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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대야성(大耶城)의 비극(悲劇)-1

연개소문이 가우리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로 있던 당시의 주변국인
남부여, 실라, 왜의 상황이 다뤄져있는 대쥬신제국사 제3권의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서기 641년, 남부여의 무왕(武王)이 죽자, 무왕의 원자(元子)로서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갈단성이 있는 의자왕(義慈王)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백제(百濟)라고 불리는 남부여(南夫餘)의 왕위에 올랐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칭송받는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실라 건복(乾福) 19년(서기602년)부터 전개되어 오고 있던, 그의 아버지 무왕과 실라의 김용춘과의 소위 동서전쟁(同壻戰爭)의 한을 풀어 드리고자 과감한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제 더 이상 실라와는 풀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어 버려 실라나 남부여 어느 쪽 한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전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의자왕은 실라 타멸(打滅)의 작전을 꾸미고자 상좌평 부여 성충(扶餘成忠)과 가잠성(?岑城 : 지금의 槐山)의 성주 계백(階伯) 등을 소집하였다.

“선왕(先王) 이래 실라와의 타협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고. 이제 우리가 실라를 멸(滅)하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말 것이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실라는 본래부터 백제의 속국이었사옵니다. 그러나 천황(天皇)이 왜지(倭地)로 떠나자, 많은 남부여의 백성들이 천황을 따라 일본으로 이민해 가서 우리의 백성이 많이 줄었나이다.”

“대왕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백성은 나라의 힘이 아니옵니까? 우리의 힘이 주러드는 것과는 반대로, 소국 실라는 그 동안 우리와 실라 중간의 완충지역이었던 가야 연합국을 멸망시키고 나라의 힘을 두 배로 증강시켜 이젠 우리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오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선왕과 동서 전쟁을 벌였던 실라의 명장 김용춘(金龍春)이 죽고 없으니, 이젠 우리와 맞설 만한 인물이 실라엔 없지않소? 또 인물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기껏 선덕여왕(善德女王)을 위로 모시는 졸장부들쯤이야 무슨 큰 문제가 되겠소?

“대왕마마! 김용춘은 죽었으나, 그의 아들 김춘추(金春秋)가 이찬의 벼슬에 올라 실라의 실권을 잡고 있사옵니다. 선덕여왕은 이미 속세를 떠나 중이 되었던 몸으로 김용춘 일파에게 다시 불려와 왕위에 앉아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지만, 김춘추는 제 아비 김용춘보다도 훨씬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어 오히려 우리 남부여에겐 큰 위협이 되고 있사옵니다."

“실라에는 또 김춘추 밑에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있사옵니다. 그는 신가라의 국왕, 구해(仇亥)의 증손입니다. 다른 가야(加耶)들은 모두 실라의 침공에 맞서서 사투(死鬪) 끝에 멸망하였지만, 김유신의 증조부 구해만은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실라의 준귀족(準貴族)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구해는 실라에 충성을 보이기 위하여 실라군의 앞장에 서서 우리의 선왕이신 성왕(聖王)을 전사시킨 원한이 깊은 집안이옵니다.”

“김유신(金庾信)도 그의 증조부를 닮아서 지극히 간교하고 잔꾀가 많습니다. 그는 실라의 모든 실권이 사실상 김춘추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그의 여동생 문희(文姬)를 김춘추에게 바치고, 매부 처남 관계를 유지하며 실라의 병권을 잡고 있는바 지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옵니다.
하지만, 우리의 용맹스러운 대왕의 군사들은 지난 40년간 실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어 선조(先朝) 성왕의 전사(554년) 이후 실라에 빼앗겼던 대부분의 영토를 다시 찾았나이다.
지금 실라의 제일 중요한 요충이라면 바로 대야성(大耶城)이옵니다. 김춘추도 그것을 알기에, 도독 이찬(都督伊?) 김품석(金品釋)에게 그의 가장 사랑하는 딸 소랑[炤良]을 주어 사위를 삼아 대야성의 성주로 파견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어코 대야성을 빼앗아 실라의 기를 죽이고, 곧이어 금성으로 쳐들어가야 하옵니다.”

“하지만 장군! 실라 제1의 요충이라는 대야성이 그리 쉽게 떨어지겠소? 계백 장군의 대야성 작전에 대하여 성충 상좌평의 의견은 어떠하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벌써 여러 달 동안 계백 장군과 제가 서로 이마를 맞대고 의논해 왔사옵니다. 물론 실라의 실질적인 왕인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세력은 과히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이 되지만, 우리도 그들 못지않은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있으므로 작전만 잘 세운다면 승산이 있다고 아뢰옵니다.”

“저희들이 벌써 오래 전부터 손을 써서 대야성주(大耶城主) 김품석(金品釋)의 막장(幕將) 금일(黔日)이라는 자를 많은 황금으로 매수해 두었사옵니다. 품석이 눈치채지 않도록 계백 장군은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가잠성(?岑城)으로 북을 치며 행군하여 적의 간자(間者)들을 속이고, 그 사이에 부여 윤충(扶餘允忠) 장군에게 정병 1만 명을 주어 안심하고 있는 대야성을 기습하면, 금일이 성문을 열어 우리 군을 맞아들일 것이옵니다. 대야성만 떨어지면, 그 주위의 성과 고을이 무려 40개나 되므로 실라는 일시에 혼란에 빠지게 되옵니다. 출병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좋소! 출병을 승인하오.”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은 실라 방위에 절대적인 요충지이다.
따라서. 김춘추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다. 일단 의자왕의 출전 승인을 받은 계백장군과 상좌평 윤충의 가슴은 뛰었다.

서기 642년 8월, 오랜 시간 완벽한 준비를 마친 남부여는 마치 전광석화같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윤충(允忠)의 1만 군이 대야성을 급습하자, 금일은 성문을 열었고, 혼란에 빠진 김품석은 소랑과 함께 금일에게 맞아 죽었다.

실라의 요충인 대야성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실라의 심장부였다. 그러나 그렇게도 믿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은 계백과 성충이 펼친 안팎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어이없이 성을 잃고 말았다. 성이 평정되자, 계백장군(階伯將軍)과 의자대왕(義慈大王)이 미후성(彌?城)에서와 윤충군의 승리를 축하하고, 성을 남부여의 영토로 접수하였다.

자신감에 충만한 의자왕은 계백 장군을 앞세우고 대야성을 근거지로 하여 주위를 몰아치니, 옛 가야(加耶)의 영토였던 이 곳은 스스로 의자왕의 남부여군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대야성을 비롯하여 무려 40성과 식읍(食邑)들이 모두 남부여에 속하게 되었다.

*부여성(扶餘城) : 한때 대동아를 호령했던 백제의 전통을 계승한 남부여의 서울[所夫里]이다.
所夫里(소부리)란 서울[首都]의 이두식 표기이다.

* 대야(大耶)는 ‘하래’로 읽어 낙동강의 상류를 말한다.
‘야(耶)’, ‘양(梁)’ 등은 당시에는 다 ‘타’ 혹은 ‘래’로 읽었고, 대야를 실라 말엽에 협천(陜川)으로 고쳐 후세에 이것을 ‘합천’이라 부르니, 당시에는 합[陜]의 첫소리 ‘하’와 ‘내[川]’의 뜻 ‘래’를 따라 ‘하래’로 읽었던 것이다. -申采浩 풀이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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