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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보는 역사

대한민족통사③ 이순신

  제3장 역성혁명(易姓革命)
역성혁명(易姓革命) 2

1388년(우왕 14년), 가우리의 임금은 그동안 왕실의 안위를 지키는데 일등공신인 이성계에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벼슬을 제수한다.

이제 이성계는 가우리군의 최고사령인 최영 다음의 서열 제2위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의 자격으로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이로서 오랜 숙원이었던 가우리의 병권을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지금부터 대권을 향한 야심에 찬 도박을 결심하고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막사로 불러 요동정벌에 앞서 부패한 정부의 개혁을 먼저 실행하자고 설득하고 반역적인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다.

압록강 복판의 위화도에서 나라의 명령을 따라 요동정벌의 진격을 감행할 것인지 회군하여 가문의 영달을 위하여 역성혁명을 도모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성계.

이성계가 우리 민족의 염원인 요동지역 강역을 수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돌아선 핑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以小事大 保國之道’즉 ‘큰 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길이다.’

이것이 이성계가 민족의 옛 땅을 되찾으라고 지휘권을 맡긴 가우리의 병사들을 되돌리어 제 나라 황실의 맥을 끊고, 자신의 가문으로 새나라의 지배자로 군림시키려고 토한 그의 당위성이었다.
역성혁명의 구실로서는 너무나 치욕스러운 사대주의의 표본인 것이다.

이성계가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노리고 달려들자 크게 놀란 73세의 노장 최영은 어림군 천여 명을 이끌고 개경성 밖에서 이성계의 반군을 맞아 용감하게 분전했으나 결국 화원으로 쫓겨 갔고 곧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高峰縣)으로 귀양 갔다가 1388년 12월에 처형되었다.
문하시중 최영이 사라지자, 우왕은 80명의 내시들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성계의 진지를 습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는데 강력한 이성계의 병사들에게 오히려 붙잡혀 강화도를 거쳐 강릉까지 쫓겨가는 비운을 맞이 하였다.

이성계는 다음 왕으로 창왕(昌王)을 내세워 그에게 역심이 없음을 내세워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한 후 그 역시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결국 이들이 모두 왕손이 아닌 요승 신돈(妖僧辛旽)의 아들이라고 뒤집어 씌워 각각 강화도와 강릉에서 처형하고 말았다.
이후 이성계는 싫다는 공양왕(恭讓王)을 억지로 왕위에 세웠다가 임금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며 그마저 내쫓으니, 이로써 고려는 건국 47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후 자신의 야망대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왕씨(王氏)들의 반격이 두려워 1394년 4월, 공양왕을 올가미로 목을 매서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왕씨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멸족시켜 버렸다. 이 때,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극소수의 왕씨들은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 성씨를 옥(玉), 전(全), 전(田)씨 등으로 변성하여 살았다.

이 때 이성계는 왕위 찬탈보다 왕씨 멸족이라는 훨씬 더 큰 도덕적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 민족 6천년 역사 중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민족의 긍지를 팔아 가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던 이씨 왕조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1392년, 드디어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1394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한성부라 하였다. 한편, 신흥 대국 명나라가 과거에 이성계가 명을 정벌하려 했음을 의심하자, 이성계는 즉시 그의 ‘以小事大 保國之道’라는 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즉, 20만 800명에 달하는 군대를 축소•개편하고, 최무선의 혼이 담긴 화통도감도 해체하여 명나라에 저항할 뜻이 추호도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 후 특사를 급파하여 그의 왕위에 대한 승인을 간청하였다.

이성계는 명제(明帝)가 자신의 왕위를 인정하여 주면, 세세로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의 역성혁명도 사실은 명나라를 위한 것이었다고 아첨하는 추태를 부렸다.

이성계 가문의 선조들이 대대로 강성한 몽골 침략자들에게 빌붙어 그들의 벼슬아치로 연명해 왔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성계는 그런 가문의 혈통을 이어 받은 탓인지 몽골대신 새로운 슈퍼 파워로 등장한 주원장의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우리민족을 종으로 전락시키는 매국적인 사대사상으로 일관하였는데, 그의 작태가 얼마나 한심했는지설명하기에는 같은 한민족의 일원으로 본 저자의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한 일이어서 잠시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역사니까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성계는 가우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왕권탈취에 성공한 후 제일 처음 한 일로 명왕조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안주하며 이씨왕가를 지켜간다는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외교상 원칙으로 정한다.
한웅시대와 단군시대를 거치며 수천 년 동안 화하족에 대한 동이 한민족의 우위적인 역학관계를 완전히 뒤집어 스스로 주종간의 위치를 뒤집는 작태를 연출한 것이다.

그가 저지른 첫 번째의 추태를 들여다보면, 이제 자신의 왕국을 가지게 된 이성계가 제가 세운 나라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명나라 왕에게 애걸하는 못난 짓을 한다.
제 아무리 무식한 촌부도 제자식의 이름은 제가 짓는 것인데 소위 일국의 왕이라는 자가 민족의 자존심은 모조리 내팽개치고 제가 다스릴 나라의 이름을 상전에게 지어달라는 꼴이어서 이런 국제적인 망신을 과연 어찌 이해해야 할 것이며, 또 이런 황당한 요청을 받은 한족들의 비웃음소리를 우리는 어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이때 이성계는 새 나라의 이름으로 자신의 고향땅 화영(和榮)이나 고대에 천하를 지배했던 쥬신[朝鮮] 중에서 택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제는 예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던 강국 쥬신이 지금은 자신들의 번국(藩國) 신세로 전락했음을 통쾌하게 여기어 쥬신으로 정하여 주니 비로소 이씨 쥬신[李氏朝鮮] 왕조가 이 땅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이 무력으로 왕권을 탈취하였으므로, 무장이 힘을 갖게 되면 자신이 세운 왕가도 자신이 저질렀던 똑같은 꼴로 왕실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씨 왕조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는 무장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으며, 철저한 감시가 필요했으니 항상 나라의 보위보다는 이씨왕가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이리하여 무인들은 갑옷을 입기보다는 선비가 되어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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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환 218.154.62.156 2008-11-10

    중국을 상국으로 모신게 안타깝긴 하지만..안 그랬다면 백성들은 또 전쟁에 시달려야 했겠죠..백성들은 전쟁으로 가족들 죽고 황제의 백성이 되는 건 원치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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