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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제4장 시조단군의 유년시절

민족의 시조 단군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한국민의 어머니 웅녀황비(韓人聖母 雄女皇妃)

여기서 우리는 현명하고 정숙한 그러면서도 적극적인 성품의 웅녀황비의 행동을 보며 전통적인 한민족 어머니상의 한 표상(表象)을 보는 듯하다.
우선, 그녀가 친정인 감국[熊國]에 있었을 때 그녀는 감족의 민족적인 단결과 평안을 위하여 여성단군으로서 부여된 책무를 충실히 해냄으로써 한국여성의 강인한 책임의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고, 감족이 이민족인 알타이 부여족의 침략을 받고 위기에 처하자 과감하게 천산 쥬신족과 정략적인 국혼(國婚)을 성사시킨 후 천황군을 끌어들여 부여족 최초의 침략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조국이 국난에 처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한국여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웅녀황비는 단군을 잉태하고 산월이 가까워지자 친정으로 돌아와 단군를 출산하는데 이는 감족과 쥬신족의 결속된 연결고리를 만방에 과시하는 의미가 있으며, 아울러 쥬신족 황자(皇子)의 고향땅이 감족의 터전인 백두산하(山河)가 되게 함으로서 감족의 무궁한 안전을 보장받도록 하는 영특함을 보이기도 한다.

웅녀황비의 뛰어난 지혜는 단군의 어머니로서도 빛나게 되는데 쥬신족 혈통을 이어받은 적통의 제1황자와 제2황자에 이어 제후국 출신의 웅녀황비 소생인 제3황자 단군으로 하여금 황태자의 자리를 이어받도록 하는 위업을 달성시킨 것이다. 이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신시 배달한국의 한웅 정부내에 이미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중신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적통 제1, 제2황자들의 위협에 맞서 제3황자인 단군을 살아남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웅녀황비는 단군을 친정에서 출생시켰고, 이 과정에서 단군에게 민족생존의 희망을 걸고 있는 감족들의 결연한 의지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한편, 제국의 서변에 둥지를 틀고 있는 부여족들의 강력한 기마군단과 예사롭지 않은 전투력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커붉단 한웅은 황태자 지명문제보다 감족과 쥬신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시켜 제국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격변하는 정세는 웅녀황비로 하여금 계속되는 황실내부 후계자 싸움의 초점에서 벗어나 어린 단군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게 하는 환경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제 황비의 다음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운명적인 황태자 선발전을 위하여 어린 단군을 황태자의 학식과 자질을 갖춘 인물로 키우기 위한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 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점도 자식들의 성공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한국 어머니들의 전통과 다르지 않다.

소년 단군은 과연 어떤 문자를 통하여 학문수업을 하였을까? 당시는 아직 한글이나 한문자가 정착되지 않은 문자발달의 여명기로서 서로 불완전한 글자들이 무수히 난립하고 있던 시대로 보인다.

우선 우리의 옛 사서에 보이는 기록 중 문자에 관한 최초의 것은 녹도문(鹿圖文)이다. 한웅천황 치세 중 최대의 업적중의 하나로 단연 녹도문 창조를 들 수 있고,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문자로 기록된다.

녹도문의 창조는 국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을 천문(天文)이 아닌 인간들의 문자로 기록하여 보급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천황의 특명을 받은 신지혁덕(神誌赫德)1)은 모래밭 위에 난잡하게 찍혀있는 사슴들의 발자국을 본떠서 소위 사슴그림글자인 녹도문(鹿圖文)을 완성하였다.

또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고조선 시절에는 신치의 사슴글자, 결승(結繩-노끈매듭), 산목(算木-셈막대기) 등의 시조 문자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宋)나라 때의 ‘속박물지-이석’은 진국(辰國), 부여(夫餘)에서는 한문식의 내려쓰기와는 다르게 옆으로 가로쓰기 하는 글이 있었고 또 ‘결승(結繩)’과 ‘계목(쫶木-목판에 글 새김)’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태백일사(太白逸史)’에서는 고구려 영양왕(쳉陽武元好太烈帝) 11년(A.D 600)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유기(留記)를 요약하여 신집(新集-5券)을 지었다고 기록하면서 태백산의 푸른 벽에 독특한 귀신글자가 새겨있고 고조선에는 산목(算木)이 그리고 부여에는 전목(佃木)이 있었다고 했다.

한편,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蹟-최국술, 1925)’에서는 태백산에 단군전으로 쓰는 비석이 있는데 해석하기가 힘든 것을 최치원이 번역하였다고 하여 아직 세상에 소개되지 않은 또 다른 글자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가림토 : 가림다문(加臨多文)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이 창조했다고 알려진 한글의 원형이다. 가림토는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더 개량되고 재창조되고 나서야 오늘날 인간이 창조한 글들 중 가장 훌륭하다는 위대한 한글로 완성되게 된다.

대쥬신제국 제3세단군 가륵(大朝鮮帝國 第3世 嘉勒壬儉)의 치세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륵 2년 경자년(B.C 2181, 임검이 수두[蘇塗]를 많이 세워 삼륜구서(三倫九誓)2)를 가르쳤다. 이해 봄, 을보륵 박사가 임검의 특명으로 신치(神誌)의 글3)을 좀더 개량시킨 국문정음(國文正音) 38자를 만들어 바쳤는데 이를 가림토라고 한다.”

1) 신지(神誌) : 신지는 고대 문자를 주관하던 기관(벼슬)의 이름이고 혁덕(赫德)은 신지의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다. 신지의 ‘지’는 우리말의 ‘치’로 왕이나 한집단의 통치자, 큰 귀족 혹은 대인을 이르는 말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은 기록자의 선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권1에는 신시(神市)로 썼고 같은 책의 권3에서는 신지(神誌)로 다른 글자를 선택하여 썼으며,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은 신지(臣智), 진서(晋書)의 동이전은 신지(臣芝), 그리고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東夷傳)에는 대자(大者-馬韓各有長帥大者 自爲臣智)라고 각각 표기하고 있다.

결국 우리말 ‘신치’를 소리말이 아닌 중국식 한자로 표기함에 있어서 神市, 神誌, 臣智, 臣芝에 이어 종국에는 신치의 뜻을 풀어 大者라는 글자를 사용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상의 예만 눈여겨보아도 한자로 기록된 우리의 역사서를 읽을 때 한자(漢字)의 뜻풀이는 무모하며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적는 방법으로 관리들의 글이라는 소위 이두(吏讀)식의 발음을 버리고 반드시 우리의 옛 발음을 되찾아 읽을 때만 정확한 본뜻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2) 삼륜구서 : 삼륜(三倫)은 애(愛), 예(禮), 도(道)를 말하고 구서(九誓)는 효(孝), 우(友), 신(信), 충(忠), 손(遜), 렴(廉), 의(義), 지(知), 용(勇)이다.

3) 신치의 글 : 한웅천황때 신치[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도문(鹿圖文)을 쥬신제국때 이 벼슬을 존속시켜 글을 일차 개량시켰으나 아직도 글이 불완전하여 나라에서는 지속적인 개발을 시켰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 본 도서는 김산호의 ‘대민족통사 시리즈 기획의 한 부분으로 가능한대로 ‘한님’, ‘한국’, ‘한민족’, ‘배달한국’ 등의 명칭과 ‘감 등의 명칭에서 옛 글은 아래아 ‘’이나 ‘’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어(死語)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있어 시각적인 상징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집과 가독성의 관점에서 모든 글자에 적용키는 어려우므로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비교적 민족적 정체성이 강조될 만한 내용이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경우 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도서 내에서 혼용이 되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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