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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장 고려-몽골 연합대군 일본원정 1

본서는 우리 민족의 해상활동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미리 양지하기 바란다.

고려-몽골 연합해군, 일본원정 1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의 기마유목민족은 천산(天山)과 알타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천해(天海-Bikal), 비류호(沸流湖-Buir), 홀승호(忽昇湖-Xalxing), 천지(天池-하늘못) 등의 큰 호수나 흑룡강(黑龍江), 요하(遼河) 같은 물가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워 살았다. 따라서 말과 물을 잘 다루고 지배할 줄 알아 내륙족(內陸族)인 중화족(中華族•華夏族)을 황하(黃河) 상류에 있는 화산(華山) 주위에 묶어 놓고 큰 바다(黃海)로의 진출을 철저히 봉쇄했었음은 이미 ‘대쥬신제국사’ 옛날 편을 통하여 상세히 설명한바 있다.

북만주, 우리 고대제국들이 흥기(興起)의 터전으로 삼았던 곳은 지금의 흥안령으로 불리는 비류호와 호른호 지간이었다. 이 지역의 치치아르(齊齊哈爾城)1)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던 백제는 곧 밝해만[渤海灣]의 님검성터(壬儉城故地)로 기반을 옮겨 제2차 정착지로 삼았다. 여기에서 본격적인 해양세력 외백제(外百濟)로 성장한 백제는 황해를 타고 내려와 한반도의 미추홀에 상륙했다. 그 후 비류와 함께 진출했던 온조의 십제(十齋) 세력은 한강변으로 분국하여 가고, 비류백제의 주력세력은 한동안 미추홀에 머물면서 안산만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소금으로 황해 건너 열국들과 국제무역을 행하며 순식간에 막강한 부국의 기틀을 잡아갔다.

이때의 백제는 오늘날 중국의 산동반도(山東半島)와 양쯔강 상•하구에 백제군(百濟郡)을 두어 경영하는 등 대해양제국(大海洋帝國)의 면목을 세웠으니 마치 지중해를 아우르던 로마제국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백제의 해상활동 영역은 아직 미개인들이 난립하던 왜(倭•日本) 열도를 석권하여 담로국인 나라 백제(奈良百濟)를 세웠으며, 본국과 해외 영지를 연결하는 해상 교통망을 근간으로 하여 발전된 조선(造船)과 항해(航海) 기술은 백제의 해상활동 영역을 더욱 더 넓히며 발전시켜갔던 것이다.

그들의 선진적인 선박 제조 기술은, 광개토태왕의 급습으로 위험에 처한 백제의 응신왕님[應神王仁]이 일본 땅에 경영하고 있던 식민지를 피난처로 결정하고 해상을 통해 신속하게 졸본 부여계 백제난민들과 더불어 대규모로 이주하여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일본을 낳게 한데서 그 저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은 처음부터 말과 배를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 중화족을 일방적으로 압도하여 왔다. 이의 예로 실증된 역사의 기록들 중 고•수전(高•隋戰)에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맞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植) 장군이 스스로 전선(戰船) 위에 판자와 철판을 깔고 수나라 해군 전함들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수나라의 함대를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들 수 있다.

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명성을 떨쳤던 신라시대 때의 장보고를 비롯하여, 계속해서 침략해 오는 왜구(倭寇)와 한구(漢寇)들을 바다 위에서 포촉하여 바다에서 섬멸시킨 명장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만큼 해군에 관한 한 우리는 항상 동양 최강의 전통을 자랑해 온 것이다.

서기 1206년,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대영웅 징기즈칸은 "말이 달릴 수있는 땅은 모두 나의 땅이다."라고 선언하고 강력한 몽골 기병을 앞세워 동서남북의 제국들을 무자비하게 정복하였는데 몽골제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지않은 나라가 없었다.

13세기 초 우리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 받은 유목기마민족의 대영웅 징기스칸의 정복전쟁으로 전 세계가 엄청난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그 거대한 폭풍은 서서히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고려(高麗)를 향하기 시작하였다.티베트의 서하(西夏)를 완전히 정복한 몽골은 말머리를 돌려 동정(東征)을 시작하니 서만주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불쥬신의 후예 거란족(契丹族)이 몽골군에 쫓기며 고려 북방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고려는 관군을 동원하여 거란의 패잔병을 강동성(江東城)으로 몰아넣는다. 1218년 9월의 일이었다.

고려가 이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그 때 몽골이 거란족을 쫓아 1만 병사를 파견해 오니 고려는 몽골 및 동진국(東眞國)과 연합하여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강동성에 입성한 연합군은 그 뒤처리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강동성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세계 최강 몽골제국을 상대로 고려의 김취려 장군은 가우리[高麗]의 연고권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마침내 그들을 설득하여 첫 번째의 고•몽 조약을 맺는데 합의한다.

가우리측은 이때의 합의에 따라 거란 장수 100여 명만 몽골측에 넘겨주고 그 백성들은 모두 가우리가 받아들이게 되었다. 왕씨 가우리는 이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정착시켰는데 사람들은 그 곳을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렀다.

곧이어 몽골은 포리대완(蒲里貸完)을 개경으로 파견하여 가우리 정부와 정식 국교를 열고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가우리와 몽골 간의 제1차 외교조약의 협의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양국은 우호 관계를 자손만대에 걸쳐 지속시킨다.
2. 몽골은 매년 10명 정도의 친선 사절을 가우리에 파견한다.
3. 가우리는 사신들에게 우호의 표시로 약간의 공물을 보낸다.

양국의 우호관계는 초기에는 돈독했으나 조약 체결 6년 만인 서기 1225년 1월, 몽골의 사절 착고예(著古與) 일행이 귀국하던 도중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깨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들의 방자하고 안하무인 한 행동을 보고 참지 못한 일부 가우리 젊은이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1) 치치아르(齊齊哈爾城)
백제건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대민족사의 제4권 “일본역사의 비밀(일명 倭史)”에서 세밀히 다룰 것이지만 여기서 백제의 출발점인 북만주의 치치아르를 언급하였기에 그 역사적 자료의 출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것이 당연하므로 간단히 초기 백제의 존재를 기록한 문헌이 흑룡강 향토록(黑龍江鄕土錄)이라는 것만 밝히고자 한다.

세계적인 대영웅 징기스칸(Chinggis-kahn)은 1162년에 태어나 양부 에수게이와 친모 후엘룬에 의하여 성장한다. 그런데 생모 후엘룬은 바로 고리(가우리)족의 여인이었다. 고리는 우리의 민족명인 고려, 코리, 가우리와 같은 의미로서 바로 가우리의 방언이다. 한마디로 고리족은 우리와 같은 DNA를 공유한 우리의 동포족인 것이다. 또 징기스칸의 4번째 부인도 훌란이라는 전설적인 미모의 솔롱고스(몽골인이 부르는 한국) 여인이었다.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족사의 다섯 번 째 시리즈 “부여사”에 소개하게 될 것이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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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환 218.154.62.156 2007-06-27

    오랜만에 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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