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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12장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이순신 제독의 마지막 선택 4

본 저자가 본서의 그림 작업을 끝내고 본문을 쓰고 있을 무렵인 지난 7월 22일, 본인이 운용하고 있는 ‘다물넷’ 싸이트 게시판에 김병섭씨로 부터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이 모여 공동 저술한 이순신에 대한 연구서였다.

그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간단히 소개하고 이 책을 접기로 한다.

①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와키자카는 전쟁 초반 용인전투에서 2천의 군사로 5만 명의 조선군을 물리친 명장이다.
그런 그가 한산도에서 이순신 제독에게 참패를 당하고 나서 6일 동안 식음을 전패하고 패전의 원인을 되짚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순신이 그저 훌륭한 조선의 장수중의 한명 정도로만 생각했었지 결코 그를 신의 경지에 이른 장수로 보지 않았다. 그런 나의 오만이 엄청난 참패를 불러왔다. 이제 나는 그를 상대로 싸우기가 심히 두렵게 되었다.”
“이순신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좋아하고, 흠모하면서도 죽이고 싶고, 함께 차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다.”
라고 그의 애증을 표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매년 이순신의 탄신일에 충무공 묘소를 찾아 참배를 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② 명국 수군도독 진린(陳璘)
조, 일 7년 전쟁의 막판에 등장한 진린은 가진 악행으로 이순신의 작전을 방해만 했던 교만한 자다.
그는 집요한 방해공작을 묵묵히 이겨내며 조국을 구한다는 한 가지 목표에만 정진하는 이순신의 인품에 끝내는 감동하고 만다. 다음은 명나라 실록에 있는 진린이 황제 신종(만력제)에게 올렸다는 장계의 내용이다.

“황제페하, 조선의 전쟁이 끝나면 즉시 조선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보내라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뛰어나고, 장수로서의 품덕을 고루 지닌 자로서 대명국의 장수로 거두신다면 반드시 후금(後金)의 세력을 제압하고 그 땅(滿洲)을 명국의 것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통제사 이순신은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준비하여 전란이 일어나자 홀로 싸워 왜적의 해상수로를 봉쇄하여 적들로 하여금 보급부족으로 남쪽 끝까지 퇴각시킨 공이 있음에도 그가 백성들의 신망을 얻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임금과 조정대신들은 오히려 그를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려 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명에 복종하여 백의종군의 굴욕을 참아내며 결코 왕을 원망치 아니하고 충의를 보인 덕목을 지닌 자 이옵니다.
조선의 왕이 이순신을 핍박하고 원균에게 통제사의 권한을 주었더니 원균이 수백 척의 조선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단 한차례의 해전으로 모두 침몰시키고 적에게 도살되었나이다.

그 후, 조선이 또다시 망국의 위협에 직면하자 왕은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여 나라를 구하라 했나이다. 이순신은 곧 패잔선 십수 척을 이끌고 왜군선 수백 척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여 왜선 수백 척을 불사르고 또다시 조선을 구해냈나이다.

신이 판단컨대 이순신이 큰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백성들의 마음은 그에게 향할 것이고 바로 이것 때문에 조선의 임금은 반드시 이순신을 죽일 것이옵니다. 그러니 황제폐하께서 이순신을 데려다 명국의 장수로 삼으시고 북쪽 오랑캐(후금)를 견제케 하옵소서.”

그토록 욕심 많고 부패의 표상이었던 명국 장수 진린이 이순신이 처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장의 장계내용은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③ 장웨이링 교수 6)
1990년 3월, 장웨이링 교수는 하북에서 열린 제1차 중, 일 합동 이순신 연구회에 참석하여 처음으로 거북선과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97년 10월 북경대학의 초청으로 학생들과 더불어 이순신 제독에 관하여 토의한 바 있는데 이 자리에서 거북선의 모형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선진적인 전투함이 4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이순신이라고 하는 제독이 홀로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때의 강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청제국이 망한 이유는 아편의 만연이나, 무능한 황제 그리고 부패한 정치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로는 당시의 중국과 같은 상황 하에서도 홀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조선의 이순신 같은 유능한 해군 장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50척도 안되는 군선과 5천명도 안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무려 40만 명이 넘는 일본군과 1300척의 대함대를 상대하여 단 한차례의 패함도 없이 모두 승리한 불가사의한 전과를 이루고 조국을 구해냈다.”

“영국이나 스페인 그리고 유럽의 소국 네덜란드를 보라. 이들은 모두 엄청난 영토를 보유한 대청제국에 비하여 한없이 작은 나라들이지만 강력한 해군력으로 바다를 지배하였기에 중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인근의 조선도 해군의 승리를 통하여 강력한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 교수는 곧이어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실시해 본 조, 일 7년 전쟁의 모의실험 결과를 소개하였다.
그것은 만약 이순신이 조선의 장수가 아니고 일본의 장수로서 히데요시의 협력을 받으며 싸운다는 가정 하에 실시한 가상전쟁 실험이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제일 먼저 조선국이 멸망하고, 그 다음은 대명제국 그리고 뱃길을 따라 베트남과 태국에 이어 인도네시아까지가 모두 일본에게 점령되었다는 내용이었다.

④이케다 하야시 교수 (일본)
1996년 4월, 12명의 ‘이순신 연구회’ 학자들은 좀 색다른 난상 토론을 벌렸다.
토론의 주제는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으로 전국시대의 역사를 바라보고 자라온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성리학을 본(本)으로 삼고 살아온 이순신이 취한 이상한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의 12학자가 품은 첫 번째 의문은 이순신 같은 영민한 장군이 왜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에 있었다. 조선왕실을 존망의 위기에서 홀로 구해내는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정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보다 만약 혁명을 선택 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이러한 의구심을 세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해 본 최종 결론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조선은 그것으로 멸망했을 것이고, 새로운 덕수이씨(德水李氏) 이순신의 나라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12학자 전원의 결론이었다. 그들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군사력에 있어서 이순신에게는 2만 명의 수군과 5천명의 의병 그리고 적어도 1만 명 관군들이 이순신 측에 협력할 것이므로 약 3만 5천명의 군사력을 즉시 동원할 수 있고, 또 한강으로 곧장 진공할 수 있는 절대 해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쟁수행 능력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반하여 이연 왕에게 충성하는 군사는 어림군을 제외하고 별로 보이지 않으며 장수 또한 이순신에게 견줄만한 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다음 백성들이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연 왕이 백성을 지켜야 할 의무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경력이 있는 반면에 이순신은 목숨을 던져 백성을 지키고 나라를 구해낸 사실과, 왕당파들이 반상(班常)의 계급을 철저히 구별한데 비하여, 이순신은 하급 계층의 백성들도 어루만지는 포용력을 보였으므로 백성들이 일어나 이순신의 혁명군을 지지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변수는 명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인데 이때의 명국은 제국의 말기 현상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어서 또 다시 조선의 내전에 끼어들 형편이 못되었다.
특히 북방세력의 첨예한 침략 기운에 허덕이며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라도 스카우트 해 가야할 형편에서 이미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잃은 왕을 위하여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신흥세력과 맞설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그의 제국을 조선 땅에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위 그림은 ‘오오다 텐요오(太田天洋)’라는 일본 화가가 1940년에 그린 [조선전역해전도:朝鮮戰役海戰圖]로서 내용은 칠천량 해전도이다.
일본 측에서 보면 조•일 7년 전쟁 중 유일하게 승리를 기록한 해전인 것이다.
당시의 해전상황을 조사 연구하는데 좋은 참고 자료를 많이 묘사하고 있어서, 특별히 사진의 사용 저작권자 김세랑(www.e-hobbist.com, 멀티매니아 호비스트)님의 허락을 받아 실리게 되었다.

6) 장 교수는 중국학생들에게 바다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는 이순신을 알게된 후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후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여하였는데, 그 내용이 고구려 역사의 침탈로 이어지자 스스로 연구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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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zz 203.170.109.223 2009-08-24

    라몽아 그냥 짜져있으라.. 이미 영국까지도 이순신을 해군훈련교과서의 표본까지도 삼는단다
    그정도로 이순신이 존경받고 있다는 뜻이다

  • 김종수 211.182.113.2 2009-08-14

    이씨들의 조선은 영웅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 고인돌 124.53.105.59 2009-06-20

    예전 위 내용을 본 적이 있어요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했더라면 썩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을 멸하고 좀더 강하고 발전된 나라를 개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랬더라면 참담한 일제시대도 없었을거라 생각됩니다.

  • 도라몽 211.117.162.214 2008-05-31

    죄송하지만, 낚인 글에 놀아났군요.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라는 글은 어느 미친 인간이 네티즌들을 낚이려고
    조작한 글입니다. 속지 마시고, 고치세요....
    이미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이 글은 낚인 글이라 판명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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