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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다물전쟁(多勿戰爭) -1

연개소문이 가우리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로 있던 당시의 주변국인
남부여, 실라, 왜의 상황이 다뤄져있는 대쥬신제국사 제3권의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리하여 소정방은 의자왕의 신병을 인수받고, 의기양양하게 장안으로 개선하였다. 서기 660년 9월 3일, 소정방은 왕과 왕족, 신하 등 93명과 남부여의 우수한 기술자들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성(泗泌城 : 扶餘)을 떠났고. 실라 측의 김인문(金仁問)과 사찬 유돈(劉敦) 그리고 중지(中知) 등도 전후 문제를 협상하기 위하여 동행하였다.

한편, 사비성은 당장 유인원(劉仁願)의 당군 1만 명, 실라 왕자 인태(仁泰), 사찬(沙?) 일원(日原), 급찬 길나(吉那) 등의 실라군 7천명의 병력으로 지키니, 소위 웅진 도독부(熊津都督府)가 그것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전란에 모두들 이성을 잃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차츰 쓰러진 옛 왕조를 다시 다물(회복)하기 위하여 부흥군들이 일어났다. 그 중 무왕(武王)의 조카인 부여 복신(扶餘福信)은 스스로 은솔에 올라 다물전쟁을 강력히 이끌었다. 그리고 전 좌평 도침(道琛 혹은 自進)은 주류성(周留城)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룩하고, 두시이(豆尸伊) 성을 되찾았다.

예상보다 빠르게 불붙은 남부여의 다물전쟁은 남부여의 영토를 영구히 삼키려고 세워 놓았던 웅진 도독부의 유인원을 심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700년의 긴 역사 동안 동아(東亞)를 호령했던 백제, 남부여의 저력을 어찌 수만 명의 나 ? 당 연합군으로 누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 못할 곡절이 있었기에 소정방은 10만 주력군을 이끌고 허둥지둥 귀국길에 올랐던가? 역사에 자주 빠뜨리고 있는 당나라의 속사정은 다음 장에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하여튼 당나라의 소정방은 아직도 불안한 정복지의 주력군을 빼돌려 처음부터 남부여 공략의 목적이었던 북방 전선으로 향하였다. 당의 주력군이 빠져나가자, 남부여의 상황도 크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661년 2월, 복신(福信) 장군은 강서(江西)의 병사를 다시 모아 진현성을 탈환했고, 이 작전에서 유인원의 당군 1천여 명을 포위하여 전멸시키고 말았다. 일이 급하자, 유인원은 실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태종(太宗)은 이찬(伊?) 품일(品日)을 대당장군(大唐將軍), 잡찬 문충(文忠)을 상주장군(上州將軍), 무훌(武?), 욱천(旭川)을 남천주대감(南川州大監)으로 하여 대군을 파견하였다. 3월 5일, 그 선봉대가 두랑윤성(豆良尹城)에 이르렀으나 다물군의 기습으로 전멸당했고, 이어 전군을 동원하여 성을 포위하고 36일간 싸웠으나 끝내 복신군을 이기지 못했다.

이 무렵, 소위 동맹군을 형성했던 실라 측은 당(唐)의 남부여 점령이 장기화되는 조짐을 간파하고, 형식적으로 다물군을 진압하면서 사실은 다물군이 당나라 점령군의 힘을 약화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서기전 19년 5월, 시조 비류천황(沸流天皇)이 대방 고지에 일으켜 세운 외백제(外百濟)로부터 시작하여 백제국(百濟國), 십제국(十濟國), 나라백제[奈良百濟], 남부여(南夫餘) 등의 파란만장한 왕조(王朝)를 거치며 동아(東亞)의 최강자로서 군림했던 백제는 지난 678년간의 화려했던 역사를 덧없이 잃고 말았으나, 아직도 변방의 여러 성주들은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물전쟁(多勿戰爭)을 선포한 대장군 복신(福信)은 잔존 성주들을 주류성(周留城)으로 총집결시켜 다물군(多勿軍)을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1. 비류계(沸流系)와 남부여계(南夫餘系)의 구별 없이 전 부여인들을 총망라하여 부여의 재건에 목숨을 바친다.

2. 야뫼도[大和]와 탐라국(耽羅國)에 원군을 청한다.

3. 소성(小城)을 버리고 대성(大城)으로 집결하여 병력의 분산을 막고 군 작전에 통일을 기한다.

4. 다물군(多勿軍)의 총사령관은 우장군(右將軍) 복신(信)으로 하고, 좌장군(左將軍)을 도침(道琛)장군으로 하여 상(上)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로 한다.

5. 지금 의자대왕(義慈大)께서는 당적(唐敵)들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長安)으로 끌려가 계시므로 다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라엔 한시라도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천황이 필요하므로, 마침 아스카[飛鳥]의 일궁부(日宮部)에 계신 풍장 왕자(豊璋王子)를 모셔다가 천황위(天皇位)에 세운다.

6. 당적(唐敵)의 주력은 곧 무너질 것이므로, 서천(舒川) 부여군(扶餘郡)의 각 성들을 즉각 다물하고, 임시 서울은 주류성(周留城)으로 정한다.

7. 복신(福信)은 본군 1만 2천명으로 주류성에 주둔하고, 도침(道琛)은 좌군 1만 명으로 임존성(任存城)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1만 명으로 진현성(眞峴城)에, 상여(相如)의 3천 명은 이례성(爾禮城)에, 지수신(遲受信)의 3천 명은 가림성(加林城)에 주둔한다.

다물군은 총 3만 8천 명의 병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야뫼도[大和]의 서울 아스카[飛鳥]의 단풍이 붉게 타올라 백제궁의 안팎을 곱게 물들이고 있는 10월 중순, 마침내 남부여의 비극이 제명(齊明天皇)에게 전해졌다.
보황녀(寶皇女)는 이 엄청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빠 의자왕의 신변에 무엇인가 큰 변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만약 의자대왕의 남부여에 무슨 변란이 있다면 야뫼도[大和]의 입장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보황녀(寶皇女 : 齊明天皇)는 오빠인 의자대왕을 구하기 위하여 서울을 나니와[大阪]로 옮겨 가기로 하고, 불과 40일 만인 12월엔 벌써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것으로도 본국 남부여와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되어, 다음해 1월엔 또다시 서쪽 끝까지 움직여 가니, 그 곳은 나노쓰 항으로서 지금의 후쿠오카[福岡]이다.

본국을 지원할 수 있는 최단 거리까지 온 제명 천황은 여기서 왕자 중대형(中大兄)과 중신겸족(中臣鎌足 : 鎌子連)에게 명하여 최단 시일 내에 최대한의 도해용 군선(軍船)을 조선하도록 독려하였다. 중대형은 어머님의 듯에 따라 군선 제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어머님 천황(天皇)이 머무르실 궁전을 지쿠고강[筑後川] 유역인 아사쿠사[朝倉]에 지어 벌써 68세에 이른 노모(老母)의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였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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