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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3장 치우천황의 등극(登極)-치우천황①
치우천황(蚩尤天皇)

배달한국의 천도 신시에서 명문귀족인 치우가의 적장자로 태어난 치우는
당시 최고의 스승인 자부 선인의 문하에서
학문과 병법을 쌓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치우천황의 즉위(卽位)

당시 천하의 주인은 치우천황(蚩尤天皇)이었다. 치우 가문은 신시 배달한국의 개천 당시부터 병권을 맡아 대대로 세습하던 최고의 명문 가문이었다. 제국의 제13세 천황 사와라(斯瓦羅, B. C 2707년) 한웅이 재위 67년 만에 붕어하시자 삼사(三師), 오가(五加)의 장관들이 모인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치우천황(蚩尤天皇)을 신시 배달한국의 제14세 천황으로 추대하였다.

배달국의 왕위 계승은 적자세습제가 아니었다. 물론 황태자가 다음 황위를 승계할 우선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만약 결격 사유가 발견되거나 나라의 안위를 고려하여 다른 적임자가 나타날 경우 새로운 임금을 선출하였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천해(天海, Baikal)로부터 비류호(沸流湖, Buir)에 이르는 대초원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던 기마유목민족인 신시 배달족은 북만주로부터 점점 남진하여 어느새 광활한 만주대륙을 평정하고, 밝해만을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홍산문명의 터를 잡으며 정착했다.

그러나 몸에 밴 기마민족의 습성 때문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원의 비옥한 땅을 찾아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 중원의 땅주인 수인씨(燧人氏)가 조공을 게을리하므로 반란으로 간주하고 복희(伏羲)씨를 총수로 임명하여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난을 평정한 복희씨는 점령지에 정착하여 통치권을 승인받고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 뒤이어 소전(少典) 장군 등이 중원으로 진출하더니 각각 점령지에 정착한 후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복희씨와 소전 장군 등이 세운 나라와 본국 조정과의 사이에 발생하는 잦은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공상(空桑) 국경협약(國境協約)을 맺게 되었다. 이후 얼마간은 상호간에 서로 협약을 준수하며 원활한 관계가 유지되었는데, 이번에는 제후들 간에 서로 이해관계를 다투며, 동족의 정리마저 버리고 피를 뿌리며 싸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예기치 않은 제후들 간의 다툼은,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치우천황의 입장을 불편하게 하였다. 더욱이 사위인 헌원(軒轅)이 장인(丈人)인 적제(赤帝) 신농(神農)의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고, 치우가(蚩尤家)의 할머니가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천황은 헌원의 행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숙고하게 되었다.

적제 신농이나 헌원이 모두 배달한국의 제후(諸侯)이고 같은 동족들이라는 것이 치우천황의 판단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적제(赤帝) 신농(神農)의 어머니 강씨(姜氏)가 보낸 사자(使者)의 보고를 접한 천도(天都)의 천황궁(天皇宮)엔 즉각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신하들은 아연 긴장하며 사태의 추이를 분석한 결과 이번 사건은 종전에 자주 일어났던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헌원이 오랜 시간 치밀하게 계획한 후 일으킨 도전적인 반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헌원의 도전은 나라와 천황에 대한 반란이므로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과 단순한 제후들 간의 다툼일 수도 있으므로 출병 결정에 앞서 헌원의 해명을 들어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등장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신하들의 서로 다른 주장에 곤경에 빠진 이는 바로 치우천황이었다. 그것은 나라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화백회의(和白會議)1)의 승인을 얻은 후에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배달한국의 전통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뜻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대사(大事)에 있어 신하와 천황의 뜻이 어긋난 적은 없었다. 또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현명한 신하들은 토론을 통해 의견을 통일해 왔고, 그 결과가 천황의 뜻에 반한적도 없었던 것이다.

천황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토론만 거듭하는 신하들로 인해 곤경에 빠졌으나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신시 배달한국의 절대적 통치철학이자 이념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의 확고한 출병 의지를 알면서도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각 부(部)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의 풍백부(風伯部)를 보면, 그들의 고유 임무가 백성들이 삶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현대의 보건사회부와 건설교통부 그리고 환경부 등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풍백부는 처음부터 국내 문제에 열중하여 해외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으므로 천황의 의견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우사부(雨師部)를 보면, 우사부 장관 태호 복희가 서정(西征)을 성공시켜 일으킨 나라를 이어받고 우가(牛加) 벼슬에 이어 적제(赤帝)에까지 오른 신농을 축출한 헌원을 응징하려는 천황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사부(雲師部)는 헌원편에 서서 이 전쟁이 동족 제후들 간의 충돌이므로 천황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운사부를 소전(小典) 강씨가(姜氏家)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이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는 운사부는 나중에 천황의 총동원령에 불복하고 오히려 헌원군에 가담하여 천황군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치우천황 이후 배달한국은, 제15세 치액특(蚩額特), 한웅 제16세 축다리(祝多利) 한웅, 제17세 혁다세(赫多世) 한웅, 제18세 커불단[居弗檀] 한웅으로 이어져 제1세 커발한[居發桓]에서부터 총 1565년을 이었다.
배달한국의 정통성은 커불단 한웅 이후 시조 단군(始祖 檀君)에 의해 다시 쥬신[朝鮮] 제국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이제부터 등장하는 치우천황의 이야기를 핵심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후의 역사에 대하여는 기존에 출간한 ‘한국105대천황존영화집’ 등을 참고하기 바란다.

1) 화백회의
화백회의는 만장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각 부의 의견이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헌원을 징벌 하기 위한 동원령을 내릴 수 없었다.

당시의 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桓國)엔 삼경(三京)이 있었다. 신시(神市)는 천황이 계신 천도(天都)로서 오늘날의 만주 하얼빈이고, 남경(南京)은 지금의 요양(遼陽) 그리고 서경(西京)은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서경은 치우천황의 출정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천황은 진격과 동시에 본거지를 청구(靑丘)로 옮겨간다.

치우(蚩尤)에 대하여...

치우천황의 서방 원정기(西方遠征記)에 앞서 잠시 치우천황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신시(神市) 배달한국(倍達韓國)의 제14대 임금님이시다.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는 자오지(慈烏支) 천황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삼성기(三聖記)』와 『한단고기[桓壇古記]』에 의하면, ‘치우(蚩尤)’란 말의 원래 뜻은 ‘우레와 비가 내려 산과 강을 바꾼다’라고 했다. 그러나 옥편을 찾아보면 ‘치(蚩 :어리석다, 버러지)’+‘우(尤 : 원망하다, 탓하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치우’의 원래 뜻과 한문자의 뜻이 서로 다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열등의식이 강한 중국인들은 남방민족을 ‘만민’이라 하여 ‘벌레와 같다’고 했고, 북방인은 ‘적(狄)’이라 하여 ‘개(犬)’와 같다고 했으며, 서방인은 ‘강(羌)’으로 ‘염소와 같다’라고 하며 주위의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또 타인이나 타국을 부를 때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문자보다는, 천박한 의미와 모양을 가진 글자와 단어를 골라 사용했다. 그런 그들의 못된 속성 때문에 역사의 복원을 위하여 부득이 그들의 책을 참고해야 할 때에도 한 글자 한 단어마다 무슨 목적으로 그 글자와 단어를 선택하였는지 세밀히 관찰해보지 않으면 그들이 의도한 함정에 빠져버리고 만다.

뒤늦게 중국인들의 잔꾀를 알아챈 일부 학자들이 ‘치우’라고 쓴 한자의 뜻에 분노하여 ‘治尤’, ‘智爲’ 등으로 고쳐쓰자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충분히 의의가 있고 반드시 틀린 주장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저들의 책 속에 기록된 것을 다 고치려 한다면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할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저들과 그 옳고 그름을 따져 논쟁을 해야하니 그 얻는 결과에 비하여 들이는 노력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된다. 어차피 그들의 책이니 그들 마음대로 기록함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 기록의 의도를 똑바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사진들은 경주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는 ‘녹유귀면와’이다.
옛 신라 사람들이 자기 집을 악령의 침입으로부터 막기 위하여 민족의 수호신 치우의 모습을 지붕의 기와에 형상화하여 만들어 놓았다. 치우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떠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사서에 표현한 기록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치우에 대한 중국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된다.

‘치우’의 올바른 풀이

치우(蚩尤)의 ‘치’는 가우리어[高句麗語]에서 왕[韓,汗,王]을 뜻하고, ‘우(尤)’는 위[上], 상[高]의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치’는 민족의 고대어로‘칸(Kahn)’이나 ‘한, 간’으로 왕이나 그에 해당하는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어차피 중국인들이 우리의 소리 말을 그들의 뜻글자로 정확히 표기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시 기록자가 그 지방에서 쓰는 글자 가운데 ‘치’와 가장 비슷한 발음이 나는 글자를 골랐을 것인데, 기왕이면 경멸의 뜻이 있는 글자를 고심하여 선택하였을 것이므로 그 뜻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 ‘우(尤)’는 ‘위’와 같이 상(上)을 뜻하는 우리의 옛 말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지금도 ‘위’ 대신에 ‘우’를 쓰고 있는 곳이 있다. 따라서 ‘치우’는 ‘황상(皇上)’이나 ‘왕상(王上)’ 혹은 ‘존상(尊上)’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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