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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8장 이순신함대
이순신 연합함대(聯合艦隊) 제2차 출전 전과 1
  • ① 5월 29일 새벽 4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전선 23척을 이끌고 기동함대를 편성한 후 단독으로 발진. 이날 오전 9시경 원균이 전선 3척을 이끌고 합류함.
  • ② 5월 29일, 사천에서 적함대를 발견하고 해전을 벌여 일본 해군의 전함 13척을 격침시키고. 왜병 2600명 도살 함.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제독이 총상을 입음.
  • ③ 6월 2일, 당포에서 일본해군의 최 정예라는 가메이 고레노리 함대를 만나 정식으로 해전을 벌임. 그 결과 돌격선인 거북선으로 적장 가메이 고레노리를 격살하고 일본전함 21척과 적병 2820명을 전멸시킴.
  • ④ 6월 4일, 이억기 수사가 전라우수영 함대 25척을 이끌고 도착하여 삼도 연합함대를 형성함, 이날 이순신은 연합함대 사령관이 됨.
  • ⑤ 6월 5일, 진해 앞바다에서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대형전함 4척과 소선 2척 등 도합 6척을 격침시킴.
  • ⑥ 6월 5일 오후, 당항포에서 큰 해전을 벌여 일본해군 정예 중에 최정예 함대라는 구루지마 함대의 기함을 비롯하여 26척의 전함을 모조리 침몰시키고, 적장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道之) 등 2700명을 전멸시킴.
  • ⑦ 6월 7일, 율포 앞바다에서 도망가는 적함 3척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3척을 나포함.

▶ 이순신 함대의 제2차 출동 전과
적함: 69척 격침(3척-나포), 적병: 10,120명 격살.

서울, 한때는 이씨들이 왕씨 가우리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중국의 속국을 자처하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 나라의 그들만의 통치권을 행사하던 도성(都城)이 아니던가.

그동안 이 땅의 백성들을 하늘로 모시겠다며 민심천심(民心天心)이라는 가소로운 소리로 백성들을 기만하던 왕가와 그 만이 홀로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빌붙어 입만 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조작하고 실제로는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여 호사를 누릴 궁리만 하던 관료대신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들끓던 서울의 왕궁터가 지금은 텅 빈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조선의 큰 국난을 잘 넘긴 업적이 있다며 감히 선조(宣祖)라는 존칭을 받은 그 위대한 왕 이연이 적병이 접근해오자 제 백성들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야반도주 해버리자 국왕의 배신에 분노한 백성들이 몰려들어 그가 거주하며 갖은 못된 짓을 일삼던 이씨가의 왕궁을 철저히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불타버린 궁궐의 잔해만 어지러운 이 오욕의 왕궁 터에 조선 침략군 왜군 총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처음 개전전략 계획을 수립할 때 왜군 수뇌부는 서울의 궁성점령을 최종 목표로 삼았고 서울에서 조선왕을 잡는 것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초의 작전계획대로 지금 서울의 왕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력을 다하여 나라를 지켜야할 왕이 먼저 도망가고 없었다.

서울에 진입한 왜군들이 텅 빈 궁궐을 접수하며 대단히 당혹스러웠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사무라이 정신을 무사들의 최고덕목으로 알고 있는 왜군들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의 작은 영주들에게서 조차도 제 백성과 제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큰 나라로 생각했던 조선의 국왕이 이처럼 거대한 왕궁을 버리고 달아났다니 이 같은 비겁한 행동을 도대체 어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한나라의 국왕이라면 목숨을 걸고 제 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끝내 힘이 부족하여 실패하게 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자성하며 스스로 자결이라도 하여 끝까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훌륭한 통치자의 기본자세가 아닌가?

이때 서울에 입성하여 굳이 이씨 왕궁의 폐허 위에 왜군 총사령부를 설치한 인물은 놀랍게도 약관 20세의 나이로 30만 조선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9)였다. 그는 15세 때 이미 히데요시 군단의 규슈 원정전에 참가한 이래 전쟁터에서 자라 온 젊은 무사로서 조선 국왕의 비겁한 행동에 분노와 경멸의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왜군은 개전 초기의 작전계획을 차질 없이 성공시켜 대망의 최종목표인 서울을 점령하였으나 애초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두 가지의 큰 변수가 발생하여 다음 작전을 수행하는데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첫째는 조선의 왕이 비겁하게 도망쳐 버려 항복을 받아낼 수 없게 된 것이고, 둘째 변수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순신 제독이 등장하여 일본해군을 일방적으로 괴멸시키며 남해의 수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서해안으로 돌아 한강의 마포나루로 연결하려던 군수물자의 보급선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도망간 왕은 추격하여 잡으면 그만이지만,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길고 긴 보급선은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해상 보급선이 차단된 상태에서 육상으로만 병참수송을 해야 하는데, 한국 지리의 특성상 험난한 산악과 수많은 강물을 도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다가, 초기에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조선의 관군들이 이제는 백성들의 의병군들에 합류하여 육상 보급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병참물자들을 탈취해가는 사건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로서 서울에 진주한 일본군들은 어느새 심각한 병참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9)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3~1655)
17세 때 히데요시의 양녀 고히메(豪姬)와 결혼한 후 그 자신도 양자가 되었다.
조, 일 7년 전쟁에 일본군 육군 총 사령관으로 참전했고 전후에는 까마귀 성으로 더 유명한 오카야마성의 성주였다. 히데요시 정부의 중신 5 타이로(大老)의 하나로 히데요시 사망 후 세키가와라(關原) 전투에서 도꾸가와에게 져서 하치죠(八丈)섬에 유배되어 사망한다.

  • ※ 내용중 물음표(?)형태로 표기된 글자는 웹상에서 표현이 불가능한 확장한자입니다.
  • ※ 한자의 음이 바깥음과 다를 때에는 []로 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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