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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풍왕(豊王)과 융왕(隆王)

연개소문이 가우리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로 있던 당시의 주변국인
남부여, 실라, 왜의 상황이 다뤄져있는 대쥬신제국사 제3권의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복신의 다물군이 계속 웅진도독부를 포위하고, 풍장이 일본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르자, 당 고종은 크게 당황하였다.

남부여인들의 정신적 지주를 없애느라고 왕과 태자 등을 장안으로 데려왔는데, 지금 부여인들은 풍장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음흉한 술책의 명수인 중국인들은 부여인들의 분열을 꾀하였다. 즉, 태자 융(隆)을 다시 부여로 내보내 남부여의 왕이 되게 하면 부여인들은 다시 옛 태자의 밑으로 항복해 올 것이고, 따라서 풍왕의 다물군도 결국 분열하고 말 것이니, 이들을 각개 격파하면 다물군은 쉽게 진압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 고종은 장안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태자 융을 웅진대도독 부여 왕으로 임명하여 되돌려 보냈다.

이리하여 당의 흉책에 이용당한 왕자 융은 부여 왕의 입장으로 당장 손인수(孫仁帥)와 2만 7천 명의 당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덕물도에 도착하였다.

당(唐)의 고종(高宗)에게 부여의 왕으로 임명받은 웅(隆)왕은 의기양양하여 당군 27,000명과 당장(唐將) 손인수(孫仁帥)를 이끌고 황해를 건너 덕물도(德勿島)에 도착하였다. 한 때 적국 당이 그의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항해하였던 바로 그 항로를 따라서, 이번엔 자기의 조국을 재건하려는 제나라의 다물군을 쳐부수려고 오고 있는 것이다.

어찌 남부여의 태자였던 융왕이 제 나라의 다물군과 싸우러 올 수 있을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우선 융왕의 입장에선 자신의 태자 자리를 무시하고 남부여의 왕위에 오른 동생 풍장왕의 행위가 몹시도 괘씸하였다.

덕물도에 집결을 끝낸 융왕은 당군을 3군으로 나누어 제1군은 감포만(藍浦灣)으로 상륙하여 두시원악(豆尸原岳)으로 공격해가고, 제2군은 주류성(周留城)을 공격하고, 제3군은 백마강으로 진입하여 위기에 빠진 부여성[熊津都督府]을 구하려 달려가게 하였다.

남부달솔(南部達率)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다물군 최고의 명장이다.

당나라로 끌려갔던 태자 융이 부여 왕이 되어 남포만으로 상륙하여 두시원악으로 진격해 오자, 다물군의 선봉을 이끌고 맞서게 된 흑치상지와 진현성(眞峴城) 성주 사타상여(沙陀相如)는 차마 옛 주인에게 칼끝을 들이댈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풍장왕이 명장 복신을 죽인 일에 큰 배신감마저 느껴 전군과 관내의 200성을 들어 부여 왕 융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8월 초, 융왕(隆王)은 흑치상지를 앞세우고 당기와 남부여기를 높이 들고 주류성을 공격하니, 성 안은 지금의 풍왕과 옛 태자로서 정통 왕통을 주장하는 융왕의 두 왕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 결국 9월 7일, 항복해버렸다.

형님인 융왕과 다물군의 맹장이었던 흑치상지가 돌연히 당적의 선봉에 서서 부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다물군을 치려고 나타났으니, 풍장왕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렇다고 항복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풍왕은 자신이 ale고 의지해온 야뫼도군을 출동시켜 당의 수군을 공격하여 이미 상륙해 있는 당적들의 기를 꺾어 볼 생각을 하였다.

풍왕의 출전 명령을 받은 야뫼도장군 박시전내진(朴市田來津)은 적선이 불과 100여 척이라는 보고를 받고, 야뫼도의 전선 총 400척을 출동시켜 회심의 일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당선(唐船)은 크기가 야뫼도선[大和船]의 약 10배나 되는 거선들이어서, 야뫼도군도 용감히 싸웠으나, 결국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전멸당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백촌강 해전(白村江海戰)이라고 기록된 사건이다.

이 때, 멀리서 이 해전을 관전하던 풍장왕은 동생 용과 중대형이 그리도 애써서 만들어 보낸 400척의 군선들이 단 한 차례의 해전을 넘기지 못하고 처참하게 깨어져 물 속의 귀신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옹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복신 장군의 충정어린 충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여 없앴으니, 그렇게도 잔인무도한 자신을 믿고 따라 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결국 흑치상지의 배신도 어쩌면 자신의 신의를 저버린 행동의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그리도 믿었던 야뫼도군 27,000명의 함성도 400척의 전선과 함께 물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다물군을 이끌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주류성이 흑치상지(黑齒常之)를 앞세운 융왕에게 9월 7일 항복해 버렸고, 두시원악성(豆尸原岳城)은 7월 20일부터 9월 15일가지 버티다가 결국 주류성을 함락시킨 흑치상지의 연합공격에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수군과는 별도로 제1군장 하변백기(河邊百技 : 가꾸베 모모에)가 이끌던 야뫼도의 육군도 나머지 생존자들을 이끌고 모두 임존성(任存城)으로 모여들었으나, 융왕과 흑치상지가 이끄는 당군의 철통같은 포위 속에 성내의 식량이 떨어져 갔다.

다물군만 소탕하면 남부여의 독립을 인정해 준다는 당의 감언이설을 융왕은 정말로 믿었던 것일까? 어찌하여 이성을 잃고 제 나라를 찾겠다고 다물전을 벌이고 있는 풍왕을 공격하였을까? 확실히 이 즈음의 남부여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2월 14일,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식량이 없다. 최후의 순간이 온 것이다. 부여인답게 싸우다가 깨끗이 죽을 뿐이다. 살아남은 1500명의 결사대들은 모두가 머리에 흰 띠를 동여매고 수만의 적병들의 파도 속으로 물거품이 되어 들어갔다.

이제 더 이상 부여의 영광을 다물하겠다고 뭉친 다물군의 병사들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물 전쟁(多勿戰爭)은 끝났다.
남부여(南夫餘)는 영원히 망했고, 다시는 소생할 수 없을 것이다. 복신 장군만 살아 있었어도 오늘의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을…. 풍왕은 숙부인 복신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없이 뉘우치며 풍장왕은 복신에게 사죄하고, 망루에 불을 질러 모든 흔적을 재로 만든 후, 아무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와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부여 땅을 뒤로 한 채 멀리 북국(北國)을 향하여 사라져 갔다.

북국에 간다 한들 나라 없는 왕을 환영해 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적국의 앞잡이로 변한 보기 싫은 형은 그 곳에 없을 것이고, 이리저리 변신하며 제 민족에게 창을 들이대는 흑치상지도 없을 것이다. 북국엔 아직도 당적에 항거하는 영웅들이 있다. 나도 그곳에 가서 당적과 싸우리라.

부여인들의 거센 다물 전쟁은 이미 가우리와의 연속적인 전쟁에 발목을 붙들리고 있던 당(唐)으로서는 이미 다룰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급기야 당을 파멸의 지경에까지 몰아갔다.

최후의 수단으로 당은 장안가지 끌고 갔던 남부여의 태자 융(隆)을 부여 왕으로 임명하여 손인수(孫仁帥)와 함께 파견하니, 마침 다물군을 이끌던 풍장왕이 명장 복신을 죽이는 우를 범하여 군신이 이반하기 시작하던 때와 교묘히 맞아 떨어졌다.

이로써 다물군은 분열되었고, 결국 태자 융은 동생인 풍왕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융왕은 웅진 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융왕이 다시 부여 땅의 총독이 되었으나, 당(唐)의 한낱 괴뢰 왕 신세이므로 우국 충절에 끓는 부여인들은 또다시 다물의 깃발을 높이 세우기 시작하였다. 일이 이에 이르자, 당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고, 결국 융왕의 건의를 받아들여 웅진 도독부에 반대하는 부여 사람들이 그들의 이민 정부가 건재한 일본 땅으로 이민가는 것을 무제한 허락하게 되었다. 이른바 국내 불만 세력을 국외로 추방하는 정책을 취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공지(空地) 일본 당의 개척에 손을 댄 역사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였고, 일본에의 이민 행렬도 줄기차게 이어졌으나, 10만 이상의 조직적인 이민, 즉 민족의 대이동은 역사상 3차에 걸쳐서 이루어 졌다.
제1차는 백제의 응신천황의 일본 망명 이후 150년 간, 제2차는 가야(加耶)가 실라에게 멸망당했을 때, 그리고 제3차는 이번 남부여의 멸망으로 모든 항당, 항실라 세력이 대규모로 정복자들의 굴욕적인 통치에 반대하여 일본에 세워 놓은 그들의 식민 정부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일본서기에는 백마강(白馬江)을 백촌강(白村江)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러나 村은 이두문으로 ‘마을’이라고 발음되고, ‘마을’은 곧 말(馬)의 의미와 통하므로, 백말강이나 백마을강이나 같은 음의 각각 다른 이두식 표기일 뿐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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