양이 떠있고 그 안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있다. 뱀의 형상으로 된 몸의 중간 부분에 달이 있고 그 안에 옥토끼와 계수나무, 두꺼비가 있고 주위에는 별들이 흰 구름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본 전설의 내용이고 인류 시조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났다고 믿는 사상의 표현이다. 복희의 손에 들려 있는 각자는 그가 땅을 관리하는 사람이란 상징이며, 여와의 손에는 둥근 하늘을 관리한다는 의미로 둥근 자(컴퍼스)가 들려 있다. 그러나 「복희고(伏羲考)」에 따르면, 복희와 여와가 서로 부부 사이로 음양을 대표하도록 만든 것은 동한시대 이후의 현상이라고 한다. 서한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대부분 복희만 홀로 언급되고 있다.

중국측의 기록을 보면, 복희는 중국인의 시조이며 더 나아가 인류의 시조라고 한다. 중국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태초에 반고(盤古)가 있어 천지를 창조하였고 이어 복희가 천계로부터 하강하여 세상을 다스렸는데 아직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여동생 여와와 결혼하여 인류를 창조하였다. 홀로 고독했던 여와는 연못가에 앉아 황토 흙으로 자신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만들어 땅위에 내려놓았는데 아이가 곧 살아나서 뛰어다녔다. 여와는 계속해서 많은 수의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그들에게 서로 결혼하여 번식하는 법을 가르쳤고, 한편 복희는 사람들에게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또 들짐승을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좌측 이미지는 중국인들이 그린 복희씨의 또 다른 모습이다. 손에 음양과 팔괘의 문양을 들고 있다. 한역이 아닌 주역의 창시자임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복희의 나라에 관해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복희는 동방의 풍이족으로 중원으로 진출하여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천자가 되었다. 복희는 팔괘(八卦)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었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인륜을 밝혔다. 복희씨의 뒤를 이어 여와씨(女휶氏)와 공공씨(工共氏)가 왕통을 이어가다가, 제15대 무회씨(無懷氏) 대에 이르러 신농씨(神農氏)의 강씨(姜氏)에게 왕권을 빼앗겼다. 그후 곡부(曲阜)로 도읍을 옮겨 다시 8대를 전하다가 유망(楡罔)에 이르러 토인을 대표하는 헌원에 의하여 멸망한다. 이 사건이 바로 탁록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 이야기는 전능한 신 여호와(Jehovah)가 사람을 흙으로 빚어 아담(Adam)과 이브(Eve)를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구약성경(Old Testament)』5) 창세기의 내용과 닮은꼴이어서 흥미롭다. 특히 ‘여와’와 서양신 ‘여호와’는 그 이름마저 비슷해서 이 양자간에 아직은 설명할 수 없지만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과 같은 중국측의 전설에 비하여 우리 『한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신화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자인 반고가, 국의 말기에 커밝한 환웅님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방의 신천지를 찾아 떠난 후, 남은 백성들의 일부를 데리고 현 중국의 서방 쪽으로 내려가 그곳의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정착하였음은 『한국 105대 천황존영집(天皇尊影集)』을 읽은 분들은 벌써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배달국의 서변 총독인 복희와 그의 대를 이은 여와를 모두 천계에서 하강한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일본인들이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사람들을 천계에서 하강하였다고 고사기(古事紀)에 기록하여 놓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스스로를 국(天界)으로 자처하며 그 백성들을 천손족으로 부르는 우리 민족의 장쾌한 기개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중국의 역사책에 소개된 여와의 모습이다. 머리는 여인이고 몸은 뱀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5) 기독교의 구약성경
기독교의 구약성경 『Old Testament』에는 전지전능한 신을‘Jehovah God(여호와 신)’으로 호칭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 민족의 신칭(神稱)인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없다. ‘하느님’은 지구상 어느 민족도 흉내낼 수 없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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