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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일본국 탄생(日本國誕生)-1

연개소문이 가우리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로 있던 당시의 주변국인
남부여, 실라, 왜의 상황이 다뤄져있는 대쥬신제국사 제3권의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여 다물 전쟁을 지원했던 규슈[九州]의 용(勇)과 황자 중대형(中大兄)은 남부여의 황태자였던 부여 융이 당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당군을 이끌고 와 오히려 부여의 다물군을 격멸시키고 말았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망연자실하였다.
이제 융왕이 침략군에 저항하는 모든 부여인들의 도왜 이민(渡倭移民)을 허용하여, 엄청난 규모의 부여인들이 일본 땅의 야뫼도백제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밀려 들어왔다.

“이제 조국은 망해 버렸고, 두 번 다시 나루에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조상들에 대한 제사는 어떻게 모실 것인가?
어찌하다가 그리도 강력했던 부여의 영화가 이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우리 야뫼도백제[大和百濟]를 고향으로 생각하고 밀려오는 저 엄청난 부여의 유민들을 과연 어찌했으면 좋단 말인가?

또, 실라와 당의 연합군들이 이 곳까지 쳐들어올 경우,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막아낼 것인가? 앞으로 닥쳐올 환란이 걱정이로다.”
“어머님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부여의 사직을 보존하라고 우리에게 유언을 하셨고 또 그 동안 우리로서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하였으나, 오늘날 결국 나라를 잃고 말았으니, 고향을 잃고 방황하실 어머님의 영혼을 어떻게 위로해 드린단 말인가?

어머님, 결국 이 불효자는 어머님의 유언을 지켜 드리지 못하였나이다. 앞으로 우리를 따라 밀려드는 저 많은 부여인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이까? 가르쳐 주소서.”

“자, 중대형! 우리가 더 이상 이곳에서 슬픔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소이다. 저 많은 부여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왔으니 실라는 우리가 또다시 힘을 모아 그들을 응징하고, 옛 땅을 다물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오.
특히, 저 간사한 김유신의 무리들은 집안싸움에 동네 깡패를 끌어들이기를 서슴지 않고 있으므로, 그들은 반드시 부여인들의 근거지로 변한 이 곳으로 쳐들어올 것이오. 만약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적의 침략이라도 받는다면 도 남부여 꼴이 될 것이니, 우리 서로 정신을 차리고 힘을 모아 나라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것이오.”

바다 건너 당나라의 군병까지 끌어들여 가며 남부여 멸망에 모든 기력을 투입했던 실라인들이었다. 이제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쟁취한 듯한 상황에서, 마치 적에게 물린 꼬리를 떼어 버리고 그 몸뚱이만 도망가 버린 도마뱀처럼 부여인들은 본토를 버리고 왜지(倭地)로 모여들어 또 다시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는 날이 갈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왜지의 부여인들이 건재하는 한 실라의 평화와 안녕은 영원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라의 야뫼도백제에 대한 침공은 이제 의심할 필요도 없는 현실이 아니겠는가?

일궁부(日宮部)의 부여 용(扶餘勇)과 중대형은 새로 합류한 부여인들과 힘을 합하여 밝다만[搏多灣]에 큰 저수거(貯水渠)를 만들 때 수성(水城)과 봉화대를 만들었다. 또 대마도(對馬島), 일기도(壹岐島), 축자(筑紫)의 각지에도 산성(山城)을 쌓고, 서로의 비상 통신망으로 봉화대를 세워서 실라군의 침략에 만전의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갔다.

남부여의 멸망에 따라 긴박하게 변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그 동안 서로 의지했던 국가의 안보 문제도 이제는 독립적으로 처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야뫼도는 여러 가지 정책들을 다시 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일궁부의 왕인 용왕과 중대형 황자는 협의를 계속하였다.

제일 시급한 문제는 갑자기 밀어닥치고 있는 남부여 유민들에 대한 것으로, 특히 남부여의 왕족 출신들과 정부의 고관들에 대한 처우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정부의 조직을 개편, 26계(階)의 새로운 관제를 신설하여 남부여의 유력인사들이 입각(入閣)할 수 있게 하고, 나라 사람들의 총화 단결을 위해 그 동안 구별되었던 실라인들도 대거 유입하여 통합연립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안 거북한 관계에 있었던 겸자련(鎌子連)과 대해인(大海人)도 적극 협력하기로 하였다.

또, 백성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들의 출신국을 따지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부터 왜지(倭地)에 이민 와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백제인도 실라인도 가야인도 아닌 모두가 같은 운명 공동체로서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야 했던 것이다.

이제 이들은 그 동안 연결되어 있던 본토와의 탯줄을 끊으려 하였다. 그 동안 그들의 종주 세력이었던 백제도, 남부여도, 가야도 더 이상 본토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다. 지금은 그들을 멸망시킨 당적(唐敵)들과 신정복자 실라인들만 들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조선 반도는 그들의 종주 세력들을 멸망시킨 적을 의미하게 되었고, 지금 또다시 실라의 침략을 받을 위기에 서게 되어 반도에 대한 적개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토와 관련 없는 새로운 나라 이름이 필요하게 되어 일본(日本)이라 이름지었다. 즉, 일본이라는 새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日本)이란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다.
일본이란, 본토 쪽에서 쳐다본 왜지(倭地) 땅을 말한다. 분명히 본토(한반도)에서 보면, 동해 건너 일본으로부터 아침 해가 솟아오르므로, 반도 쪽의 부여인들은 자기들의 이민 정부가 있는 그 곳을 일본이라고 불렀으며, 그 관리 부서를 일궁부(日宮部 : 즉 일본 궁실 관리부)라고 불러 왔으므로, 국명을 일본으로 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 땅에 가서 보면, 해는 태평양 너머에서 떠오르므로, 그 들 자신의 땅 일본이 아님을 알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란 이름은 백제와 부여인들이 부르던 왜지를 지칭하던 것으로, 백제와 부여인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어, 예부터 부르던 지명을 그대로 국호로 정한 것이다.

그동안 제명 천황(齊明天皇)의 뜻을 받아 당시 일궁부의 왕이었던 부여 용(勇)이 총독으로서 남부여의 다물 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노력은 물거품처럼 허사가 되어 남부여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따라서 더 이상 나대진(娜大津) 항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서기 664년, 부여 용과 황자 중대형은 모든 정부 기관을 이끌고 다시 나라[奈良]지방의 아스카[飛鳥]로 옮겨 갔다. 665년 2월, 부여 용은 남부여의 건축 기술자 400명을 근강국(近江國)의 포생군(蒲生郡)으로 보내 새 나라 일본(日本)의 이름에 어울리는 새 서울을 짓도록 하고, 3월에는 신전군(神前郡)에 정착한 부여의 유민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었다.
서기 667년, 드디어 서울을 근강으로 옮기니,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표시하였다.

부여 용은 여전히 실라의 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고안성(高安城)을 쌓았고, 찬길국(讚吉國)에 옥도성(屋島城)을 그리고 대마국(對馬國)에 금전성(金田城)을 축성하였다.

계속되는 남부여 유민들에 대한 특별 대우와 축성을 위한 부역 그리고 새로운 왕성의 건설 등으로 먼저 이민 와 정착한 구백제계와 가야인들을 비롯하여 대해인의 실라계까지 반발이 심해지자, 할 수 없이 그의 일궁부 총독으로서의 권위를 포기하고,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온 중대형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말았다.

사실 본국 남부여가 이미 멸망해 버렸는데, 일궁부 총독이 무슨 힘이 있을 것인가? 이로써 일궁부도 역사의 그늘로 사라져 버렸다.

부여 용에게는 아직도 단념할 수 없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본국에는 비록 적의 괴뢰 왕이긴 해도 형님인 융(隆 )왕이 웅진 도독의 자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부여 융이 정신을 차릴 경우, 부여 땅으로 달려가 그를 지원하고 싶었다. 그것은 분명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라도 있어야만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본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금전성을 향해 떠났다.

부여 용이 일궁부를 해산하고, 왕위를 양위한 채 떠나 버리자, 중대형은 왕위에 취임하였다. 이 때, 중대형의 나이 43세로서 왕명은 천지 천황(天智天皇)이다.

그는 국내를 안정시키고, 또 지나친 부여계의 독주를 막기 위하여 대해인과 겸자련을 다시 중신으로 기용하였다.
특히 겸자련에게는 등원(藤原)이라는 성씨를 내려 주니, 이후 등원씨들이 수백 년 동안 일본 정권을 이끌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대동단결하게 되었고, 큰 나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단단히 다지게 되었다.

이 때, 가가미왕[鏡王]에게 두 명의 아름다운 딸들이 있었는데, 일본 최고의 권력자인 천지천황(天智天皇)에게 장녀인 가가미[鏡王女]를 바쳐 정략 결혼을 성립시켰다. 일본 천황을 사위로 삼은 가가미왕은 지난 경험에 비추어 천황의 운명도 명확하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천황 다음으로 강력한 제2인자인 대해인에게 눈을 돌렸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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