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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가우리[高句麗]와 중국의 북방패권전(北方覇權戰)-2

대쥬신제국사(1993년 동아출판사刊)에서 연개소문과 관련된 내용만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수 양제의작전은 완전히 빗나갔다. 수군은 각처에서 가우리군에게 분단당하여 각개 격파당하는 대참패를 계속했고, 벌써 일 개월 이상 공격하고 있는 견고한 요동성은 난공불락이었으며, 또 해군 10만이 전멸당한 소문이 과장되어 전해져,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가우리의 검은 깃발만 보아도 벌써 도망치기에 바빴다.

초조해진 수 양제는 새로이 군 작전 회의를 열어 요동성을 포위 상태로 남겨 둔 채 정병 40만 명을 우장군 우문술(于文述)과 좌장군 우중문(于仲文)에게 딸려 기병을 앞세우고 펴라성으로 직행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우리군은 수군 기병대의 진격을 그냥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아리수[鴨綠水]에 도착할 즈음, 가우리의 특공대는 꼬리 쪽의 보급 수송대부터 집요하게 공격하여, 야습과 화공(火攻)으로 수군의 보급품을 불태워 없애 버렸다. 그 바람에 수군 기병대는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해 보고 벌써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하여 겨우 10일분의 휴대용 식량만 남았다.

우문술의 마음은 초조하였다. 이젠 후퇴한다 해도 요동성에 도착하기 전에 가우리군의 공격에 무사하기가 힘들 것이고, 설사 후퇴에 성공한다 하여도 양제의 문책을 받아 목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겨우 10일간의 식량으로 아리수를 또다시 도강하고, 계속하여 살수와 패수를 건너 펴라성을 쳐 항복을 받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퇴유곡에 빠진 우문술은 결국 압록수 도강 작전을 감행하였고, 예상했던 대로 가우리의 특공대 공격을 받아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간신히 도강에 성공하였다.

더 이상 후방으로부터 보급품은 오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는 가우리군의 기습 공격에 시달리며 겨우 살수에 다다랐을 때, 수군은 또다시 8일을 허비하였으니, 이젠 겨우 2일분의 식량만 남은 형편이었다. 이 곳에서 펴라까지는 약 100리 거리이다. 그러나 아직도 살수와 패수를 건너야 했고, 식량은 불과 이틀 분밖에 없었다.

설령 펴라성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해도 가우리의 왕도(王都)에는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그가 농성전으로 나온다면 수군은 결국 식량난으로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이제는 싸워도 죽고, 안 싸워도 죽는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우문술은 장군답게 단호히 펴라 공격의 마지막 방법을 결심하고, 드디어 살수 도강 작전을 명령하였다.
살수는 넓으나 다행히 깊지는 않아서 기병들이 도강(渡江)하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그들을 그림자 같이 포위하고 있던 가우리의 대군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들 앞에 을지문덕의 장기(將旗)가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늦고 말았다.
갑자기 강의 상류로부터 날카로운 칼날을 세운 잡목들이 빠른 물결을 타고 무수히 흘러 내려오니 물 속에 있던 수군의 기병들은 피할 길이 없었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을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薩水湯湯?碧虛隋兵百萬化爲魚至今留得魚樵語不滿征夫一?餘’
(살수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하늘 출렁거리네
수나라 병사 100만이 물고기가 되었구나
이제 와서 여기 머물러 어부와 초부의 말을 들으니
정부[征夫]를 불만하여 한 가닥 비웃음을 남겼다.

벌써 며칠 동안 부족한 식량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수를 건너던 수나라 병사들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을지문덕이 지휘하는 가우리의 유명한 보기군단(步騎軍團)의 철통같은 포위망 속에 마치 물에 빠진 생쥐꼴로 일방적인 삭육전에 희생되어 갔다. 이 무자비한 살육전으로 수나라 우문술 장군의 40만 정예 기병군은 거의 전멸 상태였으니, 살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서 도망친 자는 겨우 2700명이었다고 중국 측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

한편 5월부터 수 양제(隋煬帝)의 진두 지휘아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요동성은 11월이 다 되어 벌써 눈이 내리는 데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 때, 펴라 공격에 나섰던 수군의 최정예 군단 40만이 을지문덕 장군에게 전멸당했다는 엄청난 비보가 2700명의 기적적인 생환자들을 통하여 전해지니, 수군의 사기는 처참할 정도로 떨어졌고, 이젠 가우리의 검은 기만 보아도 공포에 떨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결국 수 양제는 눈물을 머금고 총 퇴각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도 수군에게는 지옥행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고통의 연속이었다. 창과 방패도 버리고, 군기마저 엉망이 되어 거지 군대로 변한 수나라 병사들의 귀로를 가우리군은 조직적으로 토막내며 도처에서 철저히 섬멸해 갔다.

을지문덕 장군은 쓸데없는 고집으로 동이족(東夷族 )에게 도전해 온 한족(漢族)에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철저하게 교훈을 준다는 뜻으로, 단 한 명의 적도 가우리의 영토를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무자비한 소탕전은 처절하게 계속되어, 2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수군은 거의 전멸 상태에 빠져, 살아 돌아간 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간신히 가우리의 추격을 벗어나 탈출에 성공한 수 양제의 꼴은 말이 아니었고, 이백만의 목숨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수 양제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제 가우리에 대한 복수심으로 피가 끓는 수 양제는 더 이상 국가의 이익을 대변할 판단력을 상실하였다.

다음 해 서기 613년 1월, 수 양제는 또다시 1백만 군병을 징집하고, 두 차례의 대가우리전의 참패를 만회하고자 제3차 대가우리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요동성을 공파하는 데 실패했고 또다시 가우리군의 기습, 매복 작전에 걸려 7월을 넘기지 못하고 참패하였다.

가우리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친 수 양제는 또다시 서기 614년 2월, 제4차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렸는데, 가우리 땅을 밟으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소문이 꼬리를 이어서 처음부터 도망병이 속출하였다.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어 해군을 앞세워 비사성(卑沙城)부터 공격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또다시 참패하여 쫓겨가니, 수 양제는 분한 마음에 병을 얻어 드러눕게 되었다.

수 양제가 병으로 쓰러지자, 장군 이연(李淵)은 황제의 복수를 대신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섰다.
대원(大原)의 성주(城主) 이연(李淵)은 황제의 이름으로 병사들을 모집하였는데, 병사들이 가우리로 출정하는 것에 불만이 있음을 이용하여 오히려 장안(長安)으로 쳐들어가서 양제를 잡아 양쯔강 근처의 도시로 보냈다가 살해해 버렸다. 그 후, 7살짜리 양제의 아들을 신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신제(新帝)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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