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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2장 한웅시대-황제(黃帝) ②
신농 적제(神農赤帝) vs 황제 헌원(黃帝軒轅)

시간이 흘러 적제 신농이 늙고 기력을 잃자, 그동안 적제(赤帝)의 압박통치에 숨죽이며 살았던 토족 제후(諸侯)들 간에 서로 싸우는 예가 잦아지더니 마침내 나라가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실력배양에 진력하던 헌원은 드디어 신농에게 도전할 결심을 굳히고 우선 그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형천(形天)의 토착세력을 먼저 공략하여 철저히 토멸한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에는 이때의 전투 상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이민족(異民族)인 헌원(軒轅黃帝)의 공격에 추장(酋長) 형천(形天)이 얼마나 극심하게 저항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어 그대로 인용한다.

“형천의 토착 세력이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황제를 축출하기 위하여 맹렬히 대항하였으나 결국 상양산(常羊山) 싸움에서 참패하고 형천은 목이 잘렸다. 그러나 형천은 젖꼭지를 눈으로 삼고 배꼽을 입으로 하여 다시 큰도끼와 방패를 들고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중국통사(中國通史)에 등장한 형천(刑天)의 모습이다. 『산해경(山海經)』의 집중적인 연구나 분석도 없이 그대로 삽화 처리한 것으로 고대사의 경솔한 해석이 얼마나 본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머리 없는 형천이 계속 저항 하였을리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의 기록을 보아 비록 선주 토착세력이 그들의 지도자 형천을 잃었지만 잔존하던 나머지 세력들이 힘을 합쳐 맹렬한 저항을 계속 했음을 알 수 있다.

헌원은 형천과의 전쟁을 통하여 상당한 전투 경험을 얻게 되었으며 아울러 능률적인 군조직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상양산 전쟁을 승리로 이끈 헌원은 최정예 4군인 웅군(熊軍), 파군(罷軍), 비군(봬軍), 호군(虎軍)을 강력하게 무장시키고, 이들의 지원부대로 휴군과 추군을 예비군단으로 두어 총 6군(六軍)의 대병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헌원의 급격한 성장과 움직임을 긴장 속에 지켜보던 주위의 호족들은, 신농 적제가 제후들간의 충돌을 문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의외로 신농측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신농은 그의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 그의 제후들은 더 이상 신농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때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원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제후들이 이미 늙고 힘을 잃은 신농 적제를 버리고 신흥세력인 헌원쪽으로 투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마침내 헌원에게 정권탈취의 기회가 온 것이다.

판천대회전(板泉大會戰)

헌원은 그의 장인(丈人)이기도 한 신농에 대하여 숨겨놓았던 발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오랜 가우리[東夷]의 식민통치에 반발하는 제후들을 충동질하여 ‘반적제동맹(反赤帝同盟)’을 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대대적인 징집으로 막강한 연합군을 형성하고 자신은 전군의 최고사령관 겸 ‘반적제동맹’의 수령(首領)이 되었다.

때마침 신농 적제는 멀리 변방 제후들의 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군사를 모아 출병을 서둘렀다. 때를 기다렸던 헌원은 신농의 배후를 노리고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멀리 있는 반군만 보았지 정작 코밑에서 사위가 반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헌원의 배반에 격노한 신농은, 반군은 그대로 놓아둔 채 헌원을 응징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드디어 판천(板泉)1)의 들에서 신농과 황제간의 운명의 대접전이 펼쳐졌다.

염제 신농은 먼저 화공(火攻)으로 헌원을 맹렬히 공격하여 강변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배수의 진(陣)을 친 헌원이 오히려 물을 이용하여 화공을 막아내고, 때마침 신농군을 추격해오던 반군들이 신농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오자 앞뒤에 적을 만난 신농군은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중국의 옛 기록들은 이때의 싸움을 ‘봉황과 용의 대결’ 혹은 ‘불(염제 신농 : 불의 신)과 물(황제 헌원 : 우레와 비의 신)’의 싸움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황제를 중국을 대표하는 용으로 보고, 신농을 동이계의 상징인 봉황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이 문제를 알아보자. 신농은 우리 동이 9족 중 풍이(風夷)에 속하고 풍이는 특히 봉(鳳)을 상징으로 삼았다. 『설문』에, “봉은 신조(神鳥)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봉이 나타나면 천하가 평안하고 뭇새들이 그를 따른다.”고 하여, 봉을 동방 배달한국의 상징으로 보고 한웅 임금님이 움직이면 천하의 질서가 잡히며 모두가 그 위엄에 복종한다고 표현했다. 봉(鳳)은 암컷을, 황(凰)은 수컷을 뜻하므로 봉황(鳳凰)은 암수 한 쌍을 말한다.

중국인들은 오늘날까지 황제(黃帝)를 하인(夏人) 출신인 토덕(土德 : 원주민)의 왕으로 북방민족에 저항하여 중국을 지켜낸 대표주자로 추대하고 있다. 그런데 헌원 역시 중국인들의 염원과는 달리 봉황을 숭상하던 동이족 출신이었다. 또 치우천황에 대항하기 위해 현지 세력을 규합하여 10년 전쟁의 악전고투 끝에 얻은 것은 중원의 자치정부의 수장(首長)격인 내부(內部)의 장관 황제(黃帝)의 벼슬이었다. 이 ‘황(黃)’자는 그의 자손들에 의해 ‘황(凰 : 봉의 수컷)’자의 같은 발음인 ‘황(皇)’자로 변하여 중국 왕들의 칭호가 되었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판천(板泉)회전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한 헌원은 이후 신농의 반군들을 흡수하여 엄청난 군세를 형성하였다. 이제야말로 적제 신농과 정면승부를 겨루어볼 만하다고 생각한 헌원은 감히 신농의 도성(都城)을 공략하여 유린하는데 성공하고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계속된 패전으로 힘을 잃은 신농은 사력을 다하여 헌원에 대항하였으나 현지에서 징병된 토착민 병사들이 잇달아 군영을 탈출하여 헌원에게 투항하므로 결국 늙고 기력이 다했음을 인정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신농이 중국의 주인 자리를 빼앗기면서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변했다. 그동안 아들이 고전분투하며 쫓기는 모습을 관망하기만 하던 어머니 강씨는 더 이상 헌원의 팽창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천도(天都) 황실(皇室)의 개입을 요청하고 나섰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의 신농의 소식을 전하는 옛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금문 사학자 낙빈기(駱賓基)가 금문(金文)의 수수께끼를 해득하면서 해답을 얻었는데, 그에 의하면 패전으로 의욕을 상실한 신농은 대파산 속에 은거하며 산사람(山人)이 되었다고 한다. 신선(神仙)이라는 말은 곧 신농이 산사람이 되었다는 말에서 유래된 용어라는 것이다.

중국의 기록들은 이때의 헌원에게 황제란 칭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 천자(天子) 혹은 황제(皇帝)란 칭호는 없었다. 진시황(秦始皇) 때 이르러 비로소 황제(皇帝)란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으므로 그를 시황제(始皇帝)라 하는 것이다.

후한(後漢)의 시어사 채옹(蔡邕, 132~192년)은 ‘조정의 제도와 호칭’을 연구한 『독단(獨斷)』에, “천자라는 호칭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천자라 한 것이다(天子之呼稱 始於東夷 父天母地)”라고 하였다.

판천(板泉)대회전(大會戰) 국 서한사의 새로운 질서개편을 예고한 운명의 대회전이다. 지방 토후들의 작은 충돌로 시작된 사건이 결국 치우천황의 참전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부른다.

염제(炎帝) 신농(神農)
중국일백제왕도(中國一百帝王圖)에 그려진 염제의 모습이다. 배경에 봉황이 날고 있는데 이는 신농이 동이족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黃帝) 헌원(軒轅)
중국일백제왕도(中國一百帝王圖)에 그려진 황제 헌원의 모습이다.
황제가 용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여 적제 신농과 구별하고 있다. 용(龍)은 역대로 중국왕실의 상징이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아예 중국을 대표하는 신성물로 자리잡았다. 이는 황제를 동이족인 신농의 지배로부터 중국을 독립시킨 영웅으로 인식하고 그를 중국민족의 원시조로 대접하는 결과이다.

중국(中國)과 지나(支那)

현대의 중화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중국(中國)이라고 불러 마치 세상의 중심국인 것처럼 행세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화하족(華夏族)들은 이미 태고 시절부터 배달한국의 복희와 신농 그리고 치우천황의 정복 등으로 식민생활을 해오던 민족이었고, 그 이후에도 자신들의 나라를 가진 역사가 지극히 짧은 민족이다.

중국은 영어로 ‘China’라고 표기하고, 한자로는 ‘지나(支那)’로 쓰는데 이 국호 속에 중국의 정체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담겨 있다. ‘지나’는 중국인들이 스스로 그들의 나라를 표기한 것이므로, 그 국호 속에는 그들의 국가의식이나 정체성이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나’의 뜻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지(支) 가를지, 가지 지
나(那) 나라, 읍(邑)의 이름

즉‘지나’는 ‘곁가지 나라’혹은‘갈라져나온 나라’라는 뜻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곁가지 나라’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어느 나라로부터 갈라져나왔다는 것일까? 그 몸통(본가지)이 되는 본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황토인(黃土人)의 수장에게 황제(黃帝) 벼슬을 제수하고 화하족의 총독으로 임명한 종주국 신시 배달한국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황제는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민족심을 고취시킨 후, 독립을 목적으로 배달한국의 임검이신 치우천황에게 도전한 인물이다. 따라서 국측에서는 난을 일으킨 수괴로 볼 수 있으나, 중국측에서 보면 분명히 한민족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성취한 민족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주1) 판천
탁록산 아래에 탁록성(황제성)이 있고 그 동쪽 1리 지점에 판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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