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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제3장 치우천황의 등극(登極)-대회전(大會戰)①
대회전(大會戰)

치우천황의 총동원령에 출동한 군단들이 각각의 군기와 장기를
높이 들고 태산 밑 벌판에 총집결하였다.

진압을 위한 연합군 편성

드디어 기다렸던 총출동령이 내려졌다. 이때 총동원된 치우천황군의 병력이 얼마나 되었는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참여한 장수들의 수효를 통하여 전체적인 규모를 짐작해볼 뿐이다. 사서(史書)들이 전하는 확인된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천황의 친정군(親征軍)으로, 치우천황가의 친족 형제들이 이끌고 있는 81개의 부족장들과 그 휘하의 병력들이 있고, 또 풍백부(風伯部)와 우사부(雨師部)의 장관들이 정부의 관병(官兵)을 이끌고 참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매, 과보, 형천(邢天) 등이 각각 장군으로 그들의 병사들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들은 아마도 청구(靑丘)에 주둔하고 있던 관병들이 연합군에 합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고시(高辛)와 창힐(創詰) 그리고 대요(大撓)의 세력들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말했듯이 이들은 헌원측의 동맹 요청을 일거에 배척한 세력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치우천황의 연합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본 결론은 다르다. 우선, 당시의 천하는 신시 배달한국의 한웅천황에 의하여 주도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은 모두 치우천황의 제후국들로서 헌원의 동맹요청을 물리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들에겐 화하족의 반란을 토벌하려는 천황의 총동원령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어떠한 형태로든지 천황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 천황의 동원령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묘족군도 연합군의 한 축으로 참여하였다. 남쪽 변방의 묘족은 천황이 직접 임명한 총독[蚩尤氏]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군사의 징병이 비교적 용이했는데, 묘족의 막강한 병력이 출동하여 남쪽으로부터 헌원의 동맹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남북을 잇는 연합작전이었다.

위 지도는 당시 치우천황의 총동원령에 따라 기동했던 각 군의 이동경로이다. 유의할 점은 치우의 원정군(遠征軍)이 당시 배달한국의 동경성(東京城)이 있던 지금의 만주 요양(遼陽)으로부터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타고 내려와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산동(山東)의 등주지방으로 상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묘도열도는 청구(靑丘)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해상 고속도로였다.

여기에서 현재에도 많은 수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묘족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묘족(苗族)은 치우가(蚩尤家)의 통치 지역으로 역대의 모든 총독(總督)은 천황의 칙령을 받은 치우가문(蚩尤家門)에서 나왔다.

『묘족간사(苗族簡史)』에는 “약 5000년 전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에 묘족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다.

이들은 삼묘(三苗)족 1)의 일부로서 후일 요(堯), 순(舜), 우(禹)를 거치면서 거듭 침략을 당하고 그중 일부는 형만(荊蠻)으로 발전하여 초(楚)나라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산간으로 들어가 묘족(苗族), 요족(힀族), 여족(黎族)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모두 훈족[匈奴], 몽골족[北狄], 선비족(鮮卑族)으로 융화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 중에 등장하는 선비족(鮮卑族)은 바로 치우천황이 세웠던 청구(靑丘)를 이어 불쥬신[卞朝鮮]의 맥을 잇는 우리 한민족의 일족이었다.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묘족 인구는 약 600만 명으로 그중 약 500만이 중국 내에 살고 있다. 중국 사천민족출판사의 『묘족사(苗族史)』에 “묘족의 원조(遠祖)는 치우”라고 하면서 선조의 노래 ‘상보상랑가(相菩相娘歌)’의 내용을 전설, 풍속, 관습 등으로 나누어 연구한 결과 이들의 선조가 치우 가우리[蚩尤九黎]족이 틀림없다고 썼다. 묘족(苗族)의 묘(苗)는 우리말의 ‘움’으로, 곧 ‘움족’이 된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치우천황을 그들의 원시조로 모시고 있다.

『산해경』 「대황북경(山海經大荒北經)」에 “흑수(흑룡강)의 북쪽에 묘민족이 있다(黑水之北有人苗民也)…… 초기 묘민들의 지역은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서 반지하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라고 기록하여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묘민(苗民)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은 모두 중국 양자강의 상하지역인데, 이곳의 날씨는 결코 ‘겨울이 혹독하게 추운’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묘민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움집에서 살았다고 했으므로 이미 전술한 것처럼 묘민들이 흑수변(黑水邊)에 살다가 치우천황의 소개작전(疏開作戰)에 의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편 우사(雨師)가 이끄는 동방군은 요동반도에서 묘도열도2)를 건너 산동반도로 상륙한 후 청구군(靑丘軍)과 연합군을 형성하고 천황의 본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치우천황의 어림군(御臨軍)을 비롯하여 제국의 총동원령에 출동한 군단들이 각각의 군기와 장기(將旗)를 높이 들고 집결장소인 태산 밑 벌판에 총집결하였다. 마침내 배달한국을 주축으로 하는 천황의 대연합군은 화하족을 총동원한 헌원의 반군을 타도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

▲ 치우천황의 작전회의
위그림은 유화를 사용하여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160Cm, 가로 460Cm의 초대형 그림이다. 군복과 병장기들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당시의 전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연합군에 참여한 많은 장수와 병사 그리고 그들이 지참하고 온 병장기(兵仗器)를 일일이 점검한 치우천황은 사기와 훈련 상황 등을 고려하여 제각기 특성에 알맞도록 군을 9군(九軍) 81대(八十一隊)로 재편하였다. 그중 천황이 직접 지휘하는 어림군의 본진은 약 3000명의 강력한 기병(騎兵)과 철갑군[鎧甲軍]으로 조직되었다. 그외에도 천황군을 호군대(虎軍隊), 견군대(犬軍隊), 수리대[鷲鷹隊, 취응대]의 3개의 별군(別軍)으로 나눴다. 이중 호군과 견군대는 묘족 토벌작전 중에 얻은 경험을 토대로 군사 작전에 쓸 수 있도록 발전시킨 것이고, 취응대는 그 자신이 사냥을 할 때 훈련시켰던 수리를 적정 탐색과 각 부대 간의 빠른 통신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군단의 재편을 끝마친 천황은 작전회의를 소집하였다. 치우천황은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만든 작전지도를 펼쳐놓고 각 지휘관들의 임무를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비로소 천황의 빈틈없는 준비를 알게 된 장수들은 천황의 정보수집 능력과 치밀한 용병술에 경탄하며 승리를 확신하니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1) 삼묘족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삼위산은 삼묘족(三苗族)의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회남자(淮南子)』에는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묶는 상투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상투를 트는 민족은 우리와 삼묘족 뿐이므로 삼묘족의 터전은 치우천황 당시 우리 한민족의 영역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묘도열도(廟島列島)
만주에서 산동지방에 이르는 교통로는 밝해만을 끼고 멀리 돌아 요양?산해관?북경?산동에 이르는 루트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현지를 수차례 답사한 결과 산동과 요동반도 사이를 잇는 ‘묘도열도’라는 해상교량을 이용하면 만주와 산동지방이 일일생활권 내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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