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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가우리의 멸망

밝해 건국이전의 시대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연개소문 사후부터 고구려 멸망까지의 내용을 뒤늦게 앞부분에 끼워넣습니다.
(*안시성 전투와 관련된 내용은 "연개소문" 가우리와 중국의 북방패권전-3을 참고하십시오.)

서기 672년 12월, 안승의 가우리군과 실라의 연합군은 당군을 상대로 한 백빙산전투에서 패전하였다.
그러나 673년 5월, 남진하는 당군을 맞아 오로하[瓠盧河 : 七重城의 북쪽]에서싸워 승리함으로써 당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이로써 당군은 남쪽의 웅진 도독부와 연결하려던 전략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 때는 동맹국으로 연합군을 구성하여 남부여 멸망에 공동으로 싸웠으나, 이제는 부여의 옛 땅을 서로 통치하려는 욕심 때문에 더 이상 동맹국이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실라는 가우리의 망명 정부인 안승과 그의 가우리 다물군을 은근히 지원해 안승군으로 하여금 당군과 싸우도록 했다.

교묘한 실라의 정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갔다. 옛 남부여의 왕성과 그들의 성역인 웅진[나루]을 당이 점령함으로써 부여인들의 분노는 실라를 벗어나 당의 점령군을 축출하는데 쏟아지고 있었다.

비록 남쪽 멀리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우리 구국의 망명 정부인 안승이 가우리[高句麗]의 국명을 계승함으로써 당의 총독 통치에 대항하여 독립하려는 의사들이 온 가우리 천지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한번 불붙기 시작한 가우리의 다물 운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격렬히 번져 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펴라 도독부[平壤都督府]의 설인귀는 점령군의 무력만으로는 가우리의 다물 운동을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당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 지역으로부터 강력한 군단들이 서서히 힘을 모아 가우리 땅에 들어와 있는 당의 병사들을 각개 격파하니, 그들 상호간의 통신마저 어렵게 되어 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설인귀는 장안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장안 정부는 남부여의 항쟁과 실라의 배반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에, 병사들의 힘만으로는 이 불길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동안 장안으로 데려갔던 가우리의 보장왕을 이용하는 고등 전술을 썼다.

장안 정부는 보장왕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였다. 보장왕은 다시 가우리 땅의 왕이 된 것을 기뻐하여 즉시 펴라성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펴라성은 그 자신이 당에 항복하기 전에 손수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글자 그대로 황폐하여 그의 괴뢰 정부를 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방황하던 중에 설인귀의 도움을 받아 신성(新城)에 왕도를 정하였다.

보장왕은 당 왕의 요구에 따라 가우리 다물군에게 투쟁을 즉각 중지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에게 항복하여 옛날의 가우리를 다시 세우자고 회유하였다. 수많은 다물군 장군들이 이 어리석은 왕의 명령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항쟁을 포기하고 항복해옴으로써 거세게 치솟아오르던 가우리의 광복 운동은 일시에 꺼지고 말았다.

그동안 옛 왕조를 되살리기 위하여 칼을 들고 일어나 당적(唐敵)을 물리치며 싸웠던 가우리 다물군의 용사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물군의 입장에선 당적을 쫓아내고, 옛 왕을 다시 모셔와서 가우리를 다시 일으켜 역사를 잇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돌연 보장왕이 되돌아와 조선 왕이라 내세우며, 신성(新城)을 왕성으로 정하였으니, 그럼 벌서 그들의 목적이 달성된 셈이 아닌가?

보장왕은 당 왕의 요구에 따라 가우리 다물군에게 투쟁을 즉각 중지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에게 항복하여 옛날의 가우리를 다시 세우자고 회유하였다. 수많은 다물군 장군들이 이 어리석은 왕의 명령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항쟁을 포기하고 항복해 옴으로써 거세게 치솟아오르던 가우리의 광복 운동은 일시에 꺼지고 말았다.

한편, 금마저의 후가우리의 보덕왕 안승(安勝)은 보장왕이 되돌아와 다시 조선 왕의 지위로 가우리를 다스리자, 대단히 미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서기 680년 3월, 실라의 문무왕은 안승의 망명 정부가 아직도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자기의 귀여운 딸을 안승에게 시집보내어 후가우리를 지원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서기 681년, 보장왕을 조선 왕에 임명하여 가우리의 다물 운동의 불꽃을 잠재운 당 정부는 이제 가우리가 완전히 당에 굴복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보장왕을 더 이상 가우리 땅에 놓아 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또다시 장안성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검교안동도호 설인귀를 가우리의 총독으로 재임명하였다.

서기 682년, 나라를 잃은 보장왕(寶藏王)은 당경(唐京) 장안(長安)에서 부끄러운 일생을 마쳤다. 이에 따라 당정부는 가우리 전쟁을 종결짓는 뒤처리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였던 가우리전의 승리를 이끌어 낸 데에는 그 누구보다도 가우리의 신크말치였던 반역자 남생의 공이 으뜸이었다. 당 왕(唐王)은 남생(男生)에게 중리위 진대형(中裡位鎭大兄)의 벼슬을 제수하고, 넓은 당과 큰 집을 주어 제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남생은 장안에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당 왕은 또 제 형과 싸우느라 나라를 망쳐 먹은 옛 가우리의 막리지 남건(男建)에게는 끝끝내 당에 항거한 죄를 물어 검주(黔州)로 보내고 말았다.

이로써 가우리의 문제는 일단 정리된 듯 보였다. 그러나 남쪽엔 아직도 동맹국이었던 실라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한없이 많았다. 우선 실라는 당의 웅진 도독부를 적대시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여 웅진 도독부의 코밑에 있는 금마저에 후가우리의 망명 정부를 세우게 하고, 안승에게 실라 공주를 시집보내는 등 당과의 적대 관계를 노골화하였다. 당이 이 일을 심각히 받아들이자, 실라 정부는 한 발짝 양보하여 금마저의 후가우리 망명 정부를 폐쇄하고, 안승을 경주로 데려가 버렸다.

서기 683년 10월, 문무왕은 안승에게 실라의 왕성(王姓)인 김(金)씨 성을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이로써 가우리 멸망 후 줄기차게 싸워 온 후가우리의 다물 전쟁도 종결되고 말았다.
실라의 배신 행위에 분개한 수많은 용사들은 다시 발길을 돌려 옛 가우리 땅으로 가 새로운 광복전쟁에 뛰어들었다.

장안 정부의 예상과는 달리 가우리의 다물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 끈질긴 항전에 기가 질린 당 정부는 할 수 없이 서기 685년에 보장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 군왕(朝鮮群王)으로 삼아 다시 가우리로 보냄으로써 가우리의 대당 항전(對唐抗戰)을 잠재우려 하였다.
이 책략이 다시 성공을 거두자, 보원왕을 좌응양위대장군(左鷹楊衛大將軍),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보원왕은 차츰 당의 괴뢰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옛 가우리를 되찾으려는 다물군을 지원하더니, 끝내 왕위를 버리고 대당 항전에 뛰어 들고 말았다.
결국 화족(華族)인 당나라는 가우리[高句麗]를 통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보원왕의 뒤를 이어 또다시 대당전이 격렬해지자, 옛 왕인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또다시 가우리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덕무조차 가우리 땅의 당군을 몰아내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니, 당나라는 모처럼 멸망시킨 가우리라는 거대한 먹이를 요리할 줄 몰라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동명왕 고진(高辰) 이후, 광활한 북방 지역을 지배해 왔던 가우리[高句麗]의 고씨 왕조(高氏王朝)는 고덕무(高德武)를 끝으로 무려 905년간의 왕조 역사(王朝歷史)를 기록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세계 역사상 한 성씨가 900년간의 장구한 왕조를 유지한 것은 이 가우리[高句麗]의 고씨 왕조(高氏王朝) 말고는 찾아 볼 수 없다.

  • ※ 발해는 태양민족임을 뜻하는 “밝은 해”를 줄인 “밝해”의 소리말을 한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 ※ 대신국의 “신(辰)”자는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으로 발음하여 대진국으로 읽는데, 크다는 의미를 두 번 강조하는 “대신국”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또한 대신국의 국호는 이외에도 “세상의 중심 땅“을 의미하는 가우리[句麗]라는 국명을 계속 쓰기도 했는데 대쥬신제국사에는 대가우리(=대씨가우리 大氏高句麗)로 표현되어 있다.
  • ※ 밝해, 고려 등이 고가우리[高句麗]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가우리[句麗]”라는 국명를 사용하였기에 대쥬신제국사에서는 이를 구분키위해 고구려=고씨가우리(고씨 왕조의 가우리), 밝해=대씨가우리(대씨 왕조의 가우리), 고려=왕씨가우리(왕씨 왕조의 가우리) 등으로 국명이 표현되어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를 성씨(姓氏)로 오인한 잘못임을 여기서 밝히며 앞으로 출간되는 대민족통사 시리즈에서는 고구려(고가우리)→위가우리, 대가우리→밝해, 고려→왕가우리로 국명이 지칭됩니다.
    참고로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자는 크다, 높다의 뜻 외에도 위(上)의 뜻이 함축되어 있어 위가우리(위대한 가우리, 큰가우리)로 표현하였음을 밝혀둡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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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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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길 221.164.103.12 2009-08-15

    대가우리의 땅부분중의 1/53이 지금으로부터 3주가남았어요 ^^ 3주뒤면은 절대로 찾아갈수가 없답니다. 100주년이 되는해라서 중국한테 소송을 걸어야지 우리가 되찾을수있는데... 못찾겠지요?? 우리땅 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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