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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4장 탁록대첩-청구국(靑丘國) ①
청구국(靑丘國)

치우천황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탁록과 산동 일대에
‘청구국’을 세우고 치우씨가 다스리게 하였다.

끝나지 않은 전쟁

탁록전쟁(?鹿戰爭)에서 참담한 수모를 당한 헌원은 당분간 재기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전(全) 화족의 거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반드시 천황군을 격파하여 화족들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천황군을 맞아 단 세번의 결전 끝에 병력의 태반을 잃고 그나마 살아남은 병사들도 거의가 만신창이로 부상을 당한 상태였던 것이다.
더 이상 힘이나 전략으로 천황을 당할 수 없음을 깨달은 헌원은 겁먹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천황군과의 결전을 피하며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까지의 전쟁 결과 기주(冀州)와 연주(찐州), 회대(淮垈)의 땅이 모조리 치우천황에게 넘어갔다. 천황은 탁록의 성을 재건하고 궁궐을 높이 지으니 그동안 헌원에게 속해 있던 많은 제후들이 칭신(稱臣)하고 입공(入貢)하였다.

『대변경(大辯經)』이 이르기를, “대개 당시 서토(西土)의 사람들이 헛되이 시석(矢石 : 화살과 돌)의 힘만 믿고 개갑(鎧甲 : 갑옷)의 용법과 가치를 알지 못하였으며, 치우천황의 법력(法力)이 그토록 고강(高强)함에 놀라 담은 서늘해지고 두려움이 앞서 감히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하고 싸움마다 참패를 면할 수 없었다.”라고 한탄하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동안 천황은 탁록을 떠나 청구(靑丘)에 머물면서 서토를 안전하게 다스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청구를 천황가의 칙령(勅領)으로 삼을 것을 구상하였다. 결전이 있은 지 어느새 한 해가 지났다. 서토(西土)의 반란사건은 이로써 모두 진정된 듯 보였다. 천황은 비로소 갑주(甲?)의 끈을 풀고 새로 관경(管境)으로 편입된 지역을 다스릴 총독 임명에 착수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방으로 헌원의 행방을 뒤쫓던 정탐병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처참하게 쫓겨 갔던 헌원이 다시금 재기하여 힘을 기르고 있다는 놀라운 정보였다.

탁록전쟁의 참패가 자신의 경거망동 때문이라고 자책하던 헌원은 어떻게든 재기하여 천황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흩어졌던 옛 장수들을 다시 소집하고 군사를 모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헌원은 아직 천황에게 소속되어 있지 않은 부족동맹(部族聯盟)의 영수(領袖)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난번 천황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병력을 잃은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사과하고 다시 한번 힘을 결집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헌원의 용기있는 태도가 부족 영수들을 움직여 어느덧 의기투합한 세력이 하나둘 불어나더니 또다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천황은 토인(土人)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헌원의 반란이 아직 완전히 진압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죽었던 헌원이 다시 살아나 움직인다면 한시 바삐 그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천황은 즉시 각 지방으로 파견한 군사를 다시 청구로 소환하여 원정군단을 재편성하고 헌원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한 출정(出征) 준비를 마쳤다. 차츰 헌원의 반군 세력은 두각을 나타내며 도처에서 천황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매번 같은 식으로 전개되었다. 탁록대전의 전설을 전해 들은 헌원의 신병들은 천황군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의 마음으로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고 진중한 자세로 천황군을 상대했다. 이처럼 달라진 헌원군의 움직임에 전장(戰場)의 지형과 기상의 변화를 교묘히 이용하며 염초에 의한 안개로 적을 혼란시킨 후 제압하는 것이 천황의 기본 전술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천황군이 전진을 멈추면 공격해오고 천황군이 추격을 하면 도망칠 궁리부터 하면서도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한 싸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초조한 천황군은 더욱 세차게 헌원군을 몰아붙였는데 헌원은 싸움마다 패전하여 쫓기면서도 좀처럼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지남거(指南車)

매 전투마다 치우천황이 피우는 안개로 인하여 번번이 방향을 잃고 위험에 빠졌던 헌원에게 천금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헌원의 제후 가운데 하나인 풍후(風后)가 두기법(斗機法:별자리 찾는 법)을 이용하여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헌원군은 천황군에 쫓기면서도 지남거를 이용하여 안개 속에서도 실수 없이 탈출구를 찾아 희생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지남거는 헌원의 신하 ‘풍후’가 북두성을 찾는 원리로 자침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수레 위의 목상이 손가락을 펴 항상 남쪽만 가리키도록 하여 방위를 분간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대만의 역사학자 원가(袁珂)는 그의 저서 『중국고대신화(中國古代神話)』에서 “고적에 의하면 치우는 72명의 형제가 있었다. 황제가 여러 차례 협상하려 하였으나 치우가 거절하였다. 치우는 막강한 군세를 가지고 있어서 황제군은 전투마다 참패를 거듭하였다. 한번은 황제의 군대가 치우천황군의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는데 때마침 풍후(風后)가 만든 지남거(指南車)가 계속 남쪽을 가리키므로 치우가 뿌려놓은 유황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지남거(指南車)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황제가 지남거를 이용하여 오히려 치우를 죽였다고 쓰고 있다.

▼ 치우천황의 연막공격을 받고 있는 헌원군이 지남거에 의존하여 탈출구를 찾고 있다.

중국의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자기 편인 황제 헌원이 최종 승리자라고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황제가 질 수밖에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변명하고 있다. 치우천황이 막강한 신장이기 때문에 황제는 계속 패전할 수 밖에 없다거나, 치우를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모두 사람이 아니고 자갈을 먹고 안개를 토해내는 괴물들이라고 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즈음 헌원에게도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헌원은 천황군에게 쫓겨 토구(土丘)라는 곳에서 위기를 맞았지만 토구의 부족장인 응룡(應龍)1)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헌원편에 서게 된 응룡은 토구의 군사를 징집하고, 치우천황군을 본받아 무비(武備)를 충실히 하더니, 다시 현녀(玄女)의 전법을 모방하여 그 대응책을 마련하였다. 응룡이 참가하자 헌원군의 기세는 급전하여 탁록대전의 악몽을 벗어던지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새롭게 달라진 헌원군의 위력은 얼마 후 곧 그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연전연승에 취해 적군의 정보 수집에 소홀했던 천군(天軍)의 용장 과보(㎀父)가 패주하는 헌원의 잔병들을 수색하던 중 뜻밖에도 적장 응룡의 매복전술에 걸려 위기에 처하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후군의 형요(形夭) 장군이 과보를 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용맹만 믿고 뛰어들었다가 그 역시 응룡의 매복군에 걸려 수십발의 화살을 맞고 둘 다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의 사건을 두고 원가(袁珂)가 말하기를, “과보가 불행하게도 응룡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여 놓았다.
이리하여 전쟁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오던 것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과보와 형요를 죽인 헌원군은 사기가 치솟았다. 치우군이 호군(虎軍)과 견군(犬軍)을 이용했던 전법을 본받아 화산지구의 곰을 잡아들여 조련시킨 다음 웅군(熊軍)을 만들어 작전에 투입하였다. 이때 잠복한 헌원군을 수색하던 천황군의 선봉장은 치우건(蚩尤虔)이었는데 그 역시 과보와 형요의 불행한 과오를 잊어버리고 적정을 미리 살피는 일을 게을리하다가 또 다시 적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치우건은 급히 탈출을 시도했으나 주위를 겹겹이 에워싼 수백 마리의 훈련된 곰(熊軍)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구하기에 급급했다.

연이은 승리에 감격한 헌원은 승전의 의미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그 산의 이름을 ‘복우산(伏牛山)’이라고 명명하였으니, 이는 드디어 ‘우양족(牛羊族)을 이겨볼 수 있었다’는 뜻으로 지금까지도 하남 숭현(嵩縣)에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응룡의 매복작전으로 천군의 맹수 같던 두 장군 과보와 형요를 죽인 사건과 복우산 전투의 승리는 확실히 헌원군의 사기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뜻밖에 강력한 헌원군의 반격에 놀란 천황은 헌원의 군중에 새로운 맹장이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천군의 깃발만 보아도 도망치고 진군의 북소리에 놀라 오금을 저리던 헌원군이 아니었다.
헌원군이 변했다. 헌원군은 그동안 천황군의 갑옷 등 군장비(軍裝備)도 모방하여 착용하고 있었고, 열등하던 병장기의 격차도 현저하게 좁혀졌다. 게다가 그동안 치우천황의 선진적인 군작전을 연구하여 팔괘진(八卦陣) 같은 어려운 진법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적진의 진법을 유심히 관찰한 치우천황은 계속된 패전의 경험을 교훈삼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헌원의 진면목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전쟁다운 전쟁을 한번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은 적을 격파하기 위한 새로운 작전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 응룡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 의하면, “장군 과보(㎀父)는 신농가(神農家)의 지용을 겸비한 맹장으로 신농군이 헌원과 판천전쟁(阪泉戰爭)에서 참패하자 남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천황군에 합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응룡(應龍)의 함정에 빠져 피살되었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응룡(應龍)이 날개 달린 용(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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