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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가우리[高句麗]와 중국의 북방패권전(北方覇權戰)-1

대쥬신제국사(1993년 동아출판사刊)에서 연개소문과 관련된 내용만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서기 597년, 가우리의 영양왕(纓陽王) 8년,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隋文帝)는 기고만장하여 역사 이래 천적인 동이족의 패자(覇者) 가우리에게 감히 조공을 요구해 오는 무례를 범하였다. 이에 격분한 펴라[平壤] 정부는 강이식(姜異植)을 대장군으로 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부장으로 하여 3만의 기병으로 수(隋)나라의 북천성(北天城)을 공격해 들어갔다.

이리하여 북방의 패자 가우리와 중원의 패자 수나라 간의 제1차 대전의 막이 열렸다.
가우리의 선제 공격에 수나라 문제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여 그 해 6월에 무려 30만의 정예 천자군을 동원하여 수 문제 자신이 직접 이끌고 가우리로 침공해 왔다.
가우리는 강이식 대장군과 을지문덕 부장으로 하여금 맞서게 하였다.

때마침 장마철이 시작되어 매일같이 폭우가 퍼부었는데, 명장 강이식 장군은 대군으로 수군의 정면을 막고, 부장 을지문덕은 날쌘 기병을 이끌고 수군의 후방으로 돌아 그들의 수송로를 공격하여 30만 수병을 분산시키니, 수나라 군사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수문제는 비참하게 패전의 치욕을 안고 총퇴각하니, 이로써 가우리와 중국 패자와의 제1차전은 가우리 측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이 싸움에서 신출귀몰한 특공대 작전으로 적의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데 성공한 을지문덕은 부장에서 부장군으로 승진하였고, 그의 신화는 전 가우리에 진동하게 되었다.

가우리와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참패한 수나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양광(楊光)의 난이 그것이다. 그것은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태자인 형과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으로 그가 바로 양제(煬帝)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였으나, 중국을 위한 대사업을 연속적으로 벌였으니, 우선 100만 명을 동원하여 대궁전을 세웠다.

다시 200만 명을 징발하여 황하(黃河)에서 유주(惟州), 양쯔강[揚子江]에 이르는 3천리의 대운하를 뚫어 지방의 세공을 걷어 들이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는 또 유림(楡林)에서 동쪽의 만리장성 보수 공사도 철저하게 하여 북방 민족의 중원(中原) 침입에 만전을 기하였다. 더 나아가 양제는 임읍(林邑), 토곡(吐谷), 유구(流求) 등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모두 수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켜 국토를 크게 넓히는 공을 세웠다.

이로써 온 천하가 다 그의 무릎 밑에 복종하는 형세가 되었으나, 유독 가우리만은 패륜아의 왕위를 승인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제 수 양제는 그의 체면과 북방의 패권을 걸고 수 문제에 이어 또 한 차례 가우리와 승부를 시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서기611년 2월, 수 양제는 전국적인 대동원령을 내려 탁군(?郡)에 집결케 하였다. 서기 611년 4월부터는 양제 자신이 벌써 탁군에 나타나 군의 편제를 짰다. 전군의 집결이 완료된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이 때 동원된 내용을 수서(隋書)에 따라 살펴보면….

보병(步兵)   - 113만 명
수송인원   - 200만 명
전차(戰車)   - 5만 대
기병(騎兵)   - 30만 명
수군(水軍)   - 10만 명
군함(軍艦)   - 3천 척

육군 113만은 30도(道)로 나누었는데, 1도는 대략 3만 8천명이었다. 좌군이 12도, 우군이 12도, 천자군(天子軍)이 6도로서, 날마다 1도씩 탁군을 출발하여 약 40일 만에 겨우 출발을 완료하였다 하며, 그 선두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천 40리(416Km)에 달했다 한다.

출진에만 40일이 걸린 육군에 비하여 내호아(來濩兒) 제독이 이끄는 수나라 해군은 부제독 주법상(周法尙)을 선봉에 세우고, 군함 3천척에 10만 명의 해군으로 발해만을 타고 올라와 육군보다 20일이나 먼저 패수(浿水)의 하구에 집결해 본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함 2천2백 척, 수송선 8백 척, 총 3천척의 엄청난 규모의 수나라 해군 함대는 마치 발해의 요동만을 메운 듯했다. 그런데 이 무적 함대 앞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듯 일단의 가우리 해군 괘속선 함대가 돌연히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지며 수나라 함대를 공격하더니, 그대로 방향을 바꾸어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먼저 전공(戰功)을 세워 승진을 하고 싶은 욕심에 주법상 부제독은 육군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가우리 해군의 별동대(別動隊)를 공격하도록 추격 신호의 깃발을 올리고 급히 쫓아갔다.

수 해군의 대제독인 내호아(來濩兒)는 가우리 특공대의 출현과 주법상 부제독의 신속한 추격전을 바라보며 정지 신호를 보냈으나, 추격군은 제독함의 신호를 못 본 채 전속력으로 움직여 가우리 전단의 뒤를 따라 마(魔)의 삼각주(三角洲) 깊숙이 쫓아 들어가고 있었다.

“제독! 선봉군 선단들이 일제히 가우리 수군을 추격하고 있사옵니다.”

“주법상이 나의 명령을 무시하고 가우리 수군을 추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 본대(本隊)를 따돌리고 저 강을 따라 올라가 적의 왕성인 펴라[平壤]를 먼저 공취하여 일등 전공을 올리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모든 공은 주법상 부제독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천자 앞에 허수아비가 되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도 공격한다! 전 전함들은 펴라 공격에 나선다. 공격!”

자, 그러면 그렇게도 말썽 많은 펴라[平壤]와 압록수(鴨綠水), 패수(浿水), 살수(薩水) 등의 위치를 살펴보자. 지도에 나타난 대로 압록수(지금의 遼河)는 발해만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패수와 살수 등의 큰 강줄기와 하나로 합쳐졌다가 또다시 수십 갈래의 작은 물줄기로 갈라지며, 그 강변에 광활한 늪지를 형성하고 있어서,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 침략군들을 모두 이 늪지에서 허덕이게 만든 천연의 요새이다.

수나라 3천 척의 대선단 중 수송선단 800여 척을 제외한 2천여 척의 전투함들은 가우리의 특공 선단을 추격하여 패수(浿水)와 살수(薩水)가 합쳐지는 대삼각주까지 다다랏다. 그런데 오른편 강을 끼고 험한 산들이 있어서 그 위에 가우리군의 수비대들이 선박 공격용 석포(石砲), 화포(火砲) 등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군(隋軍)은 비로소 가우리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가우리는 이미 광개토대왕과 응신 천황의 대결 때, 응신의 신군을 바로 이 현장에서 전멸시킨 경험이 있었다.

“아, 강의 상류로부터 기름불 배들이 흘러내려오고 있구나. 이거 큰일이다! 배를 돌릴 수도 없고 완전한 함정이다! 가우리에게 속았다.”

갑자기 강의 상류로부터 기름불을 실은 배들이 엄청나게 흘러 내려오니, 무려 2천척이나 되는 전선들이 몰려 우왕좌왕하던 전함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가우리의 화공(火攻)에 차례차례 화염에 싸여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리수[鴨綠水]와 살수(薩水) 그리고 패수(浿水)가 합쳐지면서 넓은 늪지로 변하고, 그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물줄기들이 만주 벌판으로부터 실어 온 강물을 발해의 요동만으로 흘려 보내고 있었다. 이 곳의 지리에 어두운 침략군들은 과연 어느 물줄기를 타야 가우리의 왕도(王都)인 펴라성[平壤城]으로 갈 수 있는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마(魔)의 삼각주(三角洲)는 펴라를 수비하는 가우리의 수군(水軍)에겐 천혜의 지리적 이점이 되었으니, 물길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펼쳐 놓은 수비망은 어떠한 공격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수군의 해군선 3천 척 중 2천여 전투함들이 모두 펴라 공격에 나서서 가우리의 역격(逆擊)에 물귀신으로 변하고 있는 동안, 뒤에 무방비 상태로 남은 800여 척의 보급선대는 남대황(南大荒) 앞바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보급선대는 육군 130만 명이 아리수까지 도달한 후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품을 선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보급선단 앞에 나타난 전선들은 펴라 공격에 나셨던 수군선(隋軍船)들이 아니라, 가우리의 쾌속 화공 전선들이었다. 비무장 보급 선단들은 크게 놀라 즉시 백기를 올리고 항복해 버렸다.

수나라 보급선대의 항복은 너무 뜻밖이라 오히려 가우리 해군은 어리둥절하였다. 가우리는 엄청난 양의 수군 보급품을 노획하였고, 이것은 수나라 본군을 굶주리게 만들어 이 전쟁을 가우리의 일방적인 승리로 장식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800척의 보급선단을 무방비로 남겨 두고 펴라 공격의 공(功)을 다투며 마(魔)의 삼각주(三角洲)로 뛰어들었던 내호아 제독과 주법상 부제독의 2천여척의 전선들은 가우리군의 거미줄 같은 수비망에 걸려 일방적인 공격의 희생이 되니,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처럼 싸움 한 번 못 해 보고 물귀신이 되어 갔다. 겨우 뭍에 기어오른 패잔병들도 이미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가우리군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한편, 수나라 육군의 행진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무려 200만 명의 대군이 기병을 선두로 하여 장장 천 리 길이나 뻗쳐 거창한 행렬을 하니, 그 속도도 느릴뿐더러 선두와 후군 사이의 통신에도 많은 문제3점이 생겼다. 그 위에 가우리의 광활한 영토는 마치 끝도 없어 보였고, 더구나 발해만을 끼고 계속되는 산악길과 진창의 연속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강들은 처음부터 상상도 못했던 많은 문제들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되는 거북이 행렬은 북호(北虎 : 북대륙의 호랑이) 가우리 별동대(別動隊)들 앞에 더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다.

우선 가우리군의 최대 목표는 2백만 대군의 보급품 수송대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화공(火攻)으로 불태워 버리는 것이었다. 가우리의 영토는 광대한데다가 성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공격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수군이 계곡을 통과하면, 갑자기 산 위에서 가우리군이 나타나 돌벼락을 퍼부었다.

수군이 늪지를 건너려 하면 예외 없이 가우리의 기병들이 나타나 화살을 마치 소낙비처럼 쏘아 대어 전멸시키곤 하였다.

수군이 초원(草原)을 지날 때면, 화공(火攻)을 당하여 생화장 당하기 일쑤여서 마음 놓고 초원지대를 통과할 수도 없었다.
수군이 강을 건널 때에는 항상 기병들이 먼저 말과 함께 건너는데, 거의 예외 없이 가우리군이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해 왔다.

수군이 야영을 하면, 그들의 야영지에 불화살이 날아들어 옷도 못입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가우리군의 화살에 맞아 비명횡사 당하곤 하였다.

가우리군의 공격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싸움은 처음부터 가우리의 집 안에서 벌어져, 지리에 밝은 가우리군은 최소한도의 병력으로 신출귀몰하며 수군을 쉴 새 없이 공격해 대니 수군은 잠시도 쉴 여유가 없었다.

가우리군은 끝없이 이어지는 수군을 토막토막 잘라 내듯 공격하여 수나라의 전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특히 수송 부대의 연속적인 피해로 인해 먼저 진출한 기병대들은 벌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럭저럭 요수(遼水)까지 도달한 수군의 선봉장 맥철장(麥鐵杖) 장군의 기병대는 마치 바다같이 느껴지는 넓은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었다.

맥철장은 뒤따르는 후군들을 위하여 임시 가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놓고 공사하도록 내버려 둘 가우리군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가우리군의 공격과 파괴공작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다리 공사는 완성되지 않았으니, 마침내 요수까지 뒤따라온 수 양제는 화가 나서 죄없는 맥철장의 목을 베어 죽이고, 다시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간신히 강을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수양제의 백만 대군 앞에 요동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가에 의지하여 온갖 풍파를 다 경험한 이 고성(古城)은 수 양제의 별의 별 공격에도 떨어질 줄 몰랐다.
어느 새 또 한 달의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요동성 하나 공파하지 못하니, 중원 통일의 대위업을 달성한 수 양제로서는 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 때에 먼저 펴라 공격에 났던 수나라 해군 10만 명이 펴라에 4도착하지도 못하고, 마의 삼각주 남대황(南大荒)에서 전멸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나라 병사들의 사기는 비참하게 떨어졌다.

*오늘날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군(國軍)이 겨우 60만 명인 것에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전세계를 통하여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록(鴨綠) : 중국식 발음으로 ‘야리’이고, 우리 발음으로는 ‘아리’이다.
‘아리’는 ‘크다’라는 뜻으로, 송화강, 흑룡강, 요하 등을 모두 아리수라고 불렀다.

*요하(遼河) : 서기 1345년, 요(遼)나라의 성종(聖宗) 4년에 현재의 이름인 요하라고 이름지었다. 그 전에는 ‘구려하(句麗河, 枸柳河, 豆流河) 등으로 불렀고, 고구려 때에는 아리수(阿利水, 鴨綠水)라 하였다.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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