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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쥬신제국사-연개소문

  동서전쟁(同壻戰爭)

연개소문이 가우리의 신크말치[太大莫離支]로 있던 당시의 주변국인
남부여, 실라, 왜의 상황이 다뤄져있는 대쥬신제국사 제3권의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저술하신 내용이어서 차후 밝혀진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판된 도서를 촬영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미흡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동아(東亞)의 패권(覇權)을 걸고 지나(支那)의 중화족(中華族)과 동이족(東夷族)의 패자(覇者)인 가우리[高句麗]는 벌서 7차에 걸쳐 대전(大戰)을 치렀다. 중화 측은 기어코 가우리를 꺾어 보고자, 수(隋)와 당(唐)에 걸쳐 3대의 황제(皇帝)들이 적게는 30만에서 많게는 200만이 넘는 대군병을 동원하여 가우리 격파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가우리는 강이식(姜異植)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그리고 전설적인 신크말치[太大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 등 불세출의 영웅을 앞세워 수백만 중화족의 피를 흘리게 했고, 급기야는 당 태종(唐太宗)을 요택에서 잡아 항복을 받아 냈을 뿐만 아니라, 산둥[山東],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3성(三省)을 전쟁 배상으로 받아 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3성(三省)을 다물하여 시조(始祖) 고주무[高鄒牟]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동안, 반도의 남부에서는 약소국 실라[新羅]가 그의 종주국(宗主國) 백제(百濟)를 상대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애처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기 555년, 남부여의 성왕(聖王)을 죽인 후, 가야 연맹을 멸망시켜 그 영토를 차지한 실라는 백제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번국(藩國)의 위치를 벗어나 남부여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남부여 측도 현실을 인정하고, 실라와 대등한 관계의 국교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남부여의 위덕왕(威德王)은 실라의 진평왕(眞平王)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그 동안 불편했던 양국 간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양국 왕가(王家)의 결합을 제안하였다.

“대왕마마! 이제부터라도 저희 남부여 위덕대왕의 증손 서동 왕자(薯童王子)와 대왕[眞平王]의 세 공주님들 중 한분을 결혼시켜 양국 왕가의 결합을 이룩함으로써 자손만대에 평화를 전하기를 원하옵니다.

지난번 전쟁으로 부왕(父王)을 잃으신 위덕대왕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결심이었으니, 동족 간의 싸움을 종식 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잘 살피시어 좋은 결론이 있길 바라옵니다.”

그 때, 실라 진평왕에겐 왕자는 없고 공주(公主)만 세 명이 있었는데, 맏 공주는 덕만 공주(德曼公主)로서 일찍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궁(宮)을 떠나 출가(出家 :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됨)하였다.

그리고 둘째 공주는 그 당시 삼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선화 공주(善花公主)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소문에 소문을 낳아 정열에 불타는 젊은 서동왕자(薯童王子)는 선화공주와의 결합을 애타게 소원하고 있었다.
진평왕의 셋째 공주는 천명(天明)으로서, 후에 김용춘(金龍春)에게 시집간다.

그리하여 진평왕은 남부여의 제안을 받아들여 둘째 선화공주를 서동 왕자에게 시집보내니, 두 나라는 사돈의 관계가 되어, 남부여의 위덕왕(威德王), 혜왕(惠王 : 재위 2년)과 법왕(法王 : 재위 2년)을 거쳐 무왕(武王) 2년에 이르기까지 전쟁 한 번 없이 화평하였다.
그 동안 선화 공주의 남편인 서동은 왕증손(王曾孫)이거나 왕손(王孫) 또는 태자(太子)의 위(位)에 있었다.

서기 600년, 서동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무왕(武王)이다.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서기 602년), 더 이상 왕자의 생산이 불가능하므로 왕의 셋째 딸 천명(天明)의 남편 김용춘(金龍春)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미 출가한 덕만 공주를 다시 불러들여 왕태녀(王太女)로 삼고, 모든 실권을 김용춘에게 위임하였다.

실라 왕실의 승계권을 따진다면, 이미 속세를 떠난 덕만 공주를 젖혀 둘 때, 둘째 공주 선화에게 당연히 승계권이 있다. 선화 공주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이미 남부여의 왕위에 잇는 무왕과 실라의 여왕이 서로 부부 관계가 되므로, 한반도 남반부는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세욕이 앞선 남부여 무왕의 작은 동서(同壻)인 실라의 김용춘은 이미 출가한 큰 공주 덕만을 허수아비로 앞에 내세우고, 그 실권을 자신이 장악하였다.
그의 속셈을 간파한 남부여의 무왕은 크게 분개하여 실라 왕실에 김용춘의 징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무왕은 김용춘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며 오랜 평화의 정적을 깨고 병을 일으켜 아모산성(阿莫山城 : 지금의 雲峰)을 공격하니, 실라는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 지금의 德裕山)에 성책을 쌓아 남부여의 공격을 막았다.

남부여의 무왕은 좌평(佐平) 해수(解?)를 장군으로 하여 4성(四城)을 공격하니, 실라 측은 건품(乾品)과 무은(武殷)을 내세워 맞섰다.
이리하여 양측은 지금의 충북 괴산(槐山), 연풍(延豊), 보은(報恩) 등지와 지리산의 무주(茂朱), 용담(龍潭), 금산(金山), 지례(知禮), 덕유산의 동쪽 함양(咸陽), 운봉(雲峰), 안의(安義) 등지에서 격렬한 혈전을 벌였다.

김용춘은 진평왕(眞平王)의 참모로 있다가, 남부여의 무왕(武王)이 직접 전쟁의 선두에 나서면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내성사신(內省使臣)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출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同壻戰爭)이다.

실라[新羅]와 남부여(南夫餘)는 그 후 철천지 원수가 되어 어느 한 나라의 망국(亡國)을 볼 때까지 격렬하게 싸웠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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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물넷 124.80.69.168 2006-10-23

    안녕하세요~ 김용철님. 님께서 10월22일 이곳에 올려주신 댓글 삭제하였습니다. 단순히 UUUUU란 글자만 넣으셨던 것도있지만, 띄어쓰기가 없어서 그런지 댓글화면이 가로로 깨져보이는 현상때문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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