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 메뉴 바로가기

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가우리[高句麗]와 중국의 북방패권전(北方覇權戰)-3

대쥬신제국사(1993년 동아출판사刊)에서 연개소문과 관련된 내용만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서기 618년, 신제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후, 이연은 왕위를 탈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고, 왕명을 고조라 하였다. 서기 626년, 고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이 형인 황태자와 부왕을 죽이고 황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정관(貞觀)의 치(治)로 유명한 태종(太宗)이다.

서기 628년, 당 태종은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고 서기 629년에는 동돌궐(東突厥)을 멸망시켜 당에 편입시키니, 천하 통일을 위하여 가우리와의 일전(一戰)이 불가피하였다.

한편, 가우리에서는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죽고, 연약한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여 앞으로 닥쳐올 당(唐)과의 대전이 심히 걱정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일세(一世)의 쾌걸(快傑)이 있었으니, 그의 성은 연(淵)씨요, 이름은 개소문(蓋蘇文)으로,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그의 선조는 봉성인(鳳城人)으로서 아버지인 태조(太祖), 할아버지 자유(子遊), 증조할아버지 광(廣)이 대대로 나라의 막리지(莫離支) : 국무총리)를 지낸 명문가의 출신이었다.

연개소문은 홍무(弘武) 14년 5월 10일생이다. 그는 나이 불과 9세에 조의선인(?衣先人 : 가우리의 관직 12등급의 하나)으로 선발된 후, 언제나 부하들과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며,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意氣)가 호일(豪逸)하며, 불의엔 가차없이 단호하여 귀족들도 모두 떨었다. 그는 서부대인(西部大人)으로서 국경 지방의 장성(長城)을 쌓는 감독관으로 일하며, 새로 일어선 당나라의 수상한 움직임을 심시 걱정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비겁한 대신들은 열제(烈帝)를 에워싸고, 당나라로부터 노자(老子)의 상(像)을 구입하고, 국인(國人)들에게 도교(道敎)를 전교하는 등, 당나라가 수나라의 참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동안 국인(國人)들을 정신적으로 연약하고 썩어 가게 하고 있었다.

겁많은 대신들은 매일같이 말싸움이나 즐기며 당나라와 평화 협정을 맺도록 왕을 설득하는 등 마치 태평성대를 만나기나 한 듯 착각 속에서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미 그의 첩보망을 통하여 당노(唐奴)들의 전쟁 준비 상황을 세세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왕을 에워싸고 있는 대신들을 정면으로 비난하면서 국방에 전력하도록 왕에게 탄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열제 역시 귀찮은 전쟁 준비보다는 도교에 심취한 조정 대신들의 무력한 제안을 받아들여 오히려 연개소문을 파면하려 음모를 꾸몄다.

그 때, 조정안에 있던 연개소문의 심복이 왕과 대신들의 연개소문 제거 음모를 즉각 보고하니, 연개소문은 음모에 참가했던 대신들을 모두 그의 열병식에 초청한 다음, 군사 혁명을 일으켜 열제(烈帝)를 포함하여 200여 조정 대신을 불시에 죽여 없앴다. 서기 642년 10월의 사건이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榮留王)의 조카 보장왕(寶藏王)을 내세워 열제위(烈帝位)에 올리고, 그 자신은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선도해(先道解)를 그의 참모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의 성주 양만춘(楊萬春) 장군에게 명하여 국경 지대의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서기 645년, 당 태종(唐太宗)은 기어코 천하 최강자의 자리를 놓고 가우리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하여 가우리 정벌 총동원령을 내렸다. 당군은 장안을 출발하여 뤄양[洛陽]에 입성한 후, 5월엔 국경을 넘었다. 제1군은 이세적(李世積) 총사령관의 지휘 아래 가우리의 회원진으로 향하고, 제2군은 요동(遼東) 그리고 제3군은 장험(張險)으로 총공격하며, 제4군은 장량의 해군이 맡았다.

장량의 제4군은 군함 800척에 수병 7만 3천 명으로 4월 12일에 동래(東萊)를 출발하여 비사성(卑沙城 : 지금의 大連)을 맹공하였다. 그리고 다른 수송선단은 육군이 창려(昌黎)를 점령하자, 대규모의 보급물자를 창려로 상륙시켰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의 최정예 주력군인 제1군 15만 명을 안시성(安市城) 공격에 총투입하기로 하고, 전군을 다시 10군으로 나누어 당산(唐山)을 출발하여 안시성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楊萬春) 장군도 성의 비상 방위선을 펴고, 펴라로부터 막리지가 약속한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당군을 이 안시성 주위에 묶어 놓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양만춘 장군은 이미 수 양제의 공격을 견디어 낸 요동성(遼東城)의 전설과 경험을 미리 듣고 공부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 지도는 조대기(朝代記)에 나타난 안시성(安市城)의 위치를 옛 기록 그대로 쫓아 확인한 것으로, 모두 허베이성(河北省)에 엄연히 실재하고 있다. 옛 기록의 정확성을 다시 한 번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조대기(朝代記)에 기록되어 있기를,

안시(安市)는 개평(開平)의 동북쪽 70리에,
석성(石城)은 건안(建安)의 서쪽 50리에,
건안(建安)은 안시(安市)의 남쪽 70리에,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에,
풍성(豊城)은 안시(安市)의 서북쪽 100리에,
한성(韓城)은 풍성(豊城)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玉田堡)는 한성(韓城)의 서남쪽 50리에 있다고 했다.

당시, 안시성에는 성주 양만춘 장군 외에도 가우리 제일의 강궁(强弓)으로 이름을 날리던 양 장군의 조카 양수봉(楊秀峰) 장군도 같이 종군하고 있었다. 성 위에서 멀리 화살을 날리면 무려 2천보의 거리까지를 사정거리로 하는 강궁이 많이 배치되어 있어서 당군은 미리부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과연 며칠이 지나자, 펴라로부터 막리지 연개소문이 약속했던 응원군이 도착하였는데, 응원군은 모두 1만 4천 명의 날쌘 기병들로서 성을 공격하는 당군의 배후를 교란시키며 그들의 보급품을 철저히 공격하여 파괴하고 사라지는 후방 교란 임무를 맡았다.

연개소문의 명참모 선도해는 당군과의 결전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가우리의 북방 5요새와 그 성주들은 다음과 같다.

건안성(建安城)-성주 : 연정토, 안시성(安市城)-성주 : 양만춘
요동성(遼東城)-성주 : 고상무, 신 성(新 城)-성주 : 문지도
부여성(夫餘城)-성주 : 부여충

*개소문(蓋蘇文)의 만주어 발음은 ‘캐쉰’으로 그의 어머니가 갓쉰(50세)에 낳았다 하여 ‘캐쉰(갓쉰)’으로 불렀다 함.

* 안시성(安市城)은 탕지(湯地) : 지금의 陜河湖)를 끼고 있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 대쥬신제국사-밝해 대조영
  •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 대쥬신제국사-추무태왕
  • 대한민족통사② 단군조선
  • 대한민족통사① 치우천황
  • 임진왜란
댓글남기기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

댓글 내용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