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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2장 한웅시대-황제(黃帝) ①
황제(黃帝)

중국인의 시조로 추앙되는 황제 헌원(軒轅)은
봉황을 숭상하던 동이족 출신으로
치우천황으로부터 중원의 자치정부 수장격인 황제로 임명되었다.

중국인의 시조 황제(黃帝) 헌원(軒轅)

마왕퇴(馬王堆) 무덤의 출토품들 중에는 견(絹 : 명주), 금(錦 : 다색문양의 비단), 나사(羅紗 : 얇고 가벼운 비단), 기(綺 : 문양비단) 등 그동안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각종 비단제품들이 포함되어 있고, 직(織), 수(繡), 회(繪) 등의 다양한 무늬들의 제작기법들이 선보였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소사단의(素沙蟬衣)이다. 이 옷은 소매길이 190Cm에 몸길이는 128Cm나 되는데도 무게가 겨우 48g정도로, 마치 매미의 허물처럼 얇다.

고서(古書)에 이 옷을 “얇기는 매미 날개 같고(薄如蟬翼), 가볍기는 연기 같다(輕若煙霧).”라고 했는데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이 증명된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한국의 학계에서는 삼황시대(三皇時代)의 역사를 모두 전설시대의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로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삼황시대를 전설시대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3년, 호남성 마왕퇴(馬王堆)의 제3호분에서 B. C 2144년에 기록한 『황제사경』이 출토되면서 그동안의 황제 기록이 전설이 아닌 엄연한 역사 시대의 기록임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이다. 만약 황제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면 황제가 싸웠던 우리의 치우천황 역시 사실이 아닐 수 없고 동시대에 같은 역학관계에 있던 염제 신농 역시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히 기술해놓았던 우리의 『한단고기』 등의 기록 역시 당연히 진실임이 입증된 것이며 한민족사 발전에 장애가 되어 왔던 『한단고기』의 위서(僞書) 시비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황제사경』을 검토했던 중국학자들은 무려 7000~8000년 전의 인류 문명수준에 비교하여 겨우 5000년 전의 사건들을 전설로 취급해왔던 그동안의 학술적인 연구태도를 스스로 반성하고 『국어』, 『좌전』의 기록들이 틀렸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우측에 보이는 비단옷은 마왕퇴의 1호묘에서 출토된 ‘T’자형 백화도이다. 백화는 3장의 견직물을 합쳐서 만들었는데 가운데 몸통 부분은 이음새 없이 짜여 있다. 옷의 상단 부분은 천상의 풍경으로 해(日)와 달(月), 촉용(燭龍) 그리고 천상의 문신(門神)이다. 하단 부분은 제후(諸侯)의 도장(印)인 교룡(交龍)과 제사(祭祀)를 모시는 문양이 있다. 이 옷의 정교함을 따로 소개하는 것은, 이 옷의 제작년도가 이미 2500년을 넘었고, 또 실크의 제작기술이 무려 5000년 전으로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아직도 치우천황의 시대를 원시시대로만 보려는 시각을 바꾸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황제(黃帝) 헌원(軒轅)은 훗날 화산(華山)족과 화하(華夏)족을 선동하여 연합군을 형성한 후, 배달한국의 오랜 식민통치를 종식시킬 목적으로 본국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극렬히 저항한다. 그러나 불세출의 대영웅 치우천황이 진두지휘한 반란 진압군에 의하여 토멸되고 만다.

한편, 치우천황의 입장에서도 비록 10여년간에 걸친 토벌전쟁을 승리로는 이끌었지만 토인들과의 계속되는 분란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정착시키는 것이 불필요한 국력의 낭비를 막는 데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 정책적인 결정을 한다. 이미 항복한 반군의 수괴 헌원을 회유하고 황제(黃帝)의 벼슬을 주어 화하족의 총독에 임명한 것이다. 이때 헌원이 받은 벼슬 ‘황제’는 배달한국이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분권적 통치제도로써 5제(五帝, 칸), 즉 백제(白帝), 흑제(黑帝), 청제(靑帝), 현제(玄帝), 황제(黃帝)의 다섯 벼슬 중 수석 제후(諸侯)를 말하는 것이다.

황제의 ‘황(黃)’자는 배달한국의 수석제후라는 의미 외에도 누런 흙탕물이 굽이쳐 흐르는 황하(黃河)변을 다스린다는 뜻도 담겨 있다. 옛 기록에 황제를 ‘황천후토(黃天后土)’라 했는데 ‘후토’의 뜻이 지모(地母)이다.
또 황제의 ‘제(帝)’자는 원래 ‘지(地)’자로 누런 땅(黃地)을 뜻한다. 그러나 처음의 ‘지(地)’ 자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 ‘제(帝)’자로 변한다.

중국인이 조종(祖宗)으로 모시고 있는 황제는 황토지(黃土地)의 화신(化身)이다. 예로부터 중국인들[華夏族]은 황토에서 태어나 황토의 곡물을 먹고, 황토 물을 마시며 살다가 죽으면 황천(黃泉)으로 간다고 믿었다. 이것은 우리 동이 배달민족이 죽으면 제일 먼 하늘인 구천(九天)으로 간다고 믿는 것과는 분명 다른 믿음이다.

황제(黃帝)의 후손들은 붉은 황토 빛의 기와를 올린 궁전에서 황토색의 옷을 입고 가슴에는 누에가 변한 가상의 동물 용(龍)의 모습을 수놓아 용포(龍袍)를 만들어 입고 화하족을 다스렸다.
그러나 먼 훗날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역전되자 동이족의 왕들이 황토색의 용포를 입고 중국인들의 오랜 습성을 흉내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즉 용포는 황금색(黃金色)이 아닌 황토색(黃土色)으로, 이는 황제를 조종으로 삼는 중국인들의 문화적 상징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천(司馬遷)이 자신이 저술한 『사기(史記)』에 신농과 헌원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기』에 의하면, 황제는 소전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다. 또 황제 헌원 유웅씨(有熊氏)로부터 중국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웅씨는 곧 유웅국(有熊國, 有雄國)으로서 배달한국의 황실종친(皇室宗親)인 ‘한웅(桓雄)’씨족으로 우가(牛加)의 장관 소전(少典)씨의 나라다.

사마천의 곡필(曲筆)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염제(炎帝, 赤帝) 신농의 덕(德)이 쇠약하여 황제가 이를 대신하였다.”고 하였다. 신농의 힘이 쇠(衰)하여졌다면 모르겠지만, 덕이 쇠하였다고 하는 것은 백성들을 위한 신농의 공적에 비추어 『사기』의 기록이 사마천의 독선적 사고에 따라 극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미 가우리족으로 확인된 소전가의 신농씨보다는 동이의 색깔이 덜한 황제를 중국역사의 시조로 만들려는 의도적인 곡필이 아닐 수 없다.
또 황제 이전에 이미 중국을 다스리던 동이족 염제[赤帝] 신농의 존재를 그 자신이 증언하면서도, 황제 이전은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는 꼴이어서, 그가 사기를 기술한 목적이 확실하게 보인다.

아래의 그림은 황제(黃帝) 가문의 상징이었던 누에의 문양이 차츰 용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중국을 상징하는 용의 참모습이 누에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헌원의 흥기(軒轅의 興起)

『삼한비기(三韓秘記)』에 의하면, “때마침 고명하신 나라의 대선인 자부(紫府) 선생이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완성하여 천황께 바쳤다. 자부 선생은 복희와 함께 공부했던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이다.
선생은 또 해(日)와 달(月)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칠성력의 시작이다. 임검이 기뻐하며 자부 선인을 청구의 대풍산(大風山)에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살게 하였다.”

귀양지 헌구(軒丘) 일대의 민심을 장악하고 새로운 세력가로 자리잡는 데 성공한 헌원은 구가(狗加) 출신의 막강한 신농(神農) 적제(赤帝, 중국에선 炎帝)의 위협에 직면하여 묘책을 꾀하던 중 신농측과 누비결혼을 정략적으로 성사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신농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적제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근신하던 헌원은 천하의 주인인 치우천황을 찾아뵙고 조공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기 위해 천도(天都, 神市)를 향해 길을 나섰다. 헌원의 천도방문 여정(旅程)은 동쪽의 가우리(九黎) 지방인 청구(靑丘)를 지나 밝해의 묘도열도를 건넌 후 다시 요동반도를 따라 천도에 이르는 것이었다. 청구를 지나던 헌원은 우연히 대풍산(大風山, 지금의 동래) 삼청궁에 그 유명한 가우리의 자부 선생이 내려와 계시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 사실을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진인을 만나다(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眞人).”라고 기록하여 청구의 삼청궁에 있는 자부 선생을 진인(眞人) 즉 신선(神仙)이라 하였다. 헌원은 이때 자부 선생의 문하에 들어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전수받고 비로소 우리의 신교 문화를 깨우친 후 이를 다시 풀어 『음부경(陰符經)』을 펴냈다.
이 책은 원래 세편[三篇]의 녹서(鹿書)로 썼는데 그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후세 사람들이 주석을 단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황제가 썼다고 알려진 『음부경(陰符經)』도 『삼황내문경』의 뜻을 풀어쓴 것인데 이것이 후세에 전수되면서 도교(道敎)의 기초가 되었다.

자부(紫府) 선생은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이다. 일찍이 해와 달을 측정하고 오행의 수리(五行之數理)를 추고(推考)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지었다.
뒤에 창기소(蒼其蘇)가 그 법을 다시 연(演)하여 오행치수법을 밝혔는데 이것 역시 신시(神市)의 황부(黃部)에서 얻어온 것이다.

『삼성기 하』 편의 기록 중에 “헌원이 자부 선생을 찾아뵙고 『삼황내문경』을 받았다. 이밖에도 창힐(倉詰), 공공(共工), 대요(大撓) 등의 무리들도 자부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하여 자부 선생이 동이(東夷)의 문화와 철학을 중국에 전수하여 큰 영향을 끼쳤음을 전하고 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와 국어(國語), 진어(晋語)는, “황제(黃帝)는 하남성 신정(新鄭)에 자리한 유웅(有熊)국의 왕 소전(少典)의 아들로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며 산동성 곡부(曲阜)에서 자라난 정통 이족(夷族)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기록들은 황제를 중국의 시조(始祖)로 모시면서도 황제가 사실은 정통(正統) 이족(夷族)으로 우리 동이(東夷)족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중국 최초의 임금이 동이족인 신농이고, 황제마저 동이족이라면 화족들의 선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결국 중국 상고 시대의 역사는 모두 동이족의 서한사(西韓史)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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