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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제2장 천산족 그리고 알타이족-단군신화와 무씨사당석실의 수수께끼

천산 쥬신족[天山 朝鮮族]과 알타이 부여족(Altaii-夫餘族)은
한민족을 구성하는 4개의 족파 중 가장 중요한 양대 산맥이다.

단군신화와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의 수수께끼

산동성 가상현에 있는 무씨사당 석실

일부 강단사학자과 서양종교 숭배자들의 주장을 보면 단군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한 역사일 수는 없고, 단순한 민간 전래의 신화일 뿐인데 그 유래는 13세기경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난을 이겨내고자 비로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단군신화 속에는 불교적인 요소와 신선사상의 요소, 산신숭배 그리고 도참사상과 같은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어 거짓임을 알 수 있고 또 곰과 사람이 혼인하여 사람이 나왔으니 허황된 괴력난신이라면서 단군을 부정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지적해 보면 이런 사람들 중 누구하나 인간을 흙으로 빚어 탄생시키고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 성경은 거짓이고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소위 실증사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의 오랜 역사를 없애버리려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일인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던 것인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왜인들의 악의적인 음모를 모르고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넋 빠진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인 것이다.

1947년에 발표된 ‘단군신화의 연구(김재원)’에서는 중국 산동성 가상현(嘉祥縣) 자운산(紫雲山) 아래에서 발견된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石室)의 돌벽에 새겨진 그림글을 면밀히 조사하고 그림의 내용이 단군의 설화임이 분명하다고 증언하면서, 13세기에 단군신화가 만들어졌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악의적인 주장을 한동안 잠재웠다.

석실그림-1

이 그림의 원본은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영광전(靈光殿)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으로 표현 형식은 음각에 의한 선묘(線描)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부조적(浮彫的)인 것도 있고 채색(彩色)을 입힌 것도 있다.

조각 그림은 석조의 분묘(墳墓)나 사당(祠堂)의 내벽(內壁), 석관(石棺), 석주(石柱) 등의 표면과 전(塼), 축묘(築墓)의 석문(石門) 등에 새겨진 장식화상(裝飾畵像)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제의 그림은 후석실의 제 3석에 4층으로 그려진 것들로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단군의 신화를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온 것들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의 그림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아래에 보이는 석실그림-1을 살펴보면, 지상의 사람들로부터 영접을 받으며 하늘로부터 천마를 타고 하강하는 한웅과 사람들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들고 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아래에 있는 그림-2에는 나팔을 불고 있는 바람신 풍백(風伯)과 북을 치고 있는 구름신 운사(雲師) 그리고 물통을 쥐고 있는 우사(雨師)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문제의 곰과 호랑이도 있다고 했다.

석실그림-2

민족통사를 그리는 본 필자에게 있어서 단군의 개국신화야 말로 한민족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이 석실의 그림내용은 결코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귀중한 물증(物證)이었다. 따라서 이 그림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김재원씨가 보았다는 내용과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이 보이지 않아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물론 학자들마다 그림을 해석하는 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단군의 역사를 그리기 위하여 작은 역사의 흔적도 놓치지 않으려는 필자의 끈질긴 노력에 비하여, 단군과 연결시킬 수 있는 묘사를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림-1과 그림-2는 독자들도 쉽게 판독할 수 있도록 컴퓨터로 이미지를 좀더 선명하게 수정한 것이다.
필자는 먼저 이 중요한 무씨사당 석실그림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그림들을 따로 구별하는 작업을 시작으로 그림 하나하나의 복장과 역할 등을 전체적인 환경에 대입시켜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이 문제의 그림이 아쉽게도 단군신화와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그림의 내용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분석하게 되었다.

다음은 석실그림에 대한 필자의 결론이다.
그림의 내용은 결론적으로 해모수(解慕漱) 신화이다.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의 이야기는 앞으로 출간될 ‘부여사(夫餘史)’편에서 자세히 이야기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석실그림과 연결된 부분만 언급하기로 한다. 독자께서는 다음에 소개하는 사료의 내용과 연결지어 그림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기 바란다.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상(北夫餘紀-上)편을 보면 : “단군쥬신[檀君朝鮮] 47세 고열가단군 57년, 임술년 4월 8일에 23세의 천왕랑(天王郞) 해모수(解慕漱)가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을 쓰고, 허리엔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다섯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500명의 신하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와 정무를 보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다시 그림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우선 둥글게 말려 엉켜있는 기하학적인 구름의 형태를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구름위로는 지금까지 천마(天馬)라고 해석된 용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관찰해야할 점은 용들의 모습이 구렁이 몸통에 짧은 다리를 가진 동양의 전통적인 용이 아니고, 말처럼 긴 다리에 날개를 달고 있는 중앙아시아식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의 용은 훗날 훈족이나 스키타이족의 정복활동 중 서방세계로 전파되어 전해오는 서양식(西洋式) 용(龍, Dragon)의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기마민족의 관점에서 묘사되는 용’인 것이다.

오룡거 위의 주인공은 천왕랑 해모수의 모습인데 머리에 까마귀 깃털로 된 오우관(그림-2에 더 똑똑히 보임)을 쓰고 어깨에는 망토를 걸치고 있다.
주위에는 해모수를 호위하는 종자들이 보이는데 이들은 모두 원통형의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이런 형태의 모자 역시 주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의 풍습이다. 행렬의 앞에는 면류관을 쓴 임금과 그의 신하들이 엎드려 천왕랑의 일행을 맞고 있다.

그림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보면, 중앙아시아를 출발한 알타이 부여족 해모수 군단의 동양 정복활동을 그린 것인데, 그것은 용을 타고 진출해 오는 알타이 부여복식의 대군단 앞에 중국복식의 귀족들이 엎드려 항복을 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림-2의 내용은 그림-1의 이야기에 이어 지상(인간세계)에 내려온 해모수의 수레를 사람들이 끌고 정복된 성(궁궐-아치형의 구렁이 모양 용)안으로 진입하는 장면과 이로 인해 일어난 궁궐내의 혼란상을 묘사하고 있다.

석실그림-3

그림-3은 선진적인 무기로 무장한 알타이 부여족들의 침입에 맞서 격렬히 저항하는 피정복 집단(산동지역의 중국인들? 혹은 선주 천산 쥬신족?)의 전투장면들이다.

석실그림-4

그림-4의 상단 그림은 정복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천상의 모습이고, 하단은 천왕랑에게 복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들의 모습이다.

석실그림-5

그림-5역시 그림-4와 비슷한 내용인데 이는 신 정복자의 엄청난 세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면, 알타이 부여족들은 이미 정복활동을 끝내고 새로 정복한 땅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곳에 새나라를 입국하는 과정에 들어간 듯 보인다.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아, 새로운 위계질서가 정해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장관들이 새로운 임지로 이취임하는 등의 활기차고 희망찬 분위기가 읽혀지고 있다.

이 그림은 그림의 배열상 부여제국의 개국을 축하하러 오는 외국의 사신 행차로 보인다.

무씨사당 석실의 그림들은 이외에도 당시의 사회상을 설명하는 많은 정보들을 담고 있는데 시장(市場)의 분위기나 제염장(製鹽場) 등의 풍경은 흥미 있는 연구대상이 된다. 특히 청국(淸國) 건륭황제(乾隆皇帝)시에 발굴한 무량석실(武梁石室) 화상석(畵像石)의 제3석에 나타난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진국(秦國)의 형가(荊軻)와 자객(刺客) 등의 묘사들은 모두 당시의 역사적인 실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양의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중국을 움직일 수 없는 천하의 중심으로 놓고 동양에서 출토된 고대문물들을 모두 자생한 것으로만 보았고, 또 동양에서 발생된 모든 고대사 역시 중국과 연결지어서만 해석하려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주에서 촬영된 지구의 사진을 통하여 중국이 위치한 지형이 남쪽으로는 히말라야산맥, 서쪽으로는 쿤룬 산맥과 천산산맥, 서북방면은 알타이산맥, 북쪽은 고비사막 등으로 삼면이 완전히 막혀있고, 황해로 통하는 동쪽방면마저 동이족의 활동영역이어서, 지금까지 한족문화로 분류했던 중원문화가 사실은 그들을 식민 통치했던 주변 열강세력인 소위 사이(四夷)들의 문화였거나 혹은 그들에 의하여 전달된 외부 세상의 문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벗어나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고대사의 진실에 접근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새로운 방법으로 역사를 보고 읽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안방에 앉아 풍부한 중국 고서들의 기록만 믿고 이를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의 기록들이 너무나 많이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음을 현장방문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세상에 깔린 엄청난 정보를 컴퓨터 하나로 펼쳐볼 수 있고 원한다면 달나라 여행도 꿈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역사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자세도 문헌 중심의 연구나, 남의 연구를 다시 정리해오던 구태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실재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역사서가 말하고 있는 사건들의 발생 가능성 여부를 먼저 검증해 봐야함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발굴되는 새로운 물증들을 과감하게 옛 기록에 대입시켜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밀 분석한 후 나타나는 결과에 따라 역사서의 오류들을 바로잡아 다시 정리함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만주(滿洲)의 요령성(遼寧省)은 유사(有史) 이래로 우리 민족의 심장부로서 그곳에서 발생된 모든 문화의 유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유물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리를 머릿속에 넣고 다음의 설명에 집중하여 주기 바란다.

근세에 들어 신석기 문화인 홍산문화(紅山文化)의 중심부인 현 요령성 건평현(建平縣) 우하량(牛河梁)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인 신시 배달한국 제10세 갈고(葛古-독로한) 한웅천황이나 제11세 커야밝[居耶發] 한웅천황의 치세에 해당되는 B.C 3000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우리조상들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사학계를 크게 흥분 시키고 있다.

최근에 만주 요령성 건평현 우하량의 제5지점 2호총에서 발굴된 기마용 가죽장화를 신은 나녀상(裸女像)

1999년 만주 요령성의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에서 출토된 고깔모자를 쓴 알타이 부여족 여인

그 중에서 특별히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제5지점 2호총에서 발굴된 나녀상인데, 이 여인이 신고 있는 가죽 장화와 오랜 기마생활로 인하여 다리가 안쪽으로 휘어져 있는 것을 통하여 이 집단이 기마족의 생활습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느 지역으로부터 이동해 왔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적봉시(赤峰市) 송산구(松山區)에서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같은 집단의 출토 유물인 무녀상(巫女像)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무녀상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런 타입의 고깔모자는 전통적으로 알타이 부여족의 습속이어서 이들 집단이 신시 배달한국 시대에 벌써 이곳까지 진출해 왔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알타이(Altaii) 부여족(夫餘族)의 역사적 시원에 관해서는 앞서서도 말했듯이 김산호 회화역사 시리즈 대민족통사 제3편 대제독 이순신(大提督 李舜臣), 제4편 백제와 왜(百濟와 倭)에 이어 나올 제5편 ‘부여사’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나 본 ‘단군조선’편에서도 단군의 천하통일 정복전쟁에 커다란 장애세력으로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 알타이 부여족(훅泰•夫餘族)의 실체를 무시하고는 단군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부여족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조금 더 살펴보면서 단군의 역사에 대한 실체에 접근해 보도록 하자.
우선 본편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알타이(Altaii) 부여족(夫餘族)’과 ‘천산(天山) 쥬신족[朝鮮族]’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우선해야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형성을 간단히 나누어 보면, 우선 제1기 정착 집단(定着 集團)으로 수만년 전부터 이 땅에 선주하고 살아오던 고인돌 문화의 주인공 원토족(元土族)들을 말할 수 있다. 다음 제2기의 이민 집단(移民集團)은 천산지역을 출발하여 천해(바이칼) 지역에 머물러 한님시대[桓仁時代]를 거치고 다시 동진하여 만주대륙에 우리민족 최초의 나라인 신시 배달한국과 단군조선을 세우니 이들을 구별하여 ‘천산 쥬신족’으로 부르고자 한다.

제3기 이민 집단에 해당하는 부여족들은 천산에 이웃한 알타이산맥 너머에 자리잡고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족이었다. 부여족과 쥬신족은 처음에는 서로 멀리 있어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부여족이 쥬신족의 뒤를 따라와 천해일대를 장악하더니 또다시 동진을 계속하여 흥안령(興安嶺)을 넘으면서 선주한 쥬신족과 충돌하게 되었다.(본편 042~043쪽의 지도를 참고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이다.)

초기에 쥬신족의 강력한 힘에 가로막혀 흥안령을 넘지 못하던 부여족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넓게 퍼져있던 그들의 부족들이 계속적으로 합류하여 오면서 강력한 집단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등장과 활동상황을 전하는 사서들이 너무나도 여러가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조차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데 종종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본편은 거의 동시대에 우리 역사 속에 함께 등장하는 이들 집단을 천산 쥬신족과 구별하여 ‘알타이 부여족’이라 불러 혼란을 막고자 하였다.

다음의 예들은 각종 고사서에 등장하는 알타이 부여족의 이름들이다. 본서가 왜 알타이 부여족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이해 할수 있을 것이다.

① 부여(夫餘), ② 불에[不興], ③ 부유(鳧臾), ④ 포예(逋濊), ⑤ 밝쥬신[發朝鮮], ⑥ 부리(夫里), ⑦ 예(穢), ⑧ 예맥(濊貊), ⑨ 개마(蓋馬) 등...

이 외에도 알타이 부여족은 벌(伐), 불(弗), 불쥬신(卞•弁朝鮮), 영치[令支], 리치[離支], 산융(山戎), 가우리[藁離國], 맥(貊), 호족(虎族, 貊族), 변(弁)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민족 집단이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이유는 유목민족의 특성으로 알타이 부여족 안에 여러 개의 부족들이 있었음에서 찾을 수 있고, 이들의 동진(東進)이 천산 쥬신족의 경우처럼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각각의 부족 단위로 서로 다른 시간대에 동쪽으로 이동해 온 사정에서 기인한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 본 도서는 김산호의 ‘대민족통사 시리즈 기획의 한 부분으로 가능한대로 ‘한님’, ‘한국’, ‘한민족’, ‘배달한국’ 등의 명칭과 ‘감 등의 명칭에서 옛 글은 아래아 ‘’이나 ‘’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사어(死語)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민족의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있어 시각적인 상징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편집과 가독성의 관점에서 모든 글자에 적용키는 어려우므로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비교적 민족적 정체성이 강조될 만한 내용이나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경우 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동일한 도서 내에서 혼용이 되더라도 독자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 대쥬신제국사-추무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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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