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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대씨 가우리 입국(大句麗 立國)-4

서기 699년 황제에 즉위한 대조영은 국호를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이라 하였는데
훗날 중국측에서 “밝해”로 불러 본국명보다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중국 땅에서 보면 대가우리는 발해의 저편에 있었으므로 발해라 부른 것인데
우리가 왜(倭)를 한반도에서 보았을때 해가 뜨는 곳이라며 일본이라 불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대가우리가 일어나자, 북대륙의 제국(帝國)은 새로운 외교 관계를 열기 위하여 사신들을 가우리의 서울 오동성으로 파견하였다. 그 중에서 돌궐과는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거란•해(奚) 등과는 동맹을 맺어 대당전(對唐戰)에 대비하여 갔다.

새로운 종주국인 가우리의 뜻에 따라 거란과 해의 연합군이 당의 북쪽 국경을 공격하자, 당은 또다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당나라는 옛 가우리로부터 탈취했던 영주(營州)에서 유주(幽州)까지의 땅을 거란에 빼앗겼다. 그나마 요동 반도에 고립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영토마저 동맹국이던 실라와의 분쟁에 휘말려 당은 진퇴양난의 어려운 형편에 빠지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흥 대가우리의 전면적인 공격을 면할 수 없을 것이 뻔했고, 여제(女帝) 무측천(武則天)을 거치면서 약화된 지금의 국력으로는 대가우리에 맞설 수 없었다. 그러자, 무측천을 대신하여 복위한 중종(中宗)은 시어사(侍御使) 장행급을 급히 대가우리로 파견하여 또다시 허세 외교를 부렸다.

“대당국의 시어사 장행급(張行?)이옵니다.
우선 대당국의 황제께서는 발해의 입국(立國)을 경축하옵고, 지난날의 불행했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귀하를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한다 하옵니다.”

“너희 서족(西族 ? 中華族) 놈들은 정말로 미친놈들이 아닌가?
도대체 네놈들이 뭐 길래 남의 나라에 멋대로 주인을 봉한단 말인가? 자기도취에 빠져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구나. 너는 돌아가서 제 주인 중종에게 이르라.
나 가우리의 대황제가 중종을 중국의 왕으로 봉하노라고….
네놈의 언동이 하도 기가 막히고, 괘씸하여 당장 목을 베어 버리고 싶으나, 그래도 일국의 심부름꾼이니 목숨만은 살려 보내노라.”

“대가우리 황제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소서. 사실, 저희들이 당경(唐京) 장안을 떠날 때만 해도 발해[가우리]는 옛 가우리의 잔존 세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나이다. 그러나 실제로 와 보고는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저희 같은 어리석은 신하들 때문에 저희 대당의 황제께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나이다. 결코 대가우리의 황제를 능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사옵니다.

황제 폐하!
이 모든 일은 중책을 맡은 소인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발생된 일이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깊이 사죄드리오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제가 대당국의 수도 장안성으로 돌아가 우리 황제를 뵈옵고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보고해 올리겠습니다.
특히 이 땅에 고씨가우리에 이어 대씨가우리가 다시 일어섰음을 알려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도록 하겠나이다.

또, 우리 당에서는 가우리 땅에 새로운 나라가 일어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직 공식적인 국명은 모르고 있었나이다. 어떤 사람은 후가우리라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속말갈이라고 했나이다. 그런가하면 대신국[大震國]이라는 말도 있어서,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알 수 없었나이다. 할 수 없이 종전대로 발해 건너편에 있는 나라라는 뜻에서 발해군이라고 부른 것이옵니다. 비록 저희가 엄청난 실례를 저질렀음은 부인하기 어려우나 황제 폐하를 존중하려던 의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이해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대당 제국과 대가우리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지난날의 불편했던 관계를 개선하여 앞으로 화친하기를 소원하나이다.”

“좋다. 너희들이 무지하여 저지른 실수라 인정하고 이번 일은 용서해 주리라. 그리고 서국[唐]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여는 문제는 나도 찬성하는 일이므로, 가우리의 태자를 공식 사절단의 단장으로 하여 장안으로 파견하겠다. 어차피 천하는 우리 가우리와 서국이 서로 양분하여 통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가우리의 태자님을 정상 회담의 수석 대표로 파견하여 주신다면, 우리 장안 정부도 크게 감격할 것이옵니다. 이로써 본인은 이번 일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황제폐하의 바른 사리에 머리가 절로 숙여지나이다. 양국이 공존하며 번영하게 되면 주위에서 날뛰는 가우리의 번국들도 더 이상 저희 당나라를 괴롭히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어 폐하의 은공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옵니다.”

이리하여 대가우리의 태자 대무예(大武藝)를 수석 대표로 하는 외교 사절단이 서국의 수도 장안성(長安城)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아직 서양 세계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천하를 양분하여, 서국을 서쪽 대륙의 종주 세력으로, 가우리를 동쪽 대륙의 종주 세력으로 인정한다는 상호 승인 협정을 맺었다.

옛 가우리와의 14차에 걸친 대전으로 인하여 서국을 이끌던 수나라가 망했고, 또 가우리도 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우리는 다시 일어났으므로 결국 전쟁을 통하여 얻은 소득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쯤에서 서로 화평 조약을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태자 대무예는 가우리와 서국 간의 강화 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하였다.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됨에 따라 황제의 외삼촌인 대문예(大門藝)가 초대 주당 상주 대사로 파견되었다.

712년 3월, 일단 대가우리와의 강화 협상에 성공한 서국은, 옛 가우리[高句麗]가 자멸할 때 어부지리로 얻었던 영주[그 동안은 거란이 차지하고 있었다]를 되찾기 위하여 5월, 손전 장군을 유주 대도독(幽州大都督)에 임명하고 보기(步騎) 28,000명을 동북으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거란과 해의 연합군은 대가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단독으로 당군과 결전을 벌여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손전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당의 장수들이 대거 생포되었는데, 당과의 관계가 악화된 돌궐이 당장(唐將)들의 신병을 넘겨달라고 요구하여 넘겨주자, 돌궐은 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다.

유주에서 영주에 이르는, 발해 북단의 전 지역을 거란에 탈취당하게 되자, 옛 가우리의 도성인 펴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들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동쪽에서는 죽었던 가우리가 다시 살아나 그들의 숨통을 죄어오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그 동안 동맹국이었던 실라와 영토 분쟁이 일어나 관계가 불편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진 펴라 주둔군을 살려 내고자 당 정부는 또다시 그들의 자존심을 꺾고 낭장(郎將) 최흔을 대가우리에 파견하여 거란군을 공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그러나 이민족인 서국을 위하여 불쥬신의 후예인 거란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대가우리의 고황제는 결국 서국을 혼란시키기 위하여 서국 대사 최흔 일행을 약 1년간 잡아 두었다.

대가우리에 도움을 요청했던 당 정부는 최흔 일행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714년 4월 병주상사 설눌에게 6만 병을 주어 거란을 치고 길을 열어 펴라 주둔군을 구출하도록 명하였다. 최흔 일행을 억류함으로써 정책의 혼란을 유도했던 가우리 정부는 설눌군의 출병으로 애당초의 목적을 잃게 되자 그 대서야 최흔 일행을 석방하였다. 본국 정부로 돌아가던 최흔이 황금 산맥 밑을 지나며 2개의 우물을 파고 각석에 기록을 남겨 두어 이 때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714년 4월, 설눌은 그의 아버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6만의 대병으로 거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국 용사들의 용맹성에 당병들은 전의(戰意)를 잃고 말았다. 아무리 설눌이 독전(督戰)을 해도 이미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로 싸움에 이길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거란을 치고 발해 북단을 되찾으려 했던 당나라는 또다시 참담한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더 이상 무력으로는 거란군을 누를 수 없다고 판단한 당나라는 그들 특유의 기술만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보았는데 듯밖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거란의 남부 수령 이실활(李失活)을 막대한 금은보화로 매수하여 당과의 화친에 동의하게 한 다음, 그에게 송막 도독(松漠都督)의 벼슬을 내려 그의 영토를 그대로 통치하게 하니,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행각한 이실활이 이 벼슬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로써 형식상 이실활이 통치하고 있던 거란의 남부 영토는 당나라 조정에 넘어간 셈이 되었고, 당은 696년에 대조영과 이진충의 연합군에게 빼앗겼던 영주를 22년 만에 되찾게 되었다.

천통(天統) 21년(서기719년), 세조 신국 열황제[世祖振國烈皇帝] 걸걸중상(乞乞仲象)에 이어 대씨가우리[大氏高麗]의 기틀을 굳게 다져놓은 대조영(大祚榮) 고황제(高皇帝)가 돌아가시니, 그의 시호를 태조 성무 고황제(太祖成武高皇帝)라 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태자 대무예가 제위(帝位)에 오르니, 광종 무황제(光宗武皇帝)이다.

* 주당 대사(駐唐大使)의 임무는 가우리와 서국 간의 외교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서국 당나라의 국정을 살피고 그들의 행동을 감시하여 본국 가우리 조정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들의 임무와 역할엔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 ※ 발해는 태양민족임을 뜻하는 “밝은 해”를 줄인 “밝해”의 소리말을 한문자로 표현한 것이다.
  • ※ 대신국의 “신(辰)”자는 우리말로 크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으로 발음하여 대진국으로 읽는데, 크다는 의미를 두 번 강조하는 “대신국”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또한 대신국의 국호는 이외에도 “세상의 중심 땅“을 의미하는 가우리[句麗]라는 국명을 계속 쓰기도 했는데 대쥬신제국사에는 대가우리(=대씨가우리 大氏高句麗)로 표현되어 있다.
  • ※ 밝해, 고려 등이 고가우리[高句麗]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가우리[句麗]”라는 국명를 사용하였기에 대쥬신제국사에서는 이를 구분키위해 고구려=고씨가우리(고씨 왕조의 가우리), 밝해=대씨가우리(대씨 왕조의 가우리), 고려=왕씨가우리(왕씨 왕조의 가우리) 등으로 국명이 표현되어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를 성씨(姓氏)로 오인한 잘못임을 여기서 밝히며 앞으로 출간되는 대민족통사 시리즈에서는 고구려(고가우리)→위가우리, 대가우리→밝해, 고려→왕가우리로 국명이 지칭됩니다.
    참고로 고가우리[高句麗]의 고(高)자는 크다, 높다의 뜻 외에도 위(上)의 뜻이 함축되어 있어 위가우리(위대한 가우리, 큰가우리)로 표현하였음을 밝혀둡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 대쥬신제국사-추무태왕
  •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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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ngchl 180.69.134.149 2013-03-15

    앞으로 대한민족통사 종합판이 정식 출간 완료되면 (신라 후예 애신각라가 세운) 후김 건국, 어쨌든 그것도 '새로보는 역사'에 수록되면 좋겠습니다.

  • 서민교 125.185.122.163 2011-04-14

    빨리 잊혀질뻔한 역사를 깊이있게 알고싶군요 ㅎ

  • 다물넷 124.80.69.130 2007-01-17

    감사합니다. 만몽선생님께서는 현재 우리민족의 시원부터 근대사까지를 아우르는 민족통사시리즈를 집필중이십니다. 님의 의견은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주화 211.38.103.70 2007-01-17

    잘읽었습니다. 우리 종교사상사를 써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 임명환 218.154.62.156 2007-01-15

    빨리 다음 대쥬신제국사 올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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