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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제2장 천산족 그리고 알타이족-쥬신족의 이동경로(移動經路)

천산 쥬신족[天山 朝鮮族]과 알타이 부여족(Altaii-夫餘族)은
한민족을 구성하는 4개의 족파 중 가장 중요한 양대 산맥이다.

쥬신족의 이동경로(移動經路)

우리 민족(천산-쥬신족과 알타이 부여족)이 천해(바이칼호수) 일대에 머물었다가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그 발자취가 증명된다. 몽골족의 발자취를 추적하던 인류학자 하웰스(W.W. Howells)는 그의 연구 논문에서 몽골족을 옛 몽골족(Early Mongoloid)과 새 몽골족(Late Mongoloid)의 둘로 나누었는데, 그중 약 1만년 전 전후로 하여 옛 몽골족이 남쪽(동쪽)으로 이동했고, 그 후 더 북쪽(서쪽)의 옛 시베리아(중앙아시아)족들이 이동해와 정착하면서 미처 본대와 함께 떠나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과 섞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최근 일본 오사카 의과대학의 마쓰모도(松本秀雄) 교수는 항체유전자(抗體遺傳子)를 이용하여 연구하던 중 몽골족의 혈청 중에 Gmab3st가 있음을 발견하고 바이칼호수의 북쪽에 있는 브리야트(Buryat)족의 혈청검사를 실시해 본 바가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브리야트족 중에서 문제의 Gmab3st를 52%,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중에서 무려 41%와 45%를 발견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다 같은 민족인 한국과 일본인들이 동쪽으로 이동해 올 때 뒤에 남겨졌던 또 다른 동족의 무리를 뒤늦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브리야트와 몽골족이 우리 민족과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던 증거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지만 그중 하나만 예를 들어 보면 한국의 민족명인 밝달(朴達, 倍達)은 몽골어로 박달-bakdal(baxdal)로 발음되며 그 뜻은 즐거움(樂浪)을 의미한다. 알타이어의 어근(語根)을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현재까지 학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B.C 4000년에 이란고원 일대는 벌써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고 있고, 이보다 약간 늦은 B.C 2500년을 전후하여 이집트나 모헨다조(인더스문명), 이리두(二里豆文化•B.C 2080~1580), 서만주(西滿洲)의 하가점(夏家店文化)하층 문화가 거의 동시에 청동기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만주지방의 청동기 문화는 김산호의 한국통사 회화극본 ‘대민족통사’ 제1권 ‘치우천황’ 편에서 이미 설명된 바 있는데, 청동기 생산에는 동광과 주석광 등을 분별해 내는 제련기술은 물론, 용도에 맞는 합금비율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하고, 광석의 주조에 이르는 기술공정도 알아야 하며, 광석을 녹이는 시설과 용해된 쇳물을 다루는 거푸집 등을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체계적인 기술공들이 있어야만 가능했음을 생각해 보면 당시에 벌써 상당한 수준의 기술체계에 도달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당시를 마치 원시사회처럼 인식해 온 잠재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핀란드의 유명한 고고학자 탈그렌(Tallgren)은 청동기 시대는 B.C 1500년경 서부 시베리아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동시대 다뉴브 지역의 온예티츠(Aunjetitz) 문명과 연결되었으며, 약 100년 후에는 서부 시베리아에서 제작된 도끼와 창의 머리부분 형태가 비슷한 것이 중국의 출토물에서 발견됨을 들어 그 기술이 동양에 전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보는 것은 서양의 문명발전이 동양에 비해 선진적이었을 것이라는 잠재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들어 만주의 요령성 건평현 홍산 우하량에서 B.C 3000년경에 제작된 청동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우리 조상들의 청동기가 탈그렌의 주장을 무려 1500년이나 앞지르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화적 교류가 불과 100년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놀랄만한 가정은 광활한 초원길을 종횡무진으로 이동하는 기마민족의 기동성과 그 활동범위를 비교적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이러한 관찰은 실제로 넓은 초원을 승마로 달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결론적으로 오래전 옛날에도 바로 이런 문화의 교류는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동서양은 서로 격리된 채 제각각의 문명을 따로 발전시켜 왔다는 선입관에 빠진다. 이것은 동양은 즉 중국이고 중국 이외의 문명은 모두 야만인들의 것이라는 서양인들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중국과 서양의 연결고리를 험악한 고산의 계곡이나 살인적인 사막을 통과해야만 하는 뱀처럼 길고긴 비단길을 유일한 통로로 생각하고, 비단길이 발견되기 전의 동서양 문화는 서로 단절된 상태에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이들의 연구논문을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의 나태한 학문적인 태도에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그 동안 어려운 경제적인 환경과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정치적인 조건들을 극복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외국의 서적들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여 왔었다는 점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타성에 젖은 행태를 그 모든 조건들이 환상적으로 변한 오늘날까지도 수정하지 않고, 또한 고통과 위험이 수반하는 모험을 꺼리는 경향이 있음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그동안 안방학자들이 책상 앞에서 배우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그 모든 역사적 실체는 현장검증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에게 권하노니 지금부터라도 제발 안방을 벗어나 현장으로 달려가 제 눈으로 역사의 실체를 확인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주장이 잘못 되었음을 확인하면 즉각 용기있게 시정하는 올바른 학문적 태도를 부탁한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 중국에 대하여 가졌던 잘못된 시각을 올바르게 교정해 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독자들이 먼저 해야 할일은 지금까지 눈에 익숙한 평면지도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고 지구의 실제 모양인 둥근 지구본을 머릿속에 입력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줄자를 들어 중국의 넓이를 재어 보라. 그 넓었던 땅이 갑자기 좁아지는 한편, 시베리아의 막막하기만 했던 넓은 대지는 급격히 좁혀져 동서양을 잇는 북쪽 초원의 거리가 실제로 얼마나 가까운 거리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다시 지구본에서 눈을 떼고 중국의 영토를 마음속에 그려보면 또 다시 옛날부터 익숙해져 있던 평면지도의 왜곡된 중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중국의 모습은 방금 전의 실험에서 보듯이 실체가 아닌 과장된 왜곡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곡되지 않은 중국의 실제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중국의 서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개의 엄청난 산맥이 서로 엎치고 덮치듯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헤르시니안(Hercynian) 조산운동기에 거대한 땅덩어리가 융기와 고립을 반복하다 형성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천산산맥(天山山脈)과 알타이산맥(Altaii 산맥)이라고 부른다. 바로 우리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4대 주류 민족 중 두 민족 선조들의 시원지(始原地)들인 것이다.

천산산맥 남쪽의 반대방향으로는 우리의 조상들이 희마리(흰머리)산이라고 부르던 거대한 히말라야산맥이 양팔을 크게 벌리고 중국의 남방진출을 가로 막으며 엄청난 위용을 뽐내고 서 있다. 이곳에는 험악한 산맥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나운 티베트의 산악족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살면서 중국의 숨통을 압박하고 있다.

이들 산맥들은 서로 연결되어 살인적인 타림분지를 껴안고 있는데, 그 안쪽으로는 새들도 두려워서 피한다는 죽음의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이 있다. 사막의 중간에 몇 개의 오아시스가 있으나 그나마 전통적인 기마민족이며 우리 동이(東夷) 9족의 하나인 풍이족1)의 터전이어서 중국의 서방진출을 봉쇄하고 있다.

1) 풍이(風夷)
중국인들은 흉노(匈奴)라고 한다. ‘훈’이나 ‘풍’ 혹은 중국식 발음으로 ‘슝’으로 불렀으면 좋았을 것을 남을 존경할줄 모르고 제 잘난 것만 아는 중국인들은 건방지게도 불필요하게 ‘종 노(奴)’자를 덧붙여 멸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훈족은 오랜 세월동안 중국인의 노예(종)이기는커녕 중국왕실의 공주를 헌납받고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해주는 진정한 중국인의 주인이었다. 참고로 ‘훈’족들은 그들 스스로를 풍(風), 훙 혹은 훈(Hun)이라 불렀음을 밝혀둔다.

이번에는 중국의 북쪽을 보자. 타클라마칸 사막의 접점인 놉노르(Nop Nor)에서 만주의 경계인 싱안링산맥(興安嶺山脈)까지 연결되는 중국의 북변 전체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에는 지옥 같은 모래판의 대지 고비사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죽음의 사막을 무사히 건너 초원에 다다른다 해도 이번에는 공포의 유목민족인 몽골, 선비, 동호라는 소름끼치는 강족들이 번갈아 지키고 있어서 중국의 북방진출 역시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에 처해있다.

결국 그들이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통로로 남은 것은 동북의 북경지역으로 통하는 좁은 관문뿐인데 이곳으로부터 양자강 이남에 이르는 황해안 연안마저 유사 이래 동이족의 관할지역이어서 그들은 사방의 포위망에 갇혀 고단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신세였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인 형세로 인하여 중국의 자체문화는 형편없이 뒤떨어졌고, 제 나라의 땅이나 일구고 사는 농민의 생활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노예같은 생활을 바라보는 주위 사방 열강세력들의 입장은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할 때 무방비 상태의 중국 땅으로 쳐들어가 그들이 일궈놓은 곡식을 원하는 만큼 뺏어올 수 있는 곡창으로 보였다.
이렇게 시작된 주위 열강들의 약탈경쟁은 곧 점령지역에 주저앉아 중국인들을 노예로 활용하는 식민지 개척으로 변해갔고,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종주국과 연결고리를 끊고 자립하는 식민지 자치국가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게 되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 놀라운 김산호의 논리가 쉽게 이해되기 힘들겠지만, 17세기부터 불어닥친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확보 경쟁을 연상해 보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무기의 혁명인 막강한 화포의 개량에 성공하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총이 활의 위력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 국가들은 아직 총을 갖지 못했던 국가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정복활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가까운 아프리카대륙의 거의 전체를 무력으로 정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 등 전 세계 모두를 무차별로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상의 그 어떤 곳이 되었든 일단 정복에 성공하면 피점령국의 백성들은 곧 노예로 전락되었으며 그들의 문명은 파괴되고 종교와 문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언어와 문자까지도 점령국의 것을 표준으로 따르도록 강요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토산품을 자유롭게 착취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즉 피점령자가 소유했던 모든 유산은 점령자의 소유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 정복자의 법이었다.

이와 같은 전쟁의 법칙은 그 도덕성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인류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관습적인 행위로서, 그 옛날 사방의 열강 속에 포위되어 세상과 고립되었던 중국이라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출간된 ‘대민족통사’ 제1권 ‘치우천황’을 통하여 중국 땅에 세운 배달한국 최초의 식민지국가인 복희나라의 탄생과정을 읽은 바 있다면 당시의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여명기에 중국으로 침입한 주변 열강의 통치자들 역시 정복자의 권리를 행사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정복지를 통치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원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자기들이 향유하고 있던 문명의 이기들도 함께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국인 노예들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정복자들 간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이기심은 결국 정복자들 간에 전쟁으로 발전되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듭하면서 주위 열강들의 전쟁문화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을 반복하면서 주위 열강들의 문명과 문화가 식민지(중국) 내에서 서로 뒤엉키며 남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중국에서 발굴되는 거의 모든 상고시대의 문물들은, 당시에 노예생활을 강요당했던 화하족들의 토족문화와 유물은 거의 없고, 그들을 한때 정복하여 지배자로 군림하며 살다가 빠져나갔거나 혹은 그곳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정복자들이 남긴 이민족들의 유물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필자가 이처럼 감히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중국(화족) 고유의 문물로 알려진 것의 거의 모든 것이 사실은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부르는, 그러나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국을 정복하고 식민통치를 했었던 집단들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된 선진 문명의 발상지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하며 전수 혹은 전달된 문화였다는 것을 문명발생지역의 유물들과 직접 비교하여 쉽게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세계적인 문명의 발상지들인 이란의 고원문화, 터키의 흑해문화, 메소포타미아 문화, 인더스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카라노브 초원문화, 알타이 문화 등등이 모두 기마족의 활동지역인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중국이 제아무리 독자적인 문화를 개발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발전의 속도면에 있어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정보를 서로 긴밀히 교류하며 그로부터 더욱 진보된 문화의 재창조를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따를 수는 없다. 특히 예술의 세계에선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 제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천재적인 예술가라 하여도 어느 정도만큼은 타인의 작품을 참고한 후, 그로부터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해지며 더욱 개량된 작품이 재창조 되는 것이 일반 상식에 속하는 패턴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볼 때 우리민족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천산 쥬신족과 알타이 기마민족들은 그들의 생활 터전인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길을 통하여 일찍부터 수준 높은 문화적 생활환경과 고도의 전쟁무기 제작기술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계의 여러 문화권이 새로운 문화를 거듭 발전시키며 전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고립무원으로 포위상태에 빠진 중국의 화족들은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채 문화적인 답보상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열강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우리가 무심코 위대한 중국문화의 유산이라고 경탄하던 문물들이 사실은 그들이 야만족이라고 우겨대는 주위 열강들의 것이거나, 그들이 제각각 중국을 정복하고 식민통치할 때 흘린 것들을 모델로 하여 재생산된 복제품의 수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2)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의 실체가 너무나도 엄청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너무 가까이 밀착하고 있어서 중국의 실체를 판단하는데 존재하는 엄청난 왜곡현상을 볼 수 없었던데서 기인한다.
다행스럽게도 21세기의 우리는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그리고 그동안 불가능하게만 생각되었던 역사의 현장을 방문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 속속 발명되고 있는 여러가지 현대적 과학장비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수집된 무한한 정보들을 컴퓨터로 비교 분석하여 역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환상적인 조건에서 역사의 전입 과정과 시간적인 차이를 입체적으로 비교 분석해 보니 그동안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다고 생각되었던 것과는 달리 적어도 10세기 이전까지는 문화의 강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서쪽이란 유럽의 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시아의 서쪽인 오리엔트와 이들 문화와 접속하고 있던 초원의 중앙아시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있는 극동의 시각으로 서쪽이라 칭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중국을 중원으로 호칭하고 현재 중국이 점령하고 있는 전체의 지역을 중국의 역사적인 영토로 보는 인식을 크게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이와 같은 기본적인 인식의 바탕위에 본편 단군조선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자.

2) 이와는 정 반대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사례도 있다.
우리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또 중국의 상징으로 이야기 되는 만리장성을 잘 알고 있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춘추시대의 제(齊) 나라때 축조가 시작되었다. 성의 축조는 B.C 214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때부터 본격화 되어 명(明) 때인 16세기까지 약 200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축조한 총연장 5000Km 이상의 국경 방어선이다.

진시황 때는 인구중 3명에 한명이 축조에 끌려갔었다고 하고, 노역자로 끌려가면 돌아오지 못했으며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속설에는 장성의 건설로 10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하며, 명나라 때인 15세기에 증개축하면서도 10만명 이상이 노역으로 죽었다고 전한다.

그야말로 백성의 피로 지어진 셈인데, 중국인들은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두려움의 크기는 곧 장성의 크기일 것이다. 흉노족을 비롯한 북방세력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흉노는 바로 동이 9족중 풍이족이며 신라와 가야의 세력과 동일인들이다. 또 북방세력이란 바로 우리 한민족이 세력을 말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백만 백성의 피로 얼룩진 압제의 상징이며, 우리에 대한 두려움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관점일 것이다. 또 그들 스스로 만리장성으로 우리 한민족과의 경계를 그었으니 이 또한 생각해 볼 일이 될 것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 본 도서는 김산호의 ‘대민족통사 시리즈 기획의 한 부분으로 가능한대로 ‘한님’, ‘한국’, ‘한민족’, ‘배달한국’ 등의 명칭과 ‘감 등의 명칭에서 옛 글은 아래아 ‘’이나 ‘’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어(死語)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있어 시각적인 상징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집과 가독성의 관점에서 모든 글자에 적용키는 어려우므로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비교적 민족적 정체성이 강조될 만한 내용이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경우 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도서 내에서 혼용이 되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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