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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4장 탁록대첩-청구국(靑丘國) ②
최후의 승부전

헌원이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이번 싸움에 임하고 있음을 간파한 치우천황은 이번 기회에 헌원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의 기를 완전히 꺾어 두번 다시 반란을 꾀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천황은 즉시 참전중인 형제종당(兄弟宗黨) 전원과 각 군단의 장군들을 모두 소집하여 새로 구상한 전법에 대하여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한동안 중군(中軍)을 이끌었던 천황은 다시 전면에 나서 9군(九軍)을 동원하고, 어림군(御臨軍)을 제외한 8군을 2군씩 나누어 병진을 새롭게 갖춘 다음 네 방향으로 헌원군을 포위하며 천천히 그리고 엄중하게 몰아갔다. 전쟁의 신장(神將) 치우천황의 천군 역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모든 것이 신중하면서도 빈틈이 없었다. 헌원 역시 최전방에 역목(力牧) 대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을 세우고 천황군의 선봉 창기병(槍騎兵)의 공격을 맞받아 칠 생각이었다. 제2선에 창군(槍軍)과 궁군(弓軍)을 배치하여 신황(神皇) 장군이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본진을 이끌고 중군에 포진한 후 천황군과 총력전을 펼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천황이 스스로 진의 최선봉에 서자 그동안 오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은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천군의 위용과 위엄이 되살아난 것이다. 천황의 대장군기가 높이 올랐다. 그리고 총공격을 알리는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요란한 폭죽이 천지를 진동했다. 결사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천황군은 빠른 기병을 앞세우고 무서운 기세로 돌격해 들어가더니 어느새 헌원군의 팔괘진을 두 쪽으로 가르며 겹겹이 포위하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며 허둥대는 헌원의 주력군 일진(一陣)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니, 그동안 헌원군의 치솟았던 기세가 한순간에 꺾이며 또 다시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말았다. 전장에서 한번 꺾인 기세는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전쟁터는 대살육전으로 변했고 목숨을 구걸하는 헌원군의 비명 속에 전쟁터는 피로 물들어 갔다.

이번의 결전을 끝으로 헌원은 천황에게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철저히 깨우치게 되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지금이라도 내 한 목숨 깨끗하게 던지고 천황의 자비를 빌어 화족들 만이라도 살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침내 헌원은 항복의 백기를 올렸다.
헌원측에서 항복을 뜻하는 흰색의 기가 오르면서 처참했던 대살륙전도 끝이 났다. 치우천황의 완벽한 승리였다. 천황의 병사들은 승리의 환호를 올리며 힘겹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승리의 주역인 천황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 대신 고뇌의 흔적이 보였다. 이번 전쟁의 참패로 화족들은 한동안 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승복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또다시 자치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꾀할 것이 분명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태시기」는 이때의 상황을 “천황이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기운이 왕성하여 그 백성들이 서로 단결하니 가볍게 모두를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섭리일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마침내 천황은 헌원의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중화인들이 제나라 땅에서 독립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뿐인데 그들을 다 죽일 수 없는 노릇이라면 그들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치권 정도는 인정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국 천황 역시 생각을 바꾸어 이 문제를 전쟁이 아닌 정치적 협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황은 죽음을 기다리며 최후를 준비하고 있는 헌원의 모습을 보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전쟁은 이것으로 끝난 셈이 아닌가. 마침내 천황은 대장기를 내리게 하였다. 한편 죽음의 문턱에서 천황의 대장기가 내려지며 구명의 신호를 받은 헌원은 천황의 자비로움에 감복하여 항복의 깃발을 곧추세우고 천황 앞에 나아가 중화족의 운명을 맡기고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이리하여 배달족의 식민통치에 항의하며 화족들의 독립성취라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헌원의 반란은 무려 10년 동안 70여회의 대소(大小)전쟁을 치루면서 마침내 치우천황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종전(終戰)

배달 한민족과 헌원이 이끄는 중화 부족연맹체가 총력을 기울여 싸웠던 10년 전쟁이 끝나던 날, 헌원과 그의 제후들이 모두 천황 앞에 나와 제 나라의 국권을 바치는 ‘옥쇄 헌상식’이 거행되었다. 항장 헌원과 그의 제후들은 천황에게 용서를 빌고는 있었지만 사형이나 중벌이 내려질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황은 뜻밖의 판결을 내렸다. 그것은 항복한 모든 제후들의 벼슬을 그대로 인정해 준 것이다. 특히 반란의 주범으로 사형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던 헌원에게는 배달한국 오제(五帝)의 벼슬 중 최고위 장관(長官)에 해당하는 황제(黃帝)의 벼슬을 내렸다. 황제의 벼슬이면 중화족 전체를 다스리는 대총독(大總督)으로, 앞으로 중화족을 잘 다스려 천황의 충성스런 신하로 잘 처신하라는 뜻이 담긴 파격적인 임명이었다. 이리하여 헌원은 ‘반적(反敵)’이란 오명을 벗고 다시 배달한국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 헌원과 반란에 가담했던 제후들이 항복의 예를 갖추기 위해 옥새를 바치고 있다.

지금까지 신농이 적제(赤帝, 중국측에서는 炎帝)의 벼슬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중화의 대총독 자리에 황제의 벼슬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헌원은 천황으로부터 목숨을 보장받았을 뿐 아니라, 배달제국(倍達帝國) 오제(五帝) 중에서 수석 제(帝)에 해당하는 황제(黃帝)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때부터 헌원은 황제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내려진 황제라는 벼슬명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의 후손들로 하여금 ‘황(黃)’대신 황제(皇帝)로 쓰이며 임금의 호칭으로 굳어지게 된다.

쥬신제국의 오제(五帝) 벼슬은 황제(黃帝-大加 : 中央)를 수석장관으로 현제(玄帝-黑帝-猪加 : 北部), 적제(赤帝-狗加 : 南部), 청제(靑帝-馬加 : 部), 백제(白帝-牛加 : 西部)가 있었다. 제국을 삼칸[三汗] 아래 전 국토를 5부로 나누고 각 지방을 다스리게 하는 조직이다. 이들 5부의 대가들은 청(靑), 적(赤), 백(白), 현(玄)의 순서로 3년마다 그 임지를 바꾸어 맡는데 12년이 되면 제위에서 은퇴하는 매우 선진적인 공화제도(共和制度)였다.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수석장관에 해당하는 황제(黃帝)의 벼슬을 내려준 것은 배달한국의 수석 제후국으로 대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까지 오제의 벼슬제도는 쥬신제국의 제도로만 알려졌지만 사실 이 제도는 배달한국 시절부터 전해오던 제도였다.

치우천황은 반란군의 두목으로부터 충성을 맹세받고 그를 반란지역의 황제(黃帝)로 임명함으로써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서변(현 중국의 중원)의 광활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식민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헌원(軒轅)이 배달제국(倍達帝國)의 황제 벼슬을 받게 됨으로써 신농이 다스렸던 유웅국(有熊國)과 복희국(伏羲國)의 통일세력은 황제 헌원의 아들이며 염제 신농(赤帝神農)의 외손자인 소호 금천(少?金天, B. C 2474~2468년)1)에게 이어진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소호 금천이 황제 위에 오를 때 궁전에 한 마리의 봉황이 날아들었다고 했다. 새족으로 상징되고 있는 동이가 황권을 장악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소호 금천의 조정은 새의 이름을 빌려 백관신료를 정하였는데 제비[燕子], 백로(白鷺), 청조(靑鳥), 금계(錦鷄)2) 등으로 일년 4계를 관장하게 하고 봉황(鳳凰)으로 총수상이 되게 하였다.

※ 치우천황의 배달한국에 맞선 토족들과 헌원은 동이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효를 바탕으로 전투 때마다 패배하면서도 끈질기게 저항을 해왔다.
전투에서 지면 도망가고, 지친 천황군이 추격을 멈추면 다시 도전해 오는 등 10년간에 걸쳐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면서 헌원군과 토족들도 천황군의 무기와 갑옷, 전술을 본 따 발전을 거듭했고 여기에 끊이지 않고 수급이 가능한 인원이 있었으므로 희망을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했던 전투에서조차 처참하게 패배하자 결국 배달한국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치우천황은 동이족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토족들을 모두 죽일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들의 수장으로 헌원을 삼아 그들이 원했던 독립은 아니더라도 자치권을 주는 방법으로 민심을 다스리기로 한 것이다. 이 반란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토족의 근간을 이루던 하족과 화산족 등은 하나로 결집해 현재 중국의 근간을 이루는 한(漢)족의 원형이 되었다.

천황의 전후(戰後) 처리-청구국

천황은 본국으로 개선하기에 앞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정리하는 몇 가지의 개편작업을 하였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탁록(?鹿)을 포함한 지금의 산동일대[卞朝鮮]에 청구국(靑丘國)3)을 세우고 천황의 일족 치우씨(蚩尤氏)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당시는 배달한국(倍達桓國)의 천도(天都)인 신시(神市) 아사달(阿斯達), 동경(東京) 펴라[平壤, 遼陽] 그리고 남경(南京)인 청구(靑丘)가 있었다. 천황이 서울로 옮긴 사실은 『삼성기(三聖紀)』 하권의 「신시역사기(神市歷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번 전쟁에서 천황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고 총력을 다한 남방의 묘족(苗族)들에게는 그동안 식민지역의 지위를 격상시켜 자치권을 인정하고 치우씨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하는 한편, 견융(犬戎)의 오(吳)장군으로 고신(高辛)을 정복하도록 하였다. 고신은 황제의 증손이며 극(極)의 아들인데, 이때 반란의 뜻을 세우고 수덕(水德)의 박(뛰)에 도읍하고 연호를 기서(己西)라 하였으나, 치우천황의 천하 질서회복의 계획에 따라 결국 멸망되었다.

본시 청구(靑丘)는 치우천황의 나라다. 청구의 청(靑)은 동방을 의미하고, 구(丘)는 땅을 뜻하므로 곧 ‘동방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아 청구(산동반도)가 그들의 동쪽에 있으므로 사서에 청구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청구는 지금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걸쳐 있었는데 이들 두 반도를 연결하는 묘도열도가 옛날에는 섬도 더 크고 많았기 때문에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배로 하루내에 만주와 산동을 연결하는 효율적인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최근에 와서 많은 이곳의 섬들이 가라앉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1) 소호 금천
소호 금천의 어머니는 적제 신농의 딸 뉘조(꾸祖)이다. 『중국통사』는 소호금천을 ‘동이지군(동이족의 왕)’이라고 확실하게 쓰고 있다.

2) 금계
우리말 가운데 관료의 직을 ‘벼슬’이라 하는데 이는 본시 금계(錦鷄, 닭)의 벼슬을 말한다.

3) 청구
중국의 옛 사람들은 그들의 문헌을 통하여 청구를 신선(神仙)들이 사는 세계로, 마치 유토피아를 그리듯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명하신 자부 선인 같은 분이 그의 말년을 청구에서 보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긴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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