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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제1장 단군역사개관(檀君歷史槪觀)-고대사개관(古代史槪觀)

우리 한민족의 생존적, 역사적 벨트(belt)는 바이칼 호수로부터 몽골초원
그리고 만주대륙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연결된다.

고인돌

우리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다.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있어 그들 선조의 찬란했던 문화를 자랑하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압도적으로 많은 고인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후손들은 고인돌의 엄청난 비밀을 풀지 못해 선조들의 찬란한 문화의 흔적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다행히도 뒤늦게 몇몇 지각 있는 분들이 나서서 세계거석문화협회(World Megalithic Association, 유인학 총재)를 창설하고 2000년 11월에 강화, 고창, 화순의 고인돌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世界遺産)으로 지정받기에 이르렀다. 아일랜드의 ‘보인계곡유적’이나 영국의 ‘스톤헨지’의 거석문화에 감동하고 있던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엄청난 고인돌 문화에 경악을 금치 못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전 세계인들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고 경탄함에도 그런 문화를 소유한 우리 국민들의 무관심에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고인돌문화를 단순한 농경문화의 흔적쯤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시대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본서는 고인돌의 비밀 중 몇 가지의 중대한 사실만이라도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고인돌의 조성시기에 대하여서는 각계의 다채로운 의견들이 있어왔다. 혹자는 종교의식의 산물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단순한 부족장들의 무덤정도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크기와 무게가 무려 100톤에 달하는 엄청난 건축물을 수백개씩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집단들의 문화적인 역량에 대한 것이다.

◀ 한국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고인돌은 ‘dolmen’을 말한다. dolmen은 켈트어로 탁자(dol)와 돌을 뜻하는 men의 합성인 dol-men(돌로 된 탁자)의 모양이라는 뜻이다. 돌멘은 돌기둥 위에 큰돌(뚜껑돌, 蓋石)을 얹은 분묘의 한 형태로서 일명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대체로 보아 고인돌 문화를 이룩한 종족은 수만년 전부터 이 땅에 먼저 들어와 선주하던 원토족(元土族)들이라고 보고 있다. 나중에 이 땅으로 진출해 와서 원토족들을 아우르고 배달한국[倍達桓國]과 쥬신제국[朝鮮帝國]의 전성기를 연 제2기 진출종족인 천산족(天山族)들이나, 쥬신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문명을 전파해 온 제3기의 주인공들인 알타이 부여족(夫餘族)들의 흔적을 역추적하며 조사해 보았으나 그들이 남기고 온 자리에 고인돌의 흔적은 없었기에 결국 고인돌 문화는 쥬신족이나 알타이 부여족들과는 상관없는 원토족들의 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 한반도의 주인들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동진을 거듭하여 천해를 거치고 북만주로 진입한 다음 만주대륙을 타고 좀더 따뜻한 남쪽으로 남진하여 한반도에 이르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아예 물을 건너 왜열도까지 진출한 후 큰 물에 가로막혀 종착지에 이르게 된 무리들도 있다. 따라서 그들이 남기고 온 문화의 흔적도 이를 역추적(逆追跡) 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남방으로부터 흘러온 약간의 이민족들도 우리들 한민족 속에 녹아들고 있지만 이들은 거대한 대양을 넘어와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그 수효가 상대적으로 적을 뿐더러 단 한번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일이 없었으므로 한민족의 소수민족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이러한 이론에 따라 살펴보면 지금부터 수만년 전 아직 사람들이 살 곳들을 정하지 못하고 천지를 헤맬 때 한국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들은 역시 정해진 루트를 따라 만주지역으로부터 차츰 남하하여 따뜻한 한반도의 남쪽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남긴 고인돌의 수효를 보아 알 수 있는데 전 세계에 보고 된 7만개의 고인돌 중 한반도에 무려 4만개가 있고 그중 남쪽지방에 2만 5천여기, 북쪽지방에 약 1만 4천여기 그리고 남만주 지방에 수천여기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숫자는 그들이 정착했던 시간과 비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북방대륙을 중심으로 꽃피웠던 단군쥬신족의 문화와는 관계없는 원토족들의 문화로 보는 것이다.

고인돌은 그 무게와 크기가 서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지만 대체로 40톤에서 큰 것은 100톤을 넘고 있다. 고인돌의 축조는 작업공정상 채석, 운반, 가공 및 조립이라는 비교적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한 기술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당시의 사회발전 수준과 사회의 구성, 조직적인 계급관계 등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가령 당시 사람들의 몸무게를 평균 60kg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견인력인 600N이므로 100톤의 중량을 움직이는데는 적어도 100명 이상의 노동력이 있어야 한다. 이 경우 직접적으로 노동에 투입된 100명의 건장한 장정들 외에도 또 다른 100여명의 보조 인원들과 기술자들, 노동에 직접 참가하지 않는 족장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을 추정해 보아 그 부족은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의 대부족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들 1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힘을 모아서 돌을 움직여야 하므로 100톤의 무게를 지탱할만한 끌 판을 제조해야 하고 이를 잡아 끌 든든한 밧줄이 적어도 20가닥 이상 필요하게 된다. 이 경우 한 개의 견인력 총량이 3000N이 되므로 새끼줄이나 칡넝쿨 따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이를 견뎌낼 만한 밧줄을 만들 생산 기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간단하게만 보이던 고인돌의 존재는 각 분야의 기술들이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사회가 결코 원시적이지 않았고 사회적인 조직과 규율이 엄격히 존재했던 문명적인 대부족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고인돌은 또한 당시 사람들의 제천의식과 천상경배 사상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수많은 고인돌의 뚜껑 표면에 새겨진 별자리의 표식으로 알 수 있다. 당시의 천문 관측기술은 북두칠성의 정확한 위치와 남두6성, 그리고 심지어는 달의 동적 궤도를 그린 것까지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들의 천문지식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 당시의 문화수준을 원시 농경사회의 수준으로 폄하하는 선입감을 버려야 할 것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유물 발견
1977년 3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뒤 1974년부터 주한 미2사단에서 근무하던 그렉 보웬 상병은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한탄강에 놀러갔다가 지형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이 일대를 뒤진 결과 신라 토기 파편과 주먹도끼 여러 점을 발견했다.

당시 한반도의 선사시대 역사는 2만∼3만년인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이상의 역사를 지닌 물증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주먹도끼 발견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선사역사 기록을 바꾼 쾌거였다. 당시 전곡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형 구석기 유물로 확인됐고 전곡리 일대는 사적 268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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